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조선 유교사회의 고품격 로망스...... 도산서원 퇴계 이황 두향

화이트보스 2018. 8. 26. 10:59


퇴계와 두향 ‘매화연애’를 하다 [5-2]

프로파일 몽촌 2017. 11. 12.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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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중앙] 201005호 (2010.05.01)
이상국의 미인별곡 [5- 1] 조선 유교사회의 고품격 로망스......
두보의 향기[杜香]는 바람에 날리고…

“여봐라, 누구 있느냐?”
“예, 나으리.”
“이 분매가 어찌 하여 여기에 와 있느냐? 어제도 없던 것이 제 발이 달려서 온 것은 아닐 터인데…. 누가 이런 것을 가져다 놓았단 말인가?”
“아, 예. 그러니까….”

대청 앞으로 달려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관원은 군수의 심기를 짐작해보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저어기, 우리 고을 관기 중에 두향(杜香)이란 년이 있사온데, 어제 소인에게 청을 넣어 굳이 이것을 거기에다 두기를 원하였기에….”
“관기? 내 부임한 뒤에 기생을 점고하는 일도 없앴고 이런저런 술자리에서도 아무도 부르지 않았거늘 어찌 그가 내게 이런 일을 하였을꼬?”
“나으리,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당장 거두겠습니다. 다만 그 아이가 하도 간곡하여….”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렇게 신기한 형상을 한 매화를 가꾼 것도 용하거니와 그걸 신임 사또에게 굳이 내놓은 까닭은 무엇일꼬?”
“그렇다면, 나으리. 관기 두향을 대령시킬까요?”

관원은 기회를 잡은 듯 빠르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퇴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내 백성의 물건을 무엇 하나라도 그저 받을 수 없으니, 그 아이더러 도로 가져가라 일러라.”
“네, 알겠사옵니다.”

관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주억거렸다. 이튿날 아침 퇴계는 대청에서 다시 다른 분매(盆梅)를 만났다. 이번에는 수줍어 볼이 터질 듯한 홍매였다. 어제의 매화는 말 없이 등 뒤에 서 있는 조강지처 같더니, 오늘의 매화는 시담(詩談)을 나눌 듯 여유로운 해어화의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도도하고 음전한 느낌이 여전하여 화사한 저고리 깃으로 드나드는 향기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었다.

아니, 어제 그렇게 말을 했건만 다시 매화를 가져다 놓다니…. 고을 원의 영(令)이 일개 기생에게도 서지 않는단 말인가? “게 누구 있느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관원이 쪼르르 달려왔다. ‘고집스러운 년…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이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또의 책망을 받을 준비를 하고 머리를 조아린 그에게, 퇴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가 이렇듯 번갈아 매화를 내미는 뜻이 필시 있을 듯하구나. 관기 두향을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여라.”

관원은 욕을 듣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겼는지, 얼굴이 환해지며 달려나갔다.

“관기 두향, 대령하였사옵니다.” 아직도 추운 날씨에 파르르한 입술 같은 붉은 꽃잎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들어왔다. 뺨이 몹시 희고 코와 얼굴선이 곱다. 이 시골에 어찌 이런 자색(姿色)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열일곱? 열여덟? 그쯤 되어 보이는 여윈 아이다. 절을 하고 앉은 두향에게 퇴계가 물었다.

“저 매화는 자네가 보낸 것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어찌 하여 매화를 보냈으며, 더구나 돌려보낸 꽃을 다시 보낸 뜻은 무엇인가?”
“매화는 인격화라 하여, 모름지기 그와 함께할 주인이 따로 있다 하였습니다. 소녀, 박복하여 모친을 일찍 잃었으나 몇 개의 분매를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매화를 가까이 했던지라 기생이 되어서도 이 버릇을 놓지 못하고 꽃을 키우며 수신(修身)의 경(經)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천하의 도학자인 퇴계 어른이 이 고을 수령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 화격(花格)에 걸맞은 사람이라고 여겨 올리게 된 것입니다. 부디, 미천한 년의 정성이나마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가상한 일이긴 하나, 내가 어찌 민(民)의 귀한 것을 취하겠느냐? 도리에도 맞지 않고, 또 지금 내가 그런 것을 즐길 마음의 형편도 되지 못하니 거두어 가거라. 다만 그 뜻만을 받으리니, 꽃은 이제 되었다.”
“나으리, 저는 나으리의 시 한 편을 외우며 굳세고 어진 마음을 키웠사옵니다.”
“나의 시를 어찌 이 궁벽한 곳에서 알았단 말이냐?”
“천한 것들이 음률로 익혀 부르고 있사옵니다.”
“어떤 노래를 말하는 것이냐? 한번 불러볼 수 있겠느냐.”
“네. 나으리.”

