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 첩첩 산여울
빛 고운 계절이다. 투명한 대기. 조금도 상처 입지 않은 햇살. 지상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별이 된다.
물빛 그윽한 계절이다. 격정의 여름을 살아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그 물빛에 어리는 하늘빛 깊다.
산여울 아득한 산마루에 올라 산바라기 하기 좋은 계절이다. 종일토록 하염없이 산만 바라보고 싶은 계절이다. 여기서 나는 덕유산(1,614m)을 올라야 할 더 이상의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 중봉에서 남덕유로 흐르는 덕유산의 주릉 너머로 흐르는 첩첩 산여울. 하염없이 바라보며 따라 흐르고 싶은 풍광이다. (사진 박봉진ㆍ덕유산 향적봉대피소 관리인)
다소 주관적이긴 하지만 덕유산이 우리에게 안기는 최고의 선물은 조망의 즐거움일 것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원추리가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덕유평전, 유장히 흐르는 산마루, 참나무 가지로 하늘을 삼은 남덕유산 일대의 숲길, 겨울철의 상고대와 얼음꽃, 일출, 운해 같은 것들이 최고의 느낌으로 각인돼 있을 수도 있다.
높은 산 어디서고 나름대로 조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만, 덕유산은 그 가운데서도 특별하다. 사방 거칠 것 없이 아스라이 물결치는 첩첩 산마루. 끝없이 멀리 너울지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렇게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뒷 산여울은 앞 산마루의 배경이 되어 주고, 앞 산여울은 뒷 산마루를 추켜올리기도 하고 깊숙이 가라앉히기도 한다. 그리하여 산이 품고 있는 나무와 풀과 바위, 날고 기는 모든 생명들은 하나로 어우러져 ‘산’이라는 거대한 생명체로 꿈틀거린다. 그 산들은 다시 어깨를 겯고 산줄기를 이루어 이 땅 모든 생명들의 젖줄이 되고 둥지가 된다.
덕유산이 보여 주는 첩첩 산여울의 아름다움은 시각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약 그것만을 본다면 새의 눈에 대롱을 대는 격일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에게 산은 삶의 의지처였고 신이 머무는 곳이었음을 실감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누리는 즐거움의 으뜸이다.
덕유산정의 조망, 그 ‘물러섬의 미학’
덕유산정에 서서 첩첩이 너울지는 산여울을 보노라면 ‘천하를 굽어 보는 듯이 우쭐거리는 마음’이 일지 않는다. 그 까닭을 나는 제대로 표현해 낼 재간이 없다. 호연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름을 얻지 못한 신들의 제단 앞에 선 기분이 들기도 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몸 받기 이전 궁극적 생명의 자궁 속으로 들어서는 것 같기도 하다.
아득히 먼 산여울 사이, 곧잘 안개와 구름이 집으로 삼는 골짜기의 깊이와 높이가 지워진 서늘한 산여울 사이에서 나는 하늘의 기운을 느낀다. ‘땅은 누르고 하늘은 검다’ 할 때의 ‘검을 현(玄)’이 그러한 산색을 두고 한 말 같기도 하다. 모든 색이 모여드는 바탕이자 모든 색이 풀려 나오는 근원으로서의 하늘빛. 빛이 머물 곳으로 산골짜기 말고는 없겠지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세상만사의 운행 원리를 일러 ‘천지조화’라 하는 것이겠지.
▲ 덕유산 동쪽으로 아스라이 펼쳐지는 산여울. 멀리 가야산 봉우리가 보인다. 덕유산의 지음(知音)이다. (사진 박봉진ㆍ덕유산 향적봉 대피소 관리인)
아득히 멀리 이어지는 산색(山色)의 현묘한 변화를 제대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암록색에서 녹색, 청색, 청회색으로 변해가다가 끝내는 하늘 속으로 스며든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색깔의 탄생과 소멸의 현장. 그것을 일러 우리 산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하면 지나친 언사일까.
