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 카스 인근의 아투스 천문. [사진 윤태옥]](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6/15/de43c7af-53b1-4e8d-b5c7-87b55e454440.jpg)
신장 카스 인근의 아투스 천문. [사진 윤태옥]
중원이 신장 제대로 지배한 건
지난 2100년 역사 중 25% 남짓
청 건륭제가 ‘새로운 강역’ 선포
국·공 내전 후 신중국으로 넘어가
대량 유입된 한족이 인구의 과반
신장이 누구 땅이냐 묻는 건 우문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6/15/180b40dc-3705-4a12-bdbc-f1e56353241d.jpg)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중원의 주도 세력이 변경의 신장을 지배한 역사가 얼마나 되는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0세기까지의 2100년 역사 가운데 중원이 신장을 제대로 지배한 것은 중화민국과 신중국까지 포함해도 많아야 20~25% 정도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변방을 여행하면서 신장이 중국에 통합된 근현대사를 짚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6/15/cee53dd2-2103-42e0-9668-c4ffc9699657.jpg)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서몽골은 오이라트 몽골이라고도 하는데 알타이산맥에서 이리강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준가르부(准噶尔部)가 주력이 되어 강력한 유목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나라와 준가르는 1690년대 강희제 중반부터 1750년대 건륭제 초기까지 70여 년간 상쟁했다. 그러다가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1752년 준가르의 아무르사나가 계승갈등 와중에 밀려 나와서는 청나라에 귀순한 것이다. 건륭제는 1755년 아무르사나를 앞세워 준가르를 무너뜨렸다. 그런데 아무르사나가 오이라트 여러 부를 장악하면서 청조와의 제휴를 파기하고는 현지의 청나라 군대를 학살해 버렸다. 건륭제는 아무르사나의 서몽골을 다시 공격했고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청나라는 예전의 정복전쟁과는 달리 잔인하게 결말지었다. 노예로 보낼 여자와 아이, 노인을 제외한 모든 준가르인들을 죽임으로써 준가르를 아예 절멸시킨 것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6/15/ecda87f4-3f7d-4a09-9784-3a1027f91d49.jpg)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청조는 신장에 대해 복잡하고 정교한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팔기체제를 기반으로 군사력을 독점하는 군정을 기본으로 했다. 군정 총수인 이리장군(伊犁將軍)이 신장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 아래 유목지역에는 자사크라고 하는, 청조에 충성하는 현지 지도자들을 지방통치자로 임명했다. 투루판이나 하미의 왕들이 바로 그들이다. 신장 남부 등지에는 벡이라고 하는 무슬림 관리들을 지역관리로 임명하여 통치했다. 우루무치를 포함해 한족 농민과 상인들이 증가한 곳에는 현·주·도를 설치하고 중원의 관리를 내려보냈다. 학자에 따라 이때의 신장을 청의 보호국이나 봉신국으로 보기도 하고, 완전히 청에 편입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6/15/53b58f19-5d4b-447a-a385-08770fae7249.jpg)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1875년 좌종당이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신장 지역 최고책임자로는 최초의 한족 관리였다. 좌종당의 군대는 1878년 허톈까지 점령하여 신장 재정복을 완료했다. 청나라는 신장 재건에 착수하여 1884년에는 기존의 군정체제를 직할 행정체제인 성(省)으로 개편했다. 위구르인들은 1884년의 건성(建省)을 부당한 병합으로 간주한다. 신장성은 1910년 신해혁명에서 청조에 반기를 들어 중화민국으로 돌아섰다. 신장은 제2차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에 의해 신중국으로 넘어갔다. 그게 오늘의 신장 위구르자치구다.
중국, 만주족 황제들에게 감사해야 할 듯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6/15/e7de3685-f0aa-4263-af9c-065a75cb89b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