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전쟁 뒤엔 군사 패권
참혹한 싸움터, 중국이라는 대륙
삼국시대 인구 3분의 2 죽어나가
집도 마을도 나라도 담 쌓아 방어
개혁개방 40년간 과학 역량 집중
국방력 고도로 키운 전략의 바탕
영웅과 로망의 ‘삼국지’ 시각 벗고
전쟁이 키운 모략의 속내 이해할 때
중국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안일함

중국 광둥(廣東) 카이핑(開平)에 있는 방어형 주택 ‘댜오러우’ 건축 군 중 유명한 영원루(寧遠樓). 침략을 막기 위한 전형적 전투형 주택이다. 같은 맥락의 주택 6000여 채가 들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해외로 진출했던 화교들이 돌아와 지었던 집들이다.
통계를 하나로 들자. 중국 이민사(移民史)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많은 성과를 내고 있는 거젠슝(葛劍雄)이라는 학자의 통계다. 그는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활동했던 삼국시대 직전의 동한(東漢) 말 인구를 6000만 명으로 추계한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지 않은 삼국시대 종결 시점의 중국 인구는 얼마일까. 거젠슝은 그 수를 23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인구의 3분의 1을 조금 웃도는 사람만이 살아남았다는 얘기다. 그보다 더 극단적인 통계는 삼국시대 뒤 생존 인구를 1000만 명으로 계산한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유비와 관우, 장비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들은 촉한(蜀漢)이라는 깃발을 중국 땅 서남쪽의 어느 한 구석에 꽂은 뒤 끝내 천하를 얻으려는 야심에 거대한 전쟁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요즘말로 ‘A급 전범’이라고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다. 리지(李濟 1896~1979)라는 학자가 있었다. 중국 고고학 및 문화인류학의 태두(泰斗)다. 서양의 고고학적인 접근법으로 중국 땅을 처음 파고 들여다 본 사람이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적 틀로 중국 땅의 실제 역사를 헤아렸던 그의 소감 한 마디는 이렇다. “5000년 전 중국의 땅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파는 곳마다 성(城)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구심이다. 신석기 시대 유적을 일람하면서 삽을 대는 땅마다 성이 출현하는 현상을 바라보며 뱉은 그의 말은 신음에 가깝다.
중국의 역사는 4000년 채 못 미친다. 보통은 ‘5000년 중화 역사’라고들 말하지만, 고고학적 발굴이 따르지 못하는 과장이다. 3800년 정도인 중국의 실제 역사에서 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다. 문헌에 등장하는 대규모 싸움을 기준으로 할 때 횟수는 3700회 정도다.
먼 옛날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중국을 휩쓸고 다녔던 전쟁의 비바람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멈추지 않았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대만계 작가 황원슝(黃文雄)은 전통 왕조가 뒤집어진 신해혁명(辛亥革命) 뒤 민국(民國) 정부가 들어선 1912년부터 1933년까지 내전이 700회 이상 벌어졌다고 집계했다.
성쌓기에 골몰했던 문명
![푸젠성 난징(南靖)현에 있는 전라갱토루군(田螺坑土樓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810/20/03c3dd86-dc8a-4b29-a87e-1577aa94c34b.jpg)
푸젠성 난징(南靖)현에 있는 전라갱토루군(田螺坑土樓群). [중앙포토]
이들 가옥 지칭에 등장하는 圍(위)라는 글자는 주변을 담으로 둘러쳤다는 뜻이다. 따라서 같은 혈연의 사람들이 밖으로부터 닥치는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용 성벽을 주변에 세워 지은 집이라고 이해하면 좋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아예 토치카 형태로 집을 짓는 사례다. 광둥 행정 중심인 광저우(廣州)에서 자동차로 40여 분 달려가면 닿는 카이핑(開平)이라는 곳에 들어선 주택이다. 돌로 만든 집이라는 뜻의 댜오러우(碉樓)라는 이름의 이 주택은 모양새가 각별하다. 높은 벽에 창문은 철제로 달았다. 위에 뚫려 있는 조그만 구멍들은 총을 쏘기 위한 장치다. 비스듬히 사각(斜角)으로 나있어서 외부에서 집 아래로 다가선 사람을 겨눈다. 완연하게 삶과 죽음을 다투는 전투 개념의 주택이다.
카이핑 일대에 6000여 채 들어선 이 집단 주택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 있다. 집을 지은 주체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해외로 나가 돈을 벌어온 화교(華僑)들이다. 돈을 벌어 담으로 중무장한 집을 지을 만큼 이들은 불안과 위기에 시달렸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전쟁에 이어 사람의 거주지 이동에 따라 벌어지는 각종 크고 작은 싸움, 계투(械鬪)는 중국인의 일상에 가까운 현상이다. 따라서 중국인의 일상은 누가 나를 위협하는가, 나는 그에 어떻게 대응할까에 모아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땅에 들어섰던 수많은 왕조(王朝) 또한 담을 쌓는 데 골몰했다. 춘추전국(春秋戰國)의 이른 시기에, 최초의 통일 판도를 이룩한 시황(始皇)의 진(秦)나라 때, 그리고 조선과 시기를 함께했던 명(明)나라 때까지 중국은 줄곧 담을 쌓고 또 쌓았다. 담의 흔적은 아주 역력하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 북쪽 옌산(燕山) 산맥의 허리를 가르며 들어선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대표적인 사례다. 길이 6300㎞의 이 길고 긴 담을 쌓기 위해 중국의 왕조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도외시했다.
중국인은 가을은 두려워했다
![길이 6300㎞에 이르는 만리장성.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810/20/6bec2c7b-dde6-4670-a549-b3029b882ac9.jpg)
길이 6300㎞에 이르는 만리장성. [중앙포토]
중국은 전쟁으로 다져진 문명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사고는 위기(危機)에 민감하다. 바람에 실려 오는 빗발, ‘풍우(風雨)’라는 조어 맥락에 숨은 위기의식은 도저하다. 풍랑(風浪), 풍파(風波), 풍설(風雪), 풍한(風寒), 풍상(風霜)이 다 그렇다. 이런 중국의 토양은 전쟁의 사고를 키웠다. 바로 모략(謀略)의 정신세계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을 비롯해 3000종이 넘는 병법서가 탄생한 곳이 바로 중국이다. 어디 그뿐일까.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는 바둑도 마찬가지다. 3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바둑은 고도의 싸움법을 구현하는 워게임(War game)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정치한 게임’이라는 수식도 따라 붙는다. 그 오랜 전쟁의 문명 바탕을 지닌 중국과 중국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중국적인 게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중국을 다시 보자. 40년에 불과한 개혁개방 여정에서 아주 높은 국방력을 쌓고, 과학 역량을 집중해 국력을 고도로 키운 중국의 전략 바탕을 옳게 가늠하며 대응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이런 시각 변환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