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반란사건'을 배경으로 다룬 영화 '구르미버서난달처럼'의 한 장면. '정여립 반란사건'에 연루된 북인 세력은 큰 희생을 치렀고 이는 남인과 북인의 분화로 이어졌다. [중앙포토]
정권을 잡으면 내부 권력 투쟁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인조 이후부터는 서인(노론+소론)들의 시대가 열리지만, 선조-광해군 시대만 해도 동인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동·서인의 분당 당시 동인 측이 명분상으로나 수적으로 우세했기에 시간이 갈수록 동인 측이 많이 등용 됐고, '파이'를 둘러싼 내부 다툼도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동인은 비교적 빨리 분화했습니다.
“동인의 경우는 집권한 시기가 길었기 때문에 분열하게 되었지만, 서인의 경우는 집권한 기간이 짧았던 까닭에 온전히 하나로 유지됐습니다.”(『인조실록』 1년 4월 11일)
물론 위에서 언급한 양측의 학맥 차이도 작용했습니다.
앞서 소개했듯 북인은 학문으로는 조식과 서경덕을 추종했습니다. 조식과 서경덕은 당시 성리학계에서 마이너리티였습니다. 이기론(理氣論)으로 대표되는 성리학적 우주 질서 탐구보다는 현실 문제에 매달렸고, 성리학 외에 노장사상이나 도가(道家)에도 관심을 두어 다른 학파들로부터 "학문이 얕다"라거나 이단적이라며 경원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한중연 장서각 소장 『성학십도』 우주 만물의 이치를 열 장 그림에 담았다는 의미. 퇴계는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성리학에서 핵심이 될 만한 내용을 응축해 담았다. [연합뉴스]
서경덕은 고전소설 『전우치전』에도 “전우치가 중종 때 사람으로 송도(개성)에 살았으며 서경덕을 따라 세상을 버렸다”며 등장할 정도였고, 조식은 평생 경의도(敬義刀)라고 이름 붙인 칼을 차고 다녔고, 임종 때도 후계자 정인홍에게 책이 아닌 칼을 줄 정도로 실천성과 과단성을 강조했습니다.
조식이 남긴 ‘욕천(浴川)’이라는 시에는 “티끌 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는 문구가 있는데, 선비라기보다는 무사가 남긴 표현 같을 정도로 극단적입니다. 또 인생 대부분을 경남 지역에서 보낸 조식은 임진왜란 전부터 일본에 대해서도 대단히 강경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영화 '전우치'의 한 장면. 전우치는 개성에서 활동한 실존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서경덕과 교우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중앙포토]
퇴계 이황은 이런 조식에 대해 “남명(조식)은 하나의 기이한 선비로 그의 이론이나 식견은 항상 신기한 것을 숭상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주장에 힘쓰니, 어찌 참으로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라고 비판을 가했습니다.
북인이 현실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데는 서경덕의 출신지가 개성이라는 점도 한몫했습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조선 시대엔 차별을 받아 고위관료에 등용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재주 있는 개성 사람들은 상업에 많이 종사했고, 자연히 개성은 조선 그 어느 곳보다 이재에 밝고 상업이 발달했습니다.
불우했던 북인은 임진왜란과 함께 황금기를 맞습니다.
조식의 강인하고 반일적 입장과 서경덕의 현실참여적 성향을 이어받은 북인은 임진왜란 때 화의론을 이끌었던 남인에 맞서 강력한 주전론을 펼쳤고, 정인홍·곽재우 같은 스타 의병장을 배출하며 정계에서 발언권이 커졌습니다.
특히 북인 중에서도 이이첨·정인홍이 이끈 대북 세력은 선조 후반 광해군과 영창대군으로 후계구도가 나뉘어 있을 때 광해군을 지지했다가 귀양을 갔는데, 선조의 급사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적 실세로 급부상했습니다.
대구시 동구 효목동 망우당공원 내 곽재우 장군 동상. 북인은 곽재우를 비롯해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다. [ 프리랜서 공정식 ]
'정여립 반란사건' 처리 과정에서 맺힌 응어리가 많았던 북인은 폐쇄적이고 일당 독주적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또, 정권을 잡은 이후엔 내부 분열과 숙청이 이어지며 북인 계파에서도 대북파가 일방적으로 정국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자신은 '군자당(君子黨)', 다른 당은 '소인당(小人黨)'으로 깎아내리는 우월감을 가졌기에 다른 당파를 배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광해군 시기 허균과 그를 따르는 서얼들이 주도한 반란의 전후 과정을 다룬 뮤지컬 '칠서' [사진=서울예술단]
이러한 대북의 폐쇄성이 결국 몰락의 빌미가 됐습니다. 서인뿐 아니라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소북계도 배제한 대북은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과정에서 다시 찬성(대북)-반대(중북)로 분열돼 세력이 약화됐고, 결국 위기 시에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습니다.
