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후 북-미 협상 결과를 두고 봐야겠지만 북한 비핵화가 신고→검증→폐기라는 일반적 절차대로 흘러갈 것 같진 않다. 당장 미국에서도 핵신고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걸 봐선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쯤에서 북한 외교의 승리를 점쳐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을 상대로 굴신(屈身)과 공갈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자기네 방식을 관철해왔다. 특히 거부를 분명히 한 사안에 대해선 대화의 파탄도 불사했고, 미국이 끝내 손들게 만들었다. 백악관에서 아시아정책을 담당한 마이클 그린이 일찍이 털어놓은 그대로다. “북한은 미국의 전략을 망쳐놓는 데 불가해(不可解)한 능력을 지녔다.”
그간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사라진 단어만 살펴봐도 북한의 외교 성적은 놀랍다. 5월 북-미 정상회담 취소 소동까지 야기하며 북한이 삭제 대상 목록에 올린 단어는 ‘리비아식 해법’과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CVID)’였다. 리비아식 해법은 진작 사라졌고, CVID도 어느덧 다소 생뚱맞은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로 바뀌었다.
북한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핵 신고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7월 초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뒤통수에 대고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들고 나왔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또다시 취소 소동이 벌어진 뒤 폼페이오의 4차 방북이 이뤄진 지금, 미국 행정부 누구도 핵신고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동의했다는 ‘새로운 방식’을 내세웠지만 자신들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적은 없다. 다만 ‘핵개발 초기 단계였던 리비아와 엄연한 핵보유국인 북한은 다르며, 미국의 이전 행정부가 써먹다 백전백패한 케케묵은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일관된 주장에서 유추할 수밖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