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을지문덕장군의 薩水(살수, 보수) 는 하북성 창해(河北省 滄海)서쪽에 있었다

화이트보스 2018. 10. 14. 12:59


   

< 을지문덕장군의 薩水(살수, 보수) 는 하북성 창해(河北省 滄海)서쪽에 있었다 >

우리는 을지문덕이 승리한 살수가 한반도에 있는 청천강으로 홍보를 해왔다. 그러나 살수는 한반도에 있을 수 없음을 史書에서 전하고 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43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고보의 의용(義勇)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민멸하여 전문(傳聞)할 수 없었다.(수서인용)"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微中國之書則泯滅而無聞)"

살수대첩은 612년에 있었고 김부식은 1145년에 삼국사기를 편찬하였으니 532년의 시차가 있어서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이 고려땅에는 없었을까 ? 아니면 정말 한반도에 기록이 없었던 것일까 ?

을지문덕의 기록이나 장고보의 기록이 한반도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여러 정황을 볼 때 맞을 것 같다.

왜냐면 김부식 본인도 살수의 위치를 모르는 지명이라고 분명히 삼국사기에 밝혀 놓았다

"삼국의 지명중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이 350여개나 된다 ! (삼국유미상지분 350여개)" 그런데 김부식도 모르는 살수가 어찌 청천강으로 둔갑이 되었는가 ?

▣ 이하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

동천왕 21년(247)과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신라소지마립간 17년(494)에 살수에서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전쟁을 한다. 비행기를 타고 평양을 넘어 전쟁을 했을 리도 없고 분명 한반도에서는 설명이 되질 않는다

< 高句麗本紀 太祖大王4年 >

고구려는 영토를 "동으로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 살수(薩水)에 이른다"고 삼국사기에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창해는 바다가 아니라 지명으로 볼 수 있는데 창해군(滄海郡)은 연제지간(燕齊之間:산서성과 산동성과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하북성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북사(北史)에서 창해(滄海), 교하(交河)의 지명이 있는데 이 모두 태원의 동쪽에 있다. 그러므로 살수(薩水)는 창해(滄海)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 高句麗本紀 榮留王 14年 >

앞서 언급한 고구려 천리장성에 대한 기록이다 왕은 뭇사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되 동북의 부여성(扶餘城)에서 동남(東南)의 해유리까지 1천여리를 잇대니 무려 16년만에 역사를 끝냈다.

三國史記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有里 舊唐書199 東北自扶餘城 西南至海有里 唐 書220 東北首領域 西南屬海久

이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의 있는지 9년후의 기록이다. 이 장성의 기록에서 장성의 서쪽에 고구려가 있고 동쪽은 신라땅인데 어떻게 남의 땅에 薩水가 있었겠는가 ?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고구려 천리장성을 기준으로 서쪽이 고구려, 동쪽이 신라라는 말이다 그 근거로 천리장성의 서쪽으로 현재 철도가 나있다. 즉 방어위치가 동쪽이라는 얘기다

더욱이 살수대첩 이후 23년이 지난 뒤의 당과 고구려의 전쟁에서 빼앗긴 지명이 장성 서쪽에 있는데 은산, 신성, 용도, 고대인성 (銀山, 新城, 用道, 古大人城)의 기록이 있었겠는가? 이 지명은 北平의 서쪽에 있는 지명들이니 위 지명이 있는 지역에 살수가 있었을 것이다.

살수(薩水)라고 읽는 동이문자 살(薩)은 보살살, 도을보 두가지로 발음이 된다. 그렇다면 보수(薩水)로 발음해야 옳은 것인가? 창해의 서쪽에는 산서성의 오대산(五臺山)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있다. 이 산은 불교의 명산이다.

이 산에서 흐르는 물을 표시함은 보살을 뜻하는 글자로 볼 수 있으니 오대산에서 물이 살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볼 수밖에 없다.

V< 고구려와 한, 당과의 전쟁지명이 모두 중국 태행산맥의 동쪽에 실존한다 >

고구려장성의 기록과 고구려 패망때의 지명인 은산, 고대인성, 신성, 용도 등이 실존하므로 고구려 평양은 유연제노와 오월 지역 요 동쪽과 "요사"에 의하여 해주사이에서 찾아야 하며 살수 역시 이 지역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중국 군사지도상에서 지명 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