인조반정 때 서인이 불과 500명의 군사만 동원하고도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서인뿐 아니라 같은 동인계열인 남인까지 반정에 합류하자 어디서도 협력 세력을 찾을 수 없었던 북인, 특히 대북파는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광해군 시기까지 약 20여년에 걸친 북인 세력의 분화
인조반정으로 서인과 남인의 연합정권이 들어서자 피의 보복이 이어졌습니다. 대북 세력의 영수였던 정인홍은 89세의 고령의 나이에 고향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실질적 리더였던 이이첨은 재빨리 도망갔지만 경기 이천에서 체포돼 역시 처형됐습니다. 이 외에도 북인 인사 대부분이 처형되지 않으면 투옥되거나 유배되며 중앙 정치무대에서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100여년 전 중종반정이 폐주(廢主) 연산군 하나를 겨냥해 벌어졌다면 이번 인조반정은 광해군뿐 아니라 북인 정권에 반대했기 때문에 반정 세력으로선 이들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런 피바람에 뚫고 국정에 참여한 북인 출신 관료가 예상보다 많습니다. 한 연구(오수창, 『인조대 정치세력의 동향』)에 따르면 인조 초반 북인 계열로 정치에 참여한 비중은 전체 관료의 9%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당시 재국(才局)이라고 표현되는 실무능력을 갖춘 인사들이었습니다.
서인이 북인계 관료층을 등용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북인이 실천과 실무를 중시한 것에 비해 서인은 명분에 중시했고, 만물의 근원이나 성리학적 질서를 밝히는 데 강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서인이 자신 없는 경제 파트는 북인 중에서도 능력도 있으면서 적폐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인사들에게 맡긴 것이죠. 등용된 이들은 대부분 대북과 갈등을 빚으며 정권 핵심에서 쫓겨난 중북 혹은 소북 출신이었습니다.
북인이 경제 실무를 맡은 배경엔 광해군 시대의 특징도 작용합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은 1608년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이 되던 때입니다. 오랜 전란으로 국토는 크게 황폐해졌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임진왜란 전 150여만 결이 넘던 토지가 전쟁 후에는 30여만 결에 불과했는데, 이는 고려말(50만결)보다도 후퇴한 수준이었습니다. 국부가 매우 감소했지만 그렇다고 세금을 쥐어짤 수도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 밑에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첫 날부터 끝난 날까지 기록한 『징비록』초본. ‘징비록(懲毖錄)은 ‘지난날의 잘못을 경계해 뒤에 환난이 없도록 삼가다’는 뜻이다. [중앙포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정은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민간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전후복구를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세금은 1/3 수준으로 낮추는 대신 이전까지 버려져 있던 땅을 개발하거나 상업과 유통경제를 발달시키는 쪽으로 발상을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염전이나 은광 개발, 동전 주조 등의 정책을 추진하며 상실한 국부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조선 최대의 세제 개혁으로 불리는 ‘대동법’도 바로 이때 북인들이 추진했습니다.
이때 등용된 대표적 인사로는 김신국, 남이공, 김세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김신국은 광해군과 인조 시기를 두루 거치며 6번이나 호조판서(경제부총리)에 올랐고, 남이공은 대사간과 이조판서를 역임했습니다. 이조정랑을 지낸 김세렴은 유형원을 지도하며 훗날 영·정조 시대에 꽃을 피울 실학 태동에 영향을 끼칩니다. 이처럼 이들은 ‘북인’이라는 핸디캡에도 경제에 밝다는 점과 적폐 세력과 함께했지만 적극적이진 않았다는 이유로 ‘반정’ 회오리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적인 북인을 과감하게 발탁해 경제를 맡긴 서인의 균형 감각도 평가받을 대목입니다. 이후 병자호란에도 인조 정권이 무너지지 않은 점이나, 서인(노론+소론)이 약 200여년 간 꾸준히 집권할 수 있었던 데는 이때 '기초공사'가 나름 튼튼하게 진행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사진제공=CJ E&M]
소득주도성장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 쓴소리를 냈던 국민경제자문회의 김광두 부의장이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김 부의장은 사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했던 인사입니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 교사로 발탁되며, 규제 완화와 감세를 통한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 공약의 산파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펴 박 전 대통령과 멀어졌고, 지난 대선에선 문 대통령 대선 캠프에 영입됐습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불협화음을 이어가며 결국 교체가 결정됐습니다. 김 부총리는 이명박 정부 경제금융비서관과 기획재정부 2차관, 박근혜 정부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했습니다.