한 그루 매화 가지에 눈이 가득
넓은 바다에 풍진뿐인데 저 홀로 연못을 꿈꾸는구나
홍문관에 앉아 비 갠 봄밤의 달을 보네
새무리 울 때 매화 생각이 떠오르는구나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玉堂坐對春霽月(옥당좌대춘제월)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퇴계는 눈을 감았다. 가도가도 어지러운 세상에서 눈 덮인 매화처럼 살고자 했던 뜻을 문득 한 소녀에게 들켰던 모양이다. 그는 물었다. “이 시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더란 말이냐?”
“풍진의 바다에서 홀로 작은 연못처럼 살고자 하는 꿈이 깊이 마음을 울렸더이다.” “그대가 풍진을 어찌 안단 말인가?”

“불초 소녀 아직 인생을 종잡기는 어려우나, 가장 추운 날에 꽃을 준비하는 매화의 결의(潔意)를 익숙하게 보아온지라 신산(辛酸)이 무슨 의미인지는 짐작하고 있사옵니다.”
“세상에 도(道)와 수행이 어찌 따로 있겠느냐. 너도 하나의 목숨을 받고 태어나 매화 줄기 하나에 너의 마음을 피워올렸음즉, 너 또한 기특한 꽃이 아니겠느냐?”

“망극하옵니다, 나으리.” 그때 풀 먹인 안동포 같은 퇴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 너의 귀한 분(盆)과 더불어 함께 침실로 거두어 들이고자 하느니, 적적한 밤에 이 외로운 늙은이의 동무가 되어줄 수 있느냐?”
“거두어 주신다면 신명을 다 하겠사옵니다.” 두향은 거문고 연주에 뛰어났다.

퇴계는 그녀에게 ‘문향(聞香)’이라는 호를 붙여주기도 했다. 문향은 원래 매화 향기가 워낙 그윽하여 코로 맡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라는 의미지만, 그것이 두향에게 붙여지니 거문고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코로 향기를 맡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어 빼어난 가명(佳名)이 되었다.

남녀가 타고난 자연스러운 성정을 억압하는 것이 진실로 예(禮)가 아니라는 생각을 지녔던 퇴계였던지라 두향과의 밤은 스스럼없고 야했다. 나신으로 거문고를 뜯는 여인 앞에서 그는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두향은 가르치기도 했다. 사실 거문고는 산란한 음률이 아니라, 천하의 원리가 담긴 철학의 울림통이라. 그는 두향의 연주를 들으면서 128행의 금보가(琴譜歌)를 지어 남기기도 했다. 피폐한 사내의 심경을 달랜 달콤하고 애틋한 봄밤은 그렇게 사위어갔다.

강선대에서 거문고를 타던 봄밤

두 사람이 아마도 가장 행복했던 때는 5월의 어느 밤, 강선대에서였을 것이다. 두향이 태어난 곳은 단양군 단성면 두항(斗抗)이란 마을이다. 두항 출신인 그녀의 호가 두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닌 듯 보이지만, 그 선후(先後)가 분명치는 않다. 혹자는 마을 이름을 따서 기생을 호명하던 것이 변하였다고 하고, 혹자는 기생이 유명해지자 마을 이름이 그와 비슷하게 바뀌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두항 마을에서 두향은 어린 시절 강선대를 바라보며 살았을 것이다. 선녀가 내려왔다는 절경의 벼랑에 얹힌 누대(樓臺). 그녀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그 자리에 앉혀보며 행복해하지 않았을까. 그러던 그녀는 천하의 지식인 애인 퇴계와 함께 단양8경을 이루는 절경을 구석구석 구경하면서 마침내 강선대에 이르렀다. 물론 이 나들이는 절대 비밀로 삼았다.

중앙정부에서 그를 탄핵할 호재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몸종 하나만 데리고 나섰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누대 위에 거문고를 안고 앉은 절색의 두향과 가락을 타고 노래를 부르는 퇴계. 술판이 돌자 두향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선녀가 내려온 듯 학이 나는 듯 황홀한 풍경에, 따라온 하인이 눈을 껌벅였다.

이윽고 강선대 난간에서 두 사람은 한 사람처럼 깊이 껴안고 오랫동안 침묵으로 먼 아래로 흐르는 장회나루를 바라보았다. 덧없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두향은 울고 있었다.
“어이 하여 이렇게 좋은 날 너는 눈물을 보이느냐?”
“제가 너무 많은 복을 받아 감히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하여 철없이 나오는 울음이더이다.”

