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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참사랑… 아이는 부모를 봤다

화이트보스 2018. 10. 13. 11:51



보이지 않는 참사랑… 아이는 부모를 봤다

조선일보
  • 박돈규 기자
  • 입력 2018.10.13 03:00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15일은 '흰 지팡이의 날'… 시각장애인 조현영·최정일 부부의 삶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유튜브 광고와 강연으로 유명해진 시각장애인 조현영(왼쪽)·최정일씨 부부. 정일씨가 안고 있는 아들 유성이는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에 울음을 뚝 그쳤다. 태명은 ‘라뱅’이었다. 정일씨는 “지금은 은퇴했지만 내가 존경하는 야구 선수 이병규의 별명”이라며 “유성이가 그렇게 실력 있고 사랑받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했다. / 김지호 기자

    지난봄 꽃이 필 무렵이다. 어느 통신사 '우리 집 AI(인공지능) 광고'가 유튜브에 올라온 지 9일 만에 조회 수 1000만 건을 돌파했다. 제목은 '고마워, 나에게 와줘서'. 점자(點字)를 읽듯이 손끝으로 아기를 돌보는 엄마 조현영(38·시각장애 1급)씨 일상이 1분 53초 영상에 담겼다. AI 스피커가 약 먹일 시간과 미세 먼지 농도를 알려주고 자장가도 들려줘 육아가 수월해졌다는 내용이다. 다른 유튜브 광고에 비해 영상을 끝까지 본 시청자가 3배 이상 많았다.

    한 달쯤 지나 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세바시)'에서 최정일(39·시각장애 3급)씨 강연을 접했다. 현영씨 남편이었다. 선천성 백내장으로 어릴 때 수술 시기를 놓쳤지만 잔존 시력은 조금 있다. 강연 주제는 소셜미디어 시대에 어울리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건네는 법'.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았다는 사람이 많았다. 비장애인들도 마음을 전하는 데 서툴기 때문일 것이다. 독심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남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기 어렵다. 장애 여부와 관계없는 일일 수 있다.

    내일모레인 15일은 '흰 지팡이의 날'이다. 국내 시각장애인은 25만3000명(2017년 보건복지부). 전체 장애인의 10%쯤 된다. 지난 9일 한글날에 조현영·최정일 부부가 사는 서울 상도동 빌라 4층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정일씨가 15개월 된 아들 유성이를 안고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간밤에 열이 나 유성이 컨디션이 오늘 안 좋다"며 미안해했다. 두 눈의 초점을 맞추지는 못했다. 현영씨도 더듬더듬 다가와 옆에 앉았다. 세탁기에는 점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장애 1급과 3급, 사내연애를 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두 세계가 만나 낳은 아들 유성이(3.6㎏)는 '우리처럼 보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근심부터 안겼지만 다행히 시각장애 없이 건강하다. 부모는 맞벌이를 한다. 정일씨는 11번가 헬스키퍼(안마사)이고 현영씨는 시각장애인협회 산하 웹접근성평가센터에서 장애인이 정보에 접근하기 편리한지 평가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부부는 버스를 타고 노량진에 있는 어린이집에 유성이를 맡기고 출근한다.

    ―집 근처에는 어린이집이 없나요?

    "상도동 어린이집들에 신청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인천에 사는 시어머니께서 오후에 어린이집에서 유성이를 집으로 데려오고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봐주십니다."

    ―현영씨가 앓은 망막색소변성은 어떤 병인지요.

    "잔인해요. 평생 동안 진행되는데 빨리 올 수도, 느리게 올 수도 있어요. 자다가 실명하기도 해요. 아내는 20대 초반부터 안 좋았는데 지금은 불빛 정도만 보입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2011년에 웹접근성평가센터에 처음 출근한 날 같은 사무실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요. 첫눈에 반했지요(웃음). 안타깝게도 당시 남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는 말이 힘이 되었지요. 그래도 두려웠어요. 사내 커플이잖아요. 사귀다 깨지면 한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했어요. 다행히 끝이 좋았지요."

    ―정일씨에겐 첫사랑이었나요.

    "(현영씨가 답을 가로채) 그건 아니고요. 피장파장이죠(웃음)."

    ―어떻게 광고 모델이 되고 세바시에도 나갔는지요.

    "한 통신사가 시각장애인 가구에 AI 스피커를 무료로 나눠주고 사용 후기를 들으러 저희 집에 방문했다가 인상적이었는지 모델을 제의해 왔어요. 망설였지만 아들에게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 응했지요. 그 통신사 추천으로 세바시에도 출연했고요."

    ―정일씨가 세바시 강연에서 '현영씨와 당시 남자 친구 사이에 틈이 벌어질 때를 노렸다'고 했습니다만.

