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8] 최대 항일운동단체 결성 주도
창립 주역 중 9명이 本紙 인사… 사장 이상재는 '초대 회장'
사설·논설로 운동 방향 제시… 보안법 등 악법철폐운동 전개도
광주의거 학생들 보호에 힘써
1월 20일 자 조선일보는 신간회의 강령과 발기인 명단을 단독 보도했다. 또 '신간회의 창립 준비: 진지한 노력을 요함'이라는 사설을 실어 철저한 준비와 성공을 주문했다. 2월 15일,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 강당에서 신간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2월 16일 자 조선일보는 "시작 전부터 조수(潮水)같이 밀려들어 방청석은 정각이 되기 약 한 시간 전부터 입추의 여지가 없으리만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다"고 전했다.
민족운동의 통일적 지도 기관을 자임한 신간회는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각지의 사회·청년·사상·농민 단체들이 신간회에 동참했다. 전국에 140여 지회가 만들어졌고, 약 4만명에 이르는 정예 회원이 확보됐다.
조선일보는 전국 각지의 신간회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신간회 지회·분회는 조선일보 지사·지국이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일보는 지면에 '신간회 기사 일속(一束)' '신간회 각지 소식' 등 고정란을 두고 신간회 지회·분회의 설립과 크고 작은 활동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중요한 사안은 사설·논설로 뒷받침했다.
조선일보는 신간회와 손잡고 조선인의 민족운동을 억압하는 신문지법, 출판법, 보안법, 치안유지법 등 6개 악법(惡法)의 철폐 운동을 전개했다. 또 색의단발(色衣短髮), 건강 증진, 상식 보급, 소비 절약, 허례(虛禮) 폐지 등 조선일보가 대대적으로 전개한 생활개신운동도 신간회와 함께 펼친 민족운동이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나자 신간회와 힘을 합쳐 진상을 밝히고 우리 학생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당시 조선일보 논설반원으로 신간회 중앙위원이었던 이관구는 훗날 "신간회 운동에 대한 조선일보의 적극 지원은 우리나라 최초 '프레스 캠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신간회를 뒷받침한 '조선일보 트로이카']
조선일보의 신간회 운동 지원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트로이카'의 역할이 컸다.
1927년 초 편집국장과 영업국장으로 조선일보에 합류한 한기악과 이승복은 신간회 창립과 활동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한기악은 만주·시베리아·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