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다시보는 6.25

국군 돕다 스러진 문산호 선원들… 국가, 69년만에 이름 불러줬다 조선일보 계룡대=김수혜 기자 음성으로 읽기기사 스크랩 이메일로 기사공유 기사 인

화이트보스 2019. 6. 28. 10:51


국군 돕다 스러진 문산호 선원들… 국가, 69년만에 이름 불러줬다

입력 2019.06.28 03:01

6·25때 장사상륙작전 중 戰死… 軍, 선원 10명 호명하며 훈장

동해안에서 석탄 나르던 민간 수송선이 6·25가 터지자 그 이튿날 해군에 차출됐다. 강원도 묵호에서 전라도 여수까지 쉴 새 없이 오가며 살아남은 국군을 부산으로 실어 날랐다. 스물네 살 선원이 잠깐 집에 들렀다가 다시 나가며 100일짜리 딸을 업은 아내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내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면, 남은 처자식은 마 나라가 안 거두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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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충남 계룡대 해군본부에서 열린 '6·25전쟁 장사상륙작전 문산호 전사자 서훈식'에서 유족 대표가 무개차에 타고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이날 해군은 1950년 전사한 '문산호' 선원 10명에게 69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심승섭 해군참모총장 옆으로 문산호 선원들의 공적을 발굴한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과 문산호 전사자 유가족 이용규씨가 타고 있다. /신현종 기자
그날 엄마 등에 업힌 채 아버지와 작별한 딸이 일흔 노인이 돼 27일 충남 계룡대 해군본부 소연병장에 섰다. 1950년 9월 국군과 함께 싸우다 침몰한 민간 선박 '문산호' 선원 10명이 전사(戰死)한 지 69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받는 자리였다. 함께 전사한 선장 고(故) 황재중씨에게는 작년에 한발 먼저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이날 서훈식에는 문산호 선원 고 권수헌씨의 딸 문자(70)씨를 포함해 문산호 전사자 유가족 30여명이 참석했다. 문자씨는 "외로웠다"고 했다. "아부지 가신 뒤 엄마도 고마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 기억도 없고 얼굴도 모르고 그저 집안 어른들이 '느그 아부지가 느그 어매한테 이래 말하고 나갔다' 카는 그 말씀 한 가지 알고 살았습니다."

1950년 9월 15일 경북 영덕군 장사해안에서 국군을 도와 '장사상륙작전'을 벌이다 좌초한 민간 선박 문산호.
1950년 9월 15일 경북 영덕군 장사해안에서 국군을 도와 '장사상륙작전'을 벌이다 좌초한 민간 선박 문산호. /영덕군 제공
문산호는 1950년 9월 15일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됐다가 좌초했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날 진행된 양동작전이다. 서해안에서 국군과 유엔군 주력부대가 인천을 공략할 때, 동해안에선 문산호가 학도병 772명과 해군 지원병 56명을 영덕군 장사해안에 상륙시켰다. 130여명이 죽고 110여명이 다쳤다. 그래도 격전 끝에 적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오랫동안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명성에 가려 국민에게 잊혔다. 특히 군번 없이 숨진 선원들은 이름도 유해도 없이 '11명 전사'라는 숫자가 됐다. 6·25 참전 용사인 최영섭(92) 예비역 해군 대령이 2012년 이 얘기를 듣고 '이 사람들 이름 찾아주는 걸 내 인생 버킷 리스트로 삼자'고 결심했다.

그 뒤 7년 노력의 결과가 이날 서훈식이다. 최 대령과 임성채 해군 군사편찬과장이 해군 문서고와 학도병 회고담을 샅샅이 뒤져 전사한 선원 이름이 모두 적힌 옛 서류를 찾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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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충남 계룡대에서 문산호 전사자 유가족들이 훈장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현종 기자
이날 서훈식은 국민의례, 공적 낭독, 훈장 수여 순으로 진행됐다. 해군 관계자가 전사한 선원 10명을 차례차례 호명했다. 그때마다 유족들이 혹은 담담하고 혹은 숙연한 얼굴로 걸어 나와 심승섭 해군참모총장이 건넨 훈장을 받아 들었다.

이어 열병식이 진행됐다. 의장대 47명이 국기와 군기를 받쳐 들고 선 가운데, 군악대와 국악대 100여 명이 여름 풀 파릇파릇한 연병장에서 '바다로 가자' '군함 행진곡'을 연주했다. 유족 대표들이 해군이 준비한 무개차 네 대에 나눠 타고 천천히 연병장을 돌며 의장대를 사열했다. 어른들 따라온 밤톨 같은 꼬마(5)가 백발 성성한 유족과 노병을 보고 "와, 옛날 사람 많다" 했다.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은 "빚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마음"이라고 했다. 문산호는 2차대전이 끝난 뒤 우리 정부가 미군에게서 사들인 수송선 여덟 척 중 하나다. 교통부 산하 해운공사 소속으로 묵호항(현재 동해시)에서 석탄을 싣다가 전쟁을 만났다. 6·25 이튿날 석탄 대신 퇴각하는 국군을 태우고 묵호항을 출발해 부산에 갔다. 이후 여수로 이동해 거기서도 후퇴하는 국군을 부산으로 실어 날랐다. 최 대령도 그때 여수에 있었다. 최 대령은 "문산호 선원 한명 한명은 나에게 서류상 숫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나한테 문산호 선장과 선원들은 나랑 같이 싸운 사람들, 얼굴도 다 생각나는 사람들입니다. 여수에서 퇴각할 때, 인민군이 500m 거리까지 밀려와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는데, 문산호 선장이 '우리도 이 나라 국민이니 끝까지 싸우겠다'며 마지막 병사가 배에 오를 때까지 부두에 배를 대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전사자 130여명 명단에 군인 이름만 있고 선원들 이름은 없으니, 찾아야겠다 마음먹었지요."

두 달 뒤 최 대령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같은 시간 문산호 선원들은 장사 해안에서 파도에 휩쓸리고 총탄에 쓰러졌다. 그중엔 열아홉 살 소년도, 스무 살 새신랑도 있었다.

고 이수용씨의 유복자로 태어난 용규(68)씨가 이날 훈장 액자를 받아 안고, 목멘 소리로 "감사합니다" 했다. 눈시울이 붉었다. 누나 호선(71)씨가 아버지 기록을 찾아준 최 대령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최 대령이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거렸다.

전사자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고 이영룡(당시 46세·갑판장)씨였다. 열네 살 큰딸부터 일곱 살 막내아들까지 2남2녀를 키웠다. 전쟁통에 이리저리 뛰면서도 륙색 가득 건빵을 채워 짬짬이 집에 들르곤 했다. 그런 그를 경찰이 불러세워 "신분증 좀 보자"고 했다. 장정들 징집하는 게 경찰 임무였다.

아들 영송(78)씨가 "아부지가 신분증 보이며 '문산호 타고 국군이랑 작전한다' 카니까 경찰이 경례했다"고 했다. 그때 씩 웃던 부친의 얼굴이 아홉 살 아들의 기억에 오래 남았다. 영송씨는 "많은 기억은 없지만 자식 위해 애쓰던 아부지가 제 가슴에 남아 있다. 저도 닮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고 했다.

"어무이가 안 한 장사가 없습니다. 아부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구체적인 걸 몰랐는데, 이래 밝혀지고 훈장도 타니 너무 고맙습니다. 기분 안 좋으냐고요? 참 좋지요. 우리 아부지가 69년 잠수 타다 오늘 올라왔다 아입니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8/20190628001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