    "기다렸다가 치고 들어갔어요. '네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다 들어줄 테니 얘기해.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했지요. 당시 저는 집이 인천이고 현영이는 의정부였는데 매일 서너 시간씩 들여 데려다 주었어요. 며칠 고민하더니 지하철 4호선 타고 동작대교를 지날 때 '오빠랑 사귀어볼래요'라는 응답을 들었지요. 2011년 9월 16일이었습니다."

    ―현영씨가 가수 정동하를 그렇게 좋아했다지요.

    "TV에 나와 노래하는데 목소리 듣고 반했어요. 그때는 시력이 약간 남아 있었습니다. 모니터에 정동하 얼굴을 크게 띄워놓고 코를 박고 보면 대강 윤곽이 들어왔지요. 사람들이 다 잘생겼다고 하더라고요. 더 좋아져서 그가 출연하는 뮤지컬도 보러 갔지요. 오빠(남편)도 저 때문에 정동하의 같은 공연을 네 번이나 봤어요."

    ―이 남자에게 왜 끌렸나요.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시각장애인 최정일씨는 지난 4월 세바시에 출연해 ‘보이지 않는 마음을 건네는 법’을 강연하고 있다. 그는 “마음은 보이지 않아서 전달하기 어렵다”며 “준비된 말로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고 했다. / 세상을바꾸는시간15분
    "한결같이 저한테 잘해주니까요. 제가 사귀기 전에도 그렇고 연애할 때도 좀 못 되게 굴었어요. 다 받아주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걸 두 가지 하면 오빠가 좋아하는 걸 한 가지 했어요. 사람이 변하질 않아서 결혼해도 똑같겠다는 믿음이 조금씩 생겼어요. 2014년에 결혼했습니다."

    ―막상 한집에서 살아보니 어떻던가요?

    "살아보니 말투가 그렇게 부드러운 사람은 아녜요. 결혼하고 '어, 뭐지?' 했어요. 이젠 원래 성격인 걸 알지만. 저는 좀 비관적인데 남편은 생각도 말도 긍정적이에요. 저한테 큰일이 닥칠 때마다 '괜찮아. 안 될 수 있어.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라고 다독여줘요. 인상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듣고요. 남편 복이 있구나 생각하죠."

    가장 큰 시련은 임신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기는 힘들다. "직장에서 봐주는 게 없다"고 정일씨는 말한다. 비장애인들과 일대일로 생존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정일씨가 답한다) 30대 초반입니다. 컴퓨터 프로그램 관련 일을 할 때인데, 시각장애인은 뭐든 배우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잖아요. 20대 후반까지는 비장애인과 벌이는 경쟁에서 져도 그런가 보다 했어요. 30대가 되니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싶고 우울해졌습니다. 그들은 승진이라도 하는데 저는 이룬 게 별로 없는 거예요."

    ―그때 조언해준 선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특수학교에 다녔어요. 고교 선배이고 시각장애인인데 '스스로를 한 번이라도 칭찬해본 적이 있냐'고 물으셨지요. 화장실에 가서 홀딱 벗고 너를 보라고 해서 그렇게 해봤어요. 처음엔 한숨밖에 안 나왔는데 계속 하니까 저를 보게 되더라고요. 거울 보고 '최정일, 괜찮아. 잘 생겼어!' 마트에 가면 싼 와인이 있어요. 그걸 사 와서 마시면서 저한테 이야기합니다. '오늘 하루 잘 살았어. 누구한테 화났지? 잘 참았어!'…."

    ―그 비법을 아내에게도 전수했는지요.

    "아내는 저와 성격이 좀 달라요. 중도에 실명하다 보니 두려움도 좀 있고 마음에 그늘이 많지요. 전수하려고 해도 잘 안 듣더라고요. 받으려는 마음의 자세가 안 되어 있는 거죠. 하하하."

    ―강연을 잘하시더군요. 원고는 직접 작성했나요.

    "원고를 썼더니 방송용으로 다듬어주셨어요. 볼 수가 없으니 한 시간 동안 달달 외우고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점자 스티커 붙일 생각은 미처 못했고요. 그날 너무 긴장해서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한 번 더 하면 잘할 것 같은데(웃음)."

    ―초보 부부에게 가장 큰 시련이 임신이었는데 현영씨가 반대했다고요?

    "두 가지 이유로 두려웠어요. '아이까지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 어떡하나' '우리가 그 아이한테 짐이 되면 어쩌나'였지요. 둘째 이유가 더 컸어요. 잘 키울 자신,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오빠(남편)가 제 마음 돌리려고 아주 현실적인 얘기를 해줬어요."

    ―어떻게요?