김동연(왼쪽)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최근 사의를 표명한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연합뉴스]
두 사람은 반대편 혹은 이전 정부의 요직에 있었지만 ‘적폐 청산’을 내걸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등용됐습니다. 여기까지는 인조 시대 북인과 비슷합니다. 다만 이들이 재국(才局)을 계속 펼칠 수 없었던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능력 부족일까요, 아니면 현 집권세력과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다른 요인이 있어서일까요. 둘의 중도 이탈을 단지 개인 역량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요즘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신병주 『北人 학파의 연원과 사상, 그리고 현실인식』·『1623년 인조반정의 경과와 그 현재적 의미』, 조인희 『17세기 초 小北 정권의 성립과정에 對하여』, 우인수 『조선 선조대 남북 분당과 내암 정인홍』 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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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wj**** 2018-12-08 09:06:07 신고하기
댓글 찬성하기10 댓글 반대하기1진정한 적폐청산이란 사람을 쳐내는게 아니라 제도를 바꾸고 잘못된 관행을 청산하여 이에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오게하는 것이지! 관행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당연히 응징돼야 할 범죄행위까지 묶어서 정치꾼들에게 현혹되어 혹세무민 당하는 것이 더 문제!
답글달기- moos**** 2018-12-08 09:05:36 신고하기
댓글 찬성하기0 댓글 반대하기3미친 인간아 노조가 귀족이면 너도 귀족해먹어 재벌정도면 이재용이가너네 아비보다 소중한 하나님 아버지쯤 되겠네? 진실을 말해라 재벌은 귀족 노조는 머슴 이게 바뀐걸 니놈은 본적 있냐? 거짓말도 자꾸하면 지옥불에 던져진단다
답글달기- cheo**** 2018-12-08 07:46:15 신고하기
댓글 찬성하기21 댓글 반대하기1북한에는 공산당 남한에는 국공ㅇ립 노조 민주노총이 좌우 하고 잇읍니다...사법부도 민주노총 노조원 집단에고 판결에 이들의 영향력이 없다고 단언 합니가.. 하급자 대부분이 민주노총인 상황에서 판사가 용가리 통뼈 인가...결국 대통령도 민주노총에거 자유로울수 있읍니가...인도 카스트 제도 카스트란 용어도 포투갈어로 끼리끼리 입니다...귀족 크산트리아 계급이 왕부터 말딴 괸료 까지 입니다...권력 보존을 위해 공무원 끼리 끼리 뭉쳐 잇고.. 예를 들어 경찰이 불가촉 천민을 죽여도 사법부는 무죄 입니다...심지어 인구 50%에 이르는 불가촉 천민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 취급을 받앗읍니다..지금 대한민국 역시 외국인 중국인 보다 못한 국민.. 물론 민주노총은 권력은 하늘을 찌르고...
답글달기- cheo**** 2018-12-08 07:51:01 신고하기
댓글 찬성하기25 댓글 반대하기2언론 역시 민주노총이고 대한민국은 당쟁을 넘어 인도 카스트 제도가 민주화 라는 가면을 쓰고.. 이는 북한 공상장 보다 더 악독한 인도 카스트 신분제가 대한민국 땅에서 기생 하고 잇다는 엄현한 현실입니다...언론 하는 꼴 보세요.. 광주 폭동때 택시 운전사가 기자 입니까./.. 기자가 한일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살인 사건요...계엄군이 없는 지역에서 80% 입니다.,.무법 천지 였어요..계업군이 있는 지역서 사망자 30명은 군인 입니다.. 그럼 민간인 대다수가 게업군이 없는 지역에서 발생 더되엇는데 언론은 진실을 가려 두고 사기군 역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공산당 이상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