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운의 역사정치]㉗ "너희들은 하지 마라"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평가받는 퇴계 이황의 졸기(卒記)입니다. 그가 사망하자 사관(史官)이 인물평을 실록에 남긴 것을 보면 이황이 당대에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죠. 졸기를 보면 이황의 생애가 대략 상상이 되지 않나요?
“빈약(가난하고 검소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고 하니 한 겨울에도 냉랑한 방 안에서 허름한 옷차림이나마 의관을 정제한 채 경전을 읽는 딸깍발이 선비 같지는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 기록대로만 이황의 이미지를 연상했다면 오판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황은 지역에서 꽤 규모가 큰 유지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본인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부를 쌓은 사례였죠.
조선 선비들은 재산 증식에 관심 없었다?
이황도 『성학십도』를 통해 "부동심(不動心)에 이르러야 부귀(富貴)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여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진다"며 세속의 이익에 대해 경계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재산 증식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 결코 아닙니다. 자신들이 억누른 상공업에 투자하거나 이를 운영할 수는 없으니 눈을 돌린 것은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이었습니다.
현재 이황이 남긴 분재기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황의 모두 유일한 상속자였던 아들 이준이 남긴 분재기가 남아있어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준이 자녀들에게 분재기를 남긴 것은 1586년인데, 이황이 죽은 1570년으로부터 불과 16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계에선 이준이 남긴 분재기에 기록된 재산 내용이 이황이 남긴 재산 규모와 거의 같을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