    "만약 아기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우린 이미 겪어봤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지 않느냐. 우리 부모님은 그걸 모르셔서 힘들었지만 우리는 다르다. 더 잘 보살피고 가이드해줄 수 있다. 아이에게 장애가 없다면 우리가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더 준비하면 된다…. 실제로 오빠가 저보다 일찍 퇴근해 육아를 다 하다시피 해요.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요."

    ―장애가 없어도 출산을 망설이는 시대입니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지 생각하는 부모와 아이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지 생각하는 부모는 출발선부터 다르군요.

    "젊은 부부들이 망설이는 게 당연해요. 출산만 장려하지 낳아서 어떻게 키울지 돕는 제도는 부족하니까요. 저희 같은 장애인 부모는 더 힘들고요.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아이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얻는 게 훨씬 더 많아요. 스스로 뒤집고 일어나고 걷고 '엄마'라고 말하고 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쁨과 감격이 밀려와요. 경제적으로 빠듯해지고 생활을 육아에 빼앗길까 봐 출산을 주저할 텐데, 그런 실보다 득이 몇 배 더 큽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

    이미 읽은 소설의 점자책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어 막막했다. 시각장애인은 그런 일을 매일 겪는다.

    ―보이지 않는 생활에 적응이 되기도 하나요?

    "적응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어요. 길 찾는 건 크게 문제 안 되고요. 가령 버스 번호가 안 보이는데 맞겠지 하고 타면 그 버스가 아닌 거예요. 계단이나 어떤 장소에 갔을 때 꼭 그 자리에서만 다치곤 합니다. 알면서 또 넘어지는 거죠."

    ―오늘이 한글날인데 시각장애인들에겐 '훈맹정음(訓盲正音)'이 있다면서요.

    "네. 11월 4일. 점자를 만든 날이에요. 저희는 손끝으로 세상을 읽어요."

    ―요즘 나온 가전제품들은 터치(touch)형이라 더 불편하겠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켜고 끄는 느낌을 촉감으로 알아채요. 터치형은 스위치처럼 딸깍거리는 촉감이 없으니 제대로 작동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요. 다들 쓰기 편하다는데 저희한텐 너무 불편합니다. 무인 단말기를 설치한 식당이 늘고 있잖아요. 음성 지원이 안 되니 저는 쓸 수가 없어요."

    ―일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뭔가요?

    "유성이가 아플 때죠. 장애인 복지콜은 연결이 잘 안 되고 오래 기다려야 해 소용이 없어요. 콜택시를 불러도 병원이 가까워 택시 기사님들이 잡지를 않아요. 밤거리에 나가면 빈 택시인지 아닌지 보이질 않으니 또 발을 동동 굴러야 하고요. 누구는 그러더라고요. 눈 딱 감고 119를 부르라고. 유성이 약 먹일 때도 용량을 가늠할 수가 없어 속상해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마다 미안해요. 엄마 노릇 못하는 것 같아서."

    ―유성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나요.

    "늘 하는 말인데 몸도 마음도 생각도 건강하고 밝고 바르게. 그런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어요. 유성이가 돌잡이 때 판사봉을 잡았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가 배우기도 하는데 새로 깨달은 게 있나요?

    "마음이 유해졌어요. 전에는 밥을 먹을 때 무슨 반찬이 있어야 했다면 이젠 일단 먹어요. 옆에서 똥을 싸도 먹어요(웃음). 그렇게 유해졌어요. 아이 눈높이로 이해하느라 생각도 좀 넓어진 것 같고요."

    ―어느 가정이나 크고 작은 근심이 있기 마련인데.

    "좀 더 편하고 안전한 곳으로 이사 가고 싶어요. 임대아파트에 불만이 많지요. 저희는 들어갈 수가 없거든요. 살아보려고 아득바득 일하고 있는데 맞벌이로 수입이 많다는 이유로요. 일을 할 수 있는데 임대아파트에 입주하려고 수급자로 사는 장애인이 주변에 많아요. 모순 아닌가요? 실태를 파악해 역차별당하는 일 없도록 정책을 바로잡으면 좋겠어요."

    ―비장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출퇴근할 때 저를 도와주시는 분이 계신데 이모님이라고 불러요. 이모님 팔을 잡고 지하철을 타면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분들이 있대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 보듯이요. 마트 계산대에서 저는 더듬더듬 물건을 담는데 좀 기다려주시거나 도와주셨으면 하고요."

    최정일·조현영씨는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고 세금 꼬박꼬박 내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장 가지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칭얼거리는 유성이를 어르며 정일씨가 "무인 자동차"라고 했다. 이유가 예상 밖이었다. 무인 자동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가려는 게 아니었다. "유성이 아플 때 병원에 빨리 데려갈 수 있으니까"라고 부부는 말했다.

    현영씨는 유성이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하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2/20181012018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