덕유산의 조망을 다른 산에 빗대어 보자면 ‘물러섬의 미학’이라 이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령 지리산이나 설악산은 뭇 산을 아래에 두고 굽어보는 듯하다. 호연이 거나하여 인간사의 덧없음을 콧방위로 날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에 비하여 덕유산은 좀 다르다. 향적봉에서 동, 남, 서쪽 방향으로 눈높이로 보이는 가야산, 황매산, 지리산, 운장산, 대둔산, 계룡산, 적상산 등의 산들은 마치 바라만 봐도 좋은 벗인 듯 지음(知音)인 듯 멀거니 앉아 있다. 다음 시를 쓴 한도인(閑道人)의 풍모를 느끼게 하는 풍광이다.
일 없이 한가로우니 입길에 오를 일 없어
한 줄기 향을 사르며 향기에 취하네
자다 깨면 차가 있고 배고프면 밥 있으니
걸으면서 물 보고 앉아선 구름 보네
閑居無事可評論
一炷淸香自得聞
睡起有茶飢有飯
行看流水坐看雲
―산거(山居) 청욕선사(淸欲禪師·1288~1363·중국)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
산여울 첩첩이 이어진 풍광은 종종 송수권의 시 ‘산문에 기대어’에 나오는 “가을山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이라는 구절과 함께 운위된다. 어떤 사람들은 시인이 ‘중첩하여 늘어선 산의 윤곽선’을 ‘산그리메’라는 시어로 표현했다고도 하는데, 나로서는 시인이 정말 그런 뜻으로 한 말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가을山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의 의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흔히들 ‘그리움’이라고 말하는데 시적 의도 밖의 감상 같지는 않지만, ‘산그리메’를 산의 윤곽선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것 또한 적극적 감상 또는 시적 상상력의 결과로 본다면 할 말이 없지만-.
▲ 덕유산 동쪽, 아득히 멀리 이어지는 산색(山色)의 현묘한 변화. (사진=장국현 사진작가)
‘그리메’라는 말은 ‘그림자’의 고어다. 월인석보에도 ‘그림자’와 같은 뜻으로 쓴 예가 보이고, 능엄경언해에는 ‘분별은 그리메 같다’고 하여 실체가 아닌 허상을 그리메에 빗대어 표현했다. 그렇다면 ‘산그리메’라는 말은 ‘산그림자’라는 말일 텐데, 그것이 꼭 꼬집어 무얼 이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애매하다.
윤석산은 ‘온달전-평강왕의 말’이라는 시에 ‘산그리매 같은 愚鈍을 뒤집어 쓴 나뭇단 한 짐’이라는 구절을 남긴 바 있다.
산그림자는 말 그대로 산의 그림자를 이를 텐데, 햇빛을 등진 산허리의 어둑한 모습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찌됐든 송수권 시인은 ‘가을山 그리메’라고 썼지 ‘산그리메’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는 사실 큰 차이다. 그런데 왜 ‘산그리메’로 ‘확정(?)’되었을까. 그리메라는 말이 참 고우면서도 애잔한 느낌을 안고 있는데다, 시인의 절창에 화룡점정처럼 놓이면서 또 한번 시적 변용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누구라도 덕유산에 오르면 시적 감흥에 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느 산의 조망과 달리 사방으로 첩첩이 산줄기가 흐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나는 ‘첩첩 산여울’이라 불렀다. 여울을 건너면서 산그늘에 깃든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하고, 이 여울 저 여울 따라 끝까지 가면 만날 수 있을 누군가를 떠올려 보기도 한다.
‘고마움’이라는 한 마디로 산여울 따라 흐르는 심사를 추스린다. 너울지며 골을 이루어 나무와 풀과 다람쥐와 토끼를 거두고, 낮추어 사람을 길러내는 산이 고맙다. 산여울 끝 어딘가에서 나를 살아내게 한 무수한 인연이 고맙다. 그 고마움은 물기 흥건한 그리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빛 고운 계절이다. 산여울 따라 흘러간 내 마음도 가을 물빛을 닮을 수 있으면 좋겠다.
/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ㆍ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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