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내 고향 문화유적 답사 경북 안동 퇴계 이항 율곡

화이트보스 2018. 8. 26. 11:39


이영승의 붓을 따라] 내 고향 문화유적 답사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18.08.13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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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로지향(鄒魯之鄕)은 맹자가 추나라 사람이고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라는 뜻인데 예로부터 성현을 존경하고 도덕과 학문을 숭상하며 예의를 지키는 선비의 고장을 의미한다. 안동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추로지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산서원 입구에 세워진 공자의 77대 종손 공덕성(孔德成)이 쓴 추로지향이라는 친필의 비석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안동은 유교 문화, 씨족 문화, 양반 문화가 발달한 지방이다. 일반적으로 조상 제사는 고조부까지 4대를 모시지만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는 조정에서 사당과 토지를 내려 영구히 모시도록 하였다. 이러한 신위(神位)를 국불천위(國不遷位)라 한다. 그리고 지방 유림에서 공론으로 결정하는 불천위를 향불천위 또는 유림 불천위라 한다. 안동 지방에는 퇴계선생과 서애, 학봉 등 불천위가 모두 47위로 다른 지방에 비해서 월등히 많다. 내 고향 안동은 이토록 역사적 인물이 많이 배출된 자랑스러운 곳이다. 그래서 누가 내게 고향을 물으면 ‘안동’이라는 대답의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다. 

고려대에서 수필을 배워 등단한 ‘여울회’ 문우(文友)들이 몇 번이나 ‘안동으로 문화유적 답사’를 가자고 했다. 그러던 중 교수님의 제의로 일정이 잡혔다. 안동 지방의 많은 유적지 중 고심하여 답사 대상을 선정하고 나니 안내할 일이 여간 걱정되지 않았다. 함께 가는 분들이 워낙 향학열이 높고 유식하여 질문도 많을 텐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한 달 동안 시청에 연락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는 등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그동안 수차례 방문했지만 올 때마다 시간에 쫓겨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전 일정에 가이드까지 신청하여 상세히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첫 답사는 ‘하회마을’이었다. 임진왜란 때 7년간 영의정을 지내면서 나라를 구한 서애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2,010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 부자(父子)가 모두 다녀간 곳이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도 방문하였다. 하회 탈춤, 별신굿놀이 등 많은 민속놀이도 보존되고 있는 곳이며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고 돌아가는 전경은 실로 장관을 이룬다. 강 건너 부용대 아래 솔밭 속에 아득히 보이는 정자는 서애 선생이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옥연정사(玉淵精舍)였다. 징비록은 시경 소비편에서 인용한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며 책 내용은 임진왜란의 배경과 당시
의 전투 상황, 백성들의 생활상 등을 총체적으로 기록한 불후의 역작이다.

두 번째 방문지는 임하면 ‘내앞마을’에 있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었다. 천안에 독립기념관이 있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안동은 전국 기초 자치단체 중 독립유공자가 가장 많이 배출된 곳이어서 2,007년 이곳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 여부를 간파하기 위해 조선통신사 부사(副使)로 파견되었던 학봉 김성일 선생이 출생한 곳이며, ‘하회마을과’ 함께 영남의 4대 명당 마을 중 한 곳이다. 

안동 지방에는 꼭 알아두어야 할 ‘병호시비(屛虎是非)’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병호는 서애를 모시는 병산서원(屛山書院)과 학봉을 모시는 호계서원(虎溪書院)의 각 첫 글자이다. 벼슬은 서애(영의정)가 학봉(관찰사)보다 높았으나 나이는 학봉이 4살 위로 두 분은 퇴계의 양대 수제자이다. 두 분 중 누구의 위패를 스승인 퇴계의 좌측에 배향(配享)할 것인가를 놓고 1,620년대부터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양측 제자들은 물론 두 문중 간의 위세 다툼으로까지 확산되어 400년째 내려오고 있는 사건이다. 

다음에 간 곳은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臨淸閣)’이었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라는 시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인용하였다. 1,519년 건립 당시는 99칸이었으나 전란 때 불타버리고 지금은 70여 칸 남아있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이 바로 임청각의 종손이다. 선생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듬해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종들을 방면한 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식솔을 대리고 만주로 떠났다. 22년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치다가 끝내 이를 보지 못하고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시신을 환국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32년 머나먼 이국땅에서 눈을 감았다. 자손들 중에는 석주 선생 3대를 포함하여 독립유공자가 무려 아홉 명이나 배출되었으니 임청각은 명실공히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인 것이다. 임청고탑(臨淸古塔)은 하회청풍(河回淸風), 도산명월(陶山明月)과 함께 안동의 팔경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다행히 종손의 삼촌 어른이 계시다가 직접 나와 상세히 설명해주니 후손인 필자의 체면도 한층 섰다.

