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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한국의 루스벨트’를 꿈꾸나

화이트보스 2020. 5. 2. 18:46



문 대통령 ‘한국의 루스벨트’를 꿈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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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의 루스벨트’를 꿈꾸는 듯하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을 ‘뉴딜(New Deal, 새로운 합의)’로 헤쳐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말이다. 요즘 문 대통령의 발언을 들으면, 87년 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며 ‘대공황과의 전쟁’을 선언한 루스벨트가 연상된다. 문 대통령도 두려움, 전시(戰時), 뉴딜을 얘기했다. 국무회의에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두려움 자체가 아니라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와 희망을 잃는 것” “경제 전시 상황에 한국판 뉴딜을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한다”고 했다.
 

팬데믹 극복 위한 한국판 뉴딜 추진
‘큰 정부’의 사회주의적 경제가 핵심
총선 압승에 도취해 독주할까 걱정
포퓰리즘·전체주의 추락 경계해야

미국 뉴딜은 공격적으로 재정을 쏟아 3R, 즉 부조(Relief)·부흥(Recovery)·개혁(Reform)을 달성하는 게 목표였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 등 도로·교량·공항 등 거대 토목공사를 일으켜 일자리를 만들었다. 노동기본권을 보장해 고용을 유지했고, 사회보장법을 제정해 사회안전망을 확충했다. 경제적으로 정부 간섭을 배제하는 자유방임주의를 접고 시장 개입 등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했다. 사회주의적 요소, 이게 문 대통령이 눈여겨봤을 핵심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문 대통령에게 ‘좋은 위기’였다. ‘방역 정부’로서 성공했고, 4·15 총선 압승으로 이어졌다. 이제 뉴딜식 사회주의 경제를 실험할 기회까지 줬다. 팬데믹은 세계화 속에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 만능에 맡기는 신자유주의를 흔들었다. 1980~90년대 레이거니즘과 대처리즘으로 보수의 전성기를 열었던 ‘작은 정부 시대’는 졌다. 대신 막강한 권력과 돈으로 나라 경제를 주도하는 ‘큰 정부’가 귀환하고 있다. 거대 정부를 꾸려 한국판 뉴딜에 도전하는 게 문 대통령의 구상이리라.
 
진보의 진격과 보수의 퇴조 현상도 가세했다. 코로나 원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시대 정신이 왼쪽으로 기울고 있다. 금기시됐던 ‘사회주의’란 용어에 더는 경기(驚氣)를 일으키지 않는 사회가 됐다. 대중은 평등과 분배라는 진보 좌파의 유혹에 솔깃해한다. 철 지난 마르크스주의는 거부하지만, 1인당 3만 달러의 나라에서 먹고 살 만하니 유럽식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추세다. 자유와 민주의 보수 가치가 버림받은 게 아니다. 문재인 정권의 실정과 독주, 독선과 위선이 용서받은 건 절대 아니다. 합리적 보수는 탐욕스럽고 고리타분한 보수집단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
 
보수는 자문해봐야 한다. 100만원씩의 긴급재난지원금이 뿌려지고, 기업과 고용안정에 수십조 원이 풀린다고 당장 국가부도라도 날 듯이 베네수엘라 등 극단적 사례를 들어 포퓰리즘이라고 거품 무는 건 지나치다. 사회적 약자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인 상황에서 나랏돈 좀 쓴다고 무작정 비판하는 건 서민의 절박함을 모르는 기득권층의 딴죽으로 비친다. 포퓰리즘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자본주의의 상징 미국에서 민주당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민주적 사회주의자’ ‘급진 좌파’로 불린다. 그가 외친 전 국민 의료보험·무상교육은 과연 포퓰리즘인가. 트럼프 대통령이 하면 경기부양책이고, 남미에서 하면 죄다 포퓰리즘인가. 우리 보수세력이 ‘인간적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사회주의 정책을 먼저 치고 나왔다면 총선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60%대에 재진입했다. “전시 상태에서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해석이다. 이제 삼권분립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이 청와대에 집중됐다. 제4부로 불리는 언론까지 대부분 친정부적이어서 거칠 게 없다. 이 정권 실세들은 경제를 이념으로 접근한다. 총선이 끝나기 무섭게 토지공개념·기업 이익 공유제 등 급진적 개념을 꺼내고,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확실하게 알도록 갚아 주겠다”는 사람들이다. 한국판 뉴딜을 핑계로 파멸의 포퓰리즘을 향해 질주할 공산이 꽤 있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이 루스벨트를 넘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이런 전체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대공황은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도 낳았다. 1933년 3월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시기에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을 이끌고 제국의회 최대 의석을 확보한 뒤 이듬해 총통에 올랐다. 2차 세계대전은 루스벨트 리버럴(자유주의)과 히틀러 전체주의의 대결이었다.
 
뉴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미국 대통령 중 전무후무하게 4차례 연임을 했다. 집권 여당에서 나오는 대통령 중임제 개헌론은 문 대통령의 순수성을 희석할 수 있다. 그의 롤모델은 장기집권이 아니라 번영을 되찾아 추앙받는 루스벨트일 것이다.
 
싫든 좋든 국민들은 한국판 뉴딜 버스에 올라타야 할 운명이다. 미지로 가는 길은 두렵다. 그 노선이 미국식 리버럴이냐,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이냐, 아니면 전체주의적 국가사회주의냐에 따라 ‘한국의 루스벨트 꿈’은 실현과 몽상 사이를 가를 것이다. 뉴딜의 끝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어떤 노선을 택할지 국민들은 명백히 알 권리가 있다.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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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중앙시평] 문 대통령 ‘한국의 루스벨트’를 꿈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