“허허, 복은 내가 받은 게지. 내가 이곳에 와서 읊은 100여 수 혹애매(惑愛梅)의 시는 모두 너와 매화 사이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더냐? 진실로 너로 해서 내가 이렇듯 늘그막에 꽃이 피는구나.”
“망극하옵니다.”

퇴계 매화시의 정수는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제3편이리라.

뜨락에서 신을 끄니 달이 사람을 따라오네
매화 옆에서 서성거리기 몇 번이던가
밤 깊어 오래 앉으니 일어날 생각이 없고
향기가 옷과 망건에 가득하니 그림자가 몸에 꽉 찼네
步躡中庭月趁人(보섭중정월진인)
梅邊行繞幾回巡(매변행요기회순)
夜深坐久渾忘起(야심좌구혼망기)
香滿衣布影滿身(향만의포영만신)

그 해 9월, 퇴계의 넷째 형인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바람에 친척끼리 한 지역의 목민으로 근무하면 안 되는 상피(相避) 규정에 따라 퇴계는 경상도 풍기군수로 이임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매화 피는 시절에 만났던 두향을 다음 매화가 피기도 전에 헤어져야 하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들을 이어준 분매 앞에 앉아 있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이니 만나는 일이 있으면 헤어지는 일도 있지 않겠느냐?”
퇴계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나으리와 함께 두 번 매화를 볼 시간도 주지 않으니 시절이 매정하긴 하지요.”
두향은 눈가에 큰 눈물방울을 달고 퇴계를 바라봤다.

“이제 거문고를 들을 수 없으니 귀가 답답하겠구나.”
“그 화창(話唱)을 들을 수 없으니 거문고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래도 이자필반(離者必返)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흘러가는 장회나루에서 보았던 것이 삶의 진상이 아니겠느냐. 마음을 수습하고 부디 아름답게 살아가거라.”
“나으리.”
“두향아, 헤어지는 것보다 더 아픈 일은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이니라.”

“나으리께 분매 하나를 올려도 될지요?”
“내 올 때 아무것도 지니고 오지 않았으니 갈 때 꽃잎 한 장이라도 가져갈 수가 있겠느냐?”
그렇게 퇴계는 영(嶺)을 넘어 풍기로 떠났다. 퇴계가 떠난 뒤 그녀가 기적(妓籍)에서 물러나 홀로 살았다고 하나, 굳이 그렇게 정절을 단속한 것은 뒷사람들의 노파심이 아닐까. 몇 년 뒤 두향은 퇴계에게 분매를 두 그루 보냈다. 매화가 간 뒤 퇴계의 시 한 수가 돌아왔다.

누런 책 사이에서 성현을 만나네
매화 창을 다시 보니 봄소식일세
텅 빈 환한 방에 초연히 앉았으니
거문고 앞에서 줄 끊어졌다 한숨 쉬지 마오
黃卷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불결한 내 모습 매화에게 보이기 부끄럽다 이 스토리를 더욱 비장하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두향이 퇴계를 그리워하다가 강선대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살을 보탰다. 그렇게 두향을 보내면 고결한 뜻이야 돋보이겠지만 유학의 꽃인 매화의 굳센 인내 또한 함께 추락하고 만다. 뜻을 지키며 은은히 생을 마감하는 것이 훨씬 두향답지 않은가.

한편 퇴계는 도산서원의 뜰에 두향이 보낸 매화 중 하나를 심었다. 지금의 도산매가 바로 그것이다. 1570년 겨울(음력 12월 3일) 70세의 퇴계가 설사를 했다. 그때 퇴계는 옆에 있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매형(梅兄)을 안 보이는 곳으로 좀 옮겨 드리려무나. 불결한 내 모습을 보이기 부끄럽구나.”
매분을 옮기자 퇴계는 가만히 그쪽을 바라봤다.

눈앞에 오래전 두향이 사물거렸다. 나흘 뒤인 12월 7일. 아침에 햇살이 들어왔다. 간밤 추위에 매화가 얼마나 떨었을까. 빛을 받으며 탄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 환하게 웃는 옛 여인이 다시 떠올랐다. 퇴계는 제자에게 말했다. “저 매화에 물을 주렴.” 오후에는 다시 날이 흐려졌다. 흰 구름이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 남짓 내렸다.

그는 매화분을 당겨 달라고 말했다. “얘들아. 내가 누운 자리를 좀 정돈해주려무나. 그리고 내 몸을 반듯하게 앉혀다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앉은 채 숨을 거두었다. 구름이 흩어지고 눈이 그쳤다. 퇴계는 생전에 이렇게 읊었다.

나의 전생은 아마도 밝은 달이었으리
몇 생을 닦아야 매화에 이를 수 있을까
前身應是明月(전신응시명월)
幾生修到梅花(기생수도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