점심은 안동 댐 입구에 있는 토속 음식점에서 ‘간고등어 정식’으로 내가 대접을 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 경’이라 했던가? 점심 식사가 늦어서인지 소찬인데도 맛있다고 극찬을 했다. 시간 관계로 당초 계획했던 안동 댐 구경은 제외하고 도산서원으로 직행했다. 

가는 도중에 ‘군자리(君子里)’라는 고택 촌이 보이자 일행들이 한번 보고 싶다고 하여 일정에는 없지만 잠시 들렀다. 군자리는 옛 ‘외내마을’의 별칭인데 그 유래는 이렇다. 400여 년 전 이 마을에 일곱 분의 군자(광산김씨 다섯 분: 후조당(後彫堂) 김부필, 양정당(養正堂) 김부신, 설월당(雪月堂) 김부륜, 읍청정(挹淸亭) 김부의, 산남(山南) 김부인, 봉화금씨 두 분: 일휴당(日休堂) 금응협, 면진재(勉進齋) 금응훈)가 났는데 모두 퇴계의 제자들이다. 후손들이 이를 기념하여 각기 일곱 정자를 지었다. 군자리란 이름은 퇴계의 제자 한강 정구 선생이 외내마을을 방문한 후 “이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감탄하여 군자리라 불리게 되었단다. 외내마을이 안동 댐으로 수몰되자 광산김씨 다섯 정자는 이곳으로 옮겼으며, 봉화금씨 두 정자는 영남대학에 기증, 대학구내로 옮겨졌다. 봉화금씨 두 군자 중 맏집인 일휴당은 이곳 광산김씨 입향조인 김효로의 사위이며 일휴당의 누님은 퇴계의 맏며느리이다. 퇴계의 묘소 앞에는 특이하게 며느리의 묘가 있다. 평생 퇴계를 모신 맏며느리가 ‘죽어서도 시아버지의 혼을 모시고 싶다’고 유언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단다. 필자의 장인이 일휴당 종손이라 수차 들었던 얘기들이다.

다음은 이번 여행의 절정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이었다. 이곳은 퇴계가 그토록 소원하던 후진양성의 꿈을 실현한 학문의 전당이다. 서원입구에 들어서자 매화꽃 봉우리가 향기를 뿜으며 우리를 반겼다. 매화를 보는 순간 퇴계와 매화 간에 얽힌 사연들이 떠올랐다. 퇴계는 고향에서 학문을 닦으며 꿈을 실현코자 평생 72회나 사직서를 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안동 인근으로 내려오기 위해 지방관직을 자청하여 48세에 단양 군수로 부임한다. 속설(허구로 봐야할 것임)에 의하면 이때 18세의 관기 두향을 만나는데 두향은 미모 일뿐만 아니라 시, 거문고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8개월 후 풍기 군수로 전보 받아 떠나는 퇴계로부터 이별의 시 한수를 받은 두향은 손수 키운 매화 분재를 선물한다. 어째든 퇴계의 매화 사랑은 지극하여 빙설, 옥설, 청진옥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의인화하여 매형, 매처, 매선, 임이라고도 불렀다. 때로는 자신이 매화가 되고 매화가 자신이 되어 증답시(贈答詩)를 주고받기도 했다. 퇴계는 매화를 소재로 한 주옥같은 시를 107편이나 남겼다. 그 중에 퇴계가 한양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애지중지하던 매화 분재에게 작별을 고하고, 매화가 이에 화답한 시 한수를 소개한다. 
  
頓荷梅仙伴我涼(고맙게도 그대 매화 나의 외로움 함께하니)
客窓蕭灑夢魂香(나그네 쓸쓸해도 꿈만은 향기롭네)
東歸恨未携君去(귀향길 그대와 함께 못가 한스럽지만)
京洛塵中好艶藏(서울 세속에서도 고운 자태 간직해주오)

聞說陶仙我輩涼(듣건대 선생께서도 우리처럼 외롭다하니)
待公歸去發天香(임이 돌아온 후 천향을 피우리다) 
願公相對相思處(바라옵건대 임이시여 언제 어디서나) 
玉雪淸眞共善處(옥설처럼 맑고 참되게 고이 간직하소서)  
  
