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옥의 중국기행 - 변방의 인문학] 카라코람 하이웨이
중 카스~파키스탄 타코트 1032㎞
설산·초원·호수 비경 파노라마
7~8세기 현장·혜초도 오간 이 길
요즘엔 중국 일대일로 핵심 구간
소발률국 등 정복, 나폴레옹 원정보다 위대
![베이지색의 기이한 백사산은 바람에 날리 모래가 지표면에 달라붙어 생긴 특이한 지형이다. [사진 윤태옥]](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5/18/3f8f06be-760f-4259-bda6-75c428105326.jpg)
베이지색의 기이한 백사산은 바람에 날리 모래가 지표면에 달라붙어 생긴 특이한 지형이다. [사진 윤태옥]
![붉은 흙 사이로 드러난 연두색 지층이 경이로운 아단지모. [사진 윤태옥]](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5/18/238691ac-b7e4-4e9f-91e6-34573b3329d9.jpg)
붉은 흙 사이로 드러난 연두색 지층이 경이로운 아단지모. [사진 윤태옥]
고원에 올라섰다 싶을 때 환상적인 옥빛 호수 건너편에 베이지색의 기이한 백사산(白沙山)이 나타난다. 백사산은 사막은 아니다. 바람에 날린 모래가 지표면에 달라붙어 생긴 특이한 지형이다. 이곳이 과연 인간이 사는 세상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지나면서 볼 수 있는 설산 무스타거봉(7509m)의 둥근 능선은 고산반응에 숨이 가빠진 외지인들을 편하게 해 준다. [사진 윤태옥]](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5/18/1a30d5ef-36db-423f-a331-de3ac8e26e47.jpg)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지나면서 볼 수 있는 설산 무스타거봉(7509m)의 둥근 능선은 고산반응에 숨이 가빠진 외지인들을 편하게 해 준다. [사진 윤태옥]
중국 구간의 끝인 훙치라푸는 외국인 비개방 구역이라 중국 여행으로는 타스쿠얼간현(塔什庫爾干縣)이 끝이다. 아침 해를 향해 조금만 걸어가면 진차오탄(金草灘) 습지에 다다른다. 습지의 물웅덩이에 반사하는 햇빛이 영롱하다. 습지를 훤히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허물어진 고성, 해발 3112m의 석두성(石頭城)이 있다. 입구의 표지에는, 한대에는 포리국(蒲犁國)이 있었고 당대에는 총령수착(蔥嶺守捉)을 설치했다는 설명이 있다. 한국인의 눈에는 총령수착을 거쳐 파미르고원 한복판으로 진군했던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군 고선지가 영화처럼 등장하게 된다.
고선지는 망국 고구려 전쟁포로의 2세다. 아버지 고사계는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당나라로 끌려와 하서군(河西軍, 간쑤성 우웨이·武威)에 종군했다. 아버지가 하서군을 떠나 안서도호부(지금의 쿠처)의 장군으로 복무했다. 고선지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20세에 유격장군에 등용됐다. 741년 톈산산맥 북쪽의 달해부(達奚部, 돌궐의 한 갈래)가 반기를 들자 고선지는 기병 2000을 이끌고 토벌했다. 첫 번째 출정에서 큰 공을 세워 안서도호부의 부도호가 되었다.
![고구려 전쟁포로 2세인 고선지가 당나라 장수로 소발률국 원정길 출발점으로 삼았던 석두성. [사진 윤태옥]](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5/18/ef22e67d-8107-464a-a990-b184ce548133.jpg)
고구려 전쟁포로 2세인 고선지가 당나라 장수로 소발률국 원정길 출발점으로 삼았던 석두성. [사진 윤태옥]
연운보에서 다시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최악의 고갯길, 해발 4703m의 탄구령(다콧 패스)을 넘을 때에는 계략을 써서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산악제국 티베트는 고산지대에 적응하기 어려운 당의 군대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탄구령을 넘어올 것으로 예상치 못했다. 소발률국은 티베트 지원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고선지에게 선점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전쟁사에서 나폴레옹이나 한니발의 원정보다 더 위대한 승전으로 평가하는 전투다.
당나라 땐 다양한 혈통·문화 적극 수용
고선지는 751년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아바스 왕조(수도 다마스커스)의 이슬람 군대에 맞섰지만 탈라스에서 패퇴했다. 고선지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하서절도사로 전임됐다. 장안으로 돌아가서는 우우림군(右羽林軍) 대장군에 임명됐다.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핵심 요직이었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나자 토벌군 부원수로 임명되었으나 임의로 군대를 이동해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진중에서 참형됐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라고나 할까.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5/18/90819521-3276-440b-bbe0-29328ad287fc.jpg)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중요한 것은, 당나라는 다양한 혈통과 종교와 문화를 허용하는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인 최치원은 외국인이면서도 당의 관리직을 수행하다가 자발적으로 귀국했다. 일본의 유학승 옌닌은 당나라에서 많은 것을 배워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신라인 출신 혜초 역시 불공삼장(7세기 당나라 고승, 밀교의 6대조)의 여섯 제자에 당당하게 끼어 있었다. 어느 사회든 위아래로 계층이 나뉜다. 계층과 계층 사이에는 출세와 쇠락의 사다리가 있는 법이다. 서로 다른 높이의 사다리가 많이 놓여 있어야 건강한 사회다. 그것이 당나라였고 그 속에서 출세한 고구려인의 하나가 고선지였다.
그러면 고선지 시대에서 1300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외국인들은 입국 문턱의 각종 규제에서 주위의 시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벽에 걸려 사회 하층에서만 맴돌고 있다. 그것은 2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에 와서 살아 보려는 외국인들이나 우리가 필요해서 데려온 외국인들이나 예외가 없다. 우리는 새파란 하늘 아래 고원에서 펼쳐졌던, 전쟁포로이자 망국유민의 2세 출신인 고선지 스토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중국식객』『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