퇴계 임종 시 도산서원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스승의 유언을 듣고자 초조히 기다렸다. 그러나 퇴계는 오직 ‘매화에 물 줘라’는 한마디만 남긴 채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도산서원은 율곡과도 인연이 깊다.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은 율곡은 실의에 빠져 19세에 금강산으로 입산한다. 2년 후 다시 하산하지만 인생의 나아갈 바를 몰라 방황하다가 드디어 58세의 노학자 퇴계를 찾아온다. 3일간 머물면서 깊은 가르침을 받고 居敬窮理(거경궁리: 항상 공경한 마음을 견지하여 학문을 탐구하라)라는 네 글자를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퇴계는 그때 이미 율곡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35세나 연하인 젊은이를 본인과 대등한 관계로 예를 갖춰 대했으며, 그가 떠난 후 제자 월천에게 보낸 편지에 後生可畏(후생가외: 젊은 후배가 두려울만하다)라 감탄하였다. 

율곡은 10개월 후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이라는 불후의 명문장으로 장원급제를 하였으며, 평생 동안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를 하였다. 율곡은 49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퇴계와 더불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양대 쌍벽을 이룬다. 인류가 낳은 대 성인, 공자와 노자의 만남을 세기적 사건이라 하는데 혹자는 이때 퇴계와 율곡의 만남을 그에 버금가는 사건이라고도 한다. 그때 두 분이 나눈 높은 경지의 시는 오늘날에도 만인을 감탄케 한다.
  
歸來自歎久迷方(늦게야 돌아와 할 일이 가득하더니)  
靜處才窺隙裏光(고요한 이곳에도 햇빛이 비쳤음인가)  
勸子及時追正軌(찾아 온 그대만나 학문의 바른길을 가르쳤네)  
莫嗟行脚人窮鄕(탄식 말고 학문 매진하면 외진 이곳 찾은 일 후회 않으리)
  
溪分洗泗波峯接武夷山(시냇물 수사에서 만나고 봉우리 무이를 이었습니다) 
活計經千卷 行藏屋數間(학문 닦으시며 이룩한 도덕 이 방안에 가득합니다)
襟懷開霽月 啖笑止狂瀾(뵙고 싶던 회포 푸니 구름 속 달 보듯 머리 개이고    웃음 섞인 말씀 들으니 어리석은 저의 생각 바로 잡힙니다) 
小子求聞道 非偸半日閑(소자가 뵌 뜻은 도학을 받잡고자 함이오니 시간      헛되셨다 생각 마옵소서)  

퇴계는 임종 전 장례식과 묘지를 절대 호화롭게 하지 말 것이며, 비석에는 退陶溪晩隱眞城李公之墓(도산으로 물러나서 만년을 숨어산 진성이공의 묘)라   는 소박한 열 글자를 직접 써주며 작은 돌에 새기도록 유언을 남겼으며 비보를 들은 선조 임금은 영의정을 추증하고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라는 서른 한자나 되는 긴 시호를 내렸다.
  
서원 경내를 다 둘러본 우리 일행은 전교당 난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멀리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450여 년 전 민족의 큰 어른 퇴계는 이곳 서당에서 학문을 탐구하며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내었다. 그 때도 저 강물은 오늘처럼 유유히 흘렀겠지? 아, 강물 따라 변함없이 흐르는 역사의 유구함이여! 

다음은 ‘이육사문학관’으로 갔다. 지금까지 나는 이육사가 단순히 광야와 청포도 등을 지은 ‘민족시인’정도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많은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이육사는 퇴계의 14대손으로 독립운동 중 1944년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39세의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그는 짧은 일생 동안 무려 17회나 투옥되는 불굴의 독립투사였다. 그의 필명 이육사도 처음에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를 따서 二六四로 하였다가 본인의 뜻에 의해 李戮史(역사를 찢어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로 바꿨으며, 너무 과격하다는 주위의 권유로 다시 李陸史로 고쳤다. 필명 하나만 보아도 그의 항일 투쟁 정신을 알 것 같았다. 

이육사문학관 관람을 마치기도 전에 돌아갈 시간이 경과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계획된 한 곳이 남아있다. 바로 안동의 자랑인 ‘국학진흥원’이다. 진흥원 내에는 ‘유교문화박물관’이 있다. 누가 뭐래도 안동은 유교문화의 보고이다. 더 이상 관람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니 일행 중 한 사람이“처음부터 하루 일정으로 계획을 잡은 것이 잘못이었다”며 다시 한 번 더 오자고 했다. 아쉽지만 그날을 기약하며 귀경길에 올랐다.

필자소개
​수필문학으로 등단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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