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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삐라를 보내는 사람들, 그들이 나선 이유

화이트보스 2008. 11. 16. 21:07

북한에 삐라를 보내는 사람들, 그들이 나선 이유

탈북자 출신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
“北 민주화시키는 가장 효과적 방법
핵실험 중지 등 요구 이행 안 하면 계속 날릴 것”
지난 10월 27일 오후 1시 강원도 고성군 거진항 앞바다에 북서풍이 강하게 불었다. 이날 자유북한운동연합(FFNK) 박상학 대표는 납북자 가족모임 최성용 대표와 함께 거진항 앞바다에 나가 삐라(전단) 4만장을 풍선에 매달아 북한에 날려보냈다.

▲ 지난 10월 10일 인천 무의도 앞바다에서 있은 삐라 살포 작업. (photo 조선일보 DB)
이날 박상학 대표가 날려보낸 대북 삐라는 두 종류였다. 자유북한운동연합 측이 제작한 ‘사랑하는 북녘의 동포들에게’ 외에 ‘사랑하는 북녘의 동포와 슬픔과 분노를!’이 추가되었다. ‘사랑하는 북녘의 동포와 슬픔과 분노를!’에는 무관심 속에 잊혀져 가는 납북 어부 436명의 명단과 기타 납북자 명단이 인쇄되어 있었다. 선박 임대비 등 삐라 살포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납북자가족모임에서 냈다.


“北 동포의 눈·귀가 열리는 그날까지”

10월 28일 서울 정동에서 만난 박 대표는 “이미 삐라 살포 중단의 5대 전제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 한 삐라 살포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가 제시한 5대 전제조건은 △박왕자씨 총격살해에 대한 공식 사과 △대한민국 모독 중지 △핵실험 중지와 핵무기 폐기 △중국에서의 탈북자 강제 북송 중지 △정치범 수용소 폐지이다. 현실적으로 북한 측이 5개항 중 어느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박상학 대표는 삐라 살포를 강행하겠다는 뜻이다. 박상학 대표는 삐라 살포가 북한 체제를 민주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 박상학 대표 (photo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북한은 60년 동안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철저하게 차단해왔다. 언론자유도 없고 인터넷도 없다. 오직 수령 찬양밖에 없는 곳이 북한이다. 북한 인민들은 선군·수령독재에 속고 산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 자유에 대해 읽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열리게 되면 독재에 대한 비판도 할 수 있다. 우리 단체는 수령독재에 대한 비판의 함성을 유도하는 데 활동 목표를 두고 있다.”


3단계로 터지는 대형 풍선 자체 개발

민간단체가 북한에 삐라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당시 북한민주화운동본부를 이끌고 있던 박상학·영학 형제, 기독탈북인연합회 이민복 대표가 대북 삐라 살포 운동에 앞장섰다. 박상학·영학 형제는 일가족 5명이 1999년 가을 탈북해 2000년 봄 한국에 들어온 경우이고, 기독탈북인연합회의 이민복 대표는 북한 농업과학기술원 출신의 과학자로 1995년 탈북해 한국에 정착했다.

삐라를 날려보내는 기술이 없던 두 단체는 DMZ 근방까지 접근해 북풍(北風)에 맞춰 일반 풍선에 삐라 봉지를 매달아 날려보내는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드는 데 비해 효율성이 떨어졌다. 풍선이 기류를 타기 위해서는 3000~5000m 상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이 풍선은 중간에서 터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하지만 노하우를 갖고 있는 국방부 측은 대형 풍선을 띄우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애드벌룬을 띄우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은 과학자 출신의 이민복 대표였다. 수소가스를 이용해 대형 비닐로 애드벌룬을 만들었다. 이 대표는 삐라 부대가 3단계(단거리·중거리·장거리)로 터지도록 타이머를 개발했다.

주간조선은 2007년 2월 23일자에 ‘최초공개-북한에 보내는 삐라 풍선의 현장’을 동영상과 함께 보도했다. 주간조선 보도는 민간단체의 대북 삐라 살포가 최초로 일반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인천광역시 강화군 월계리 야산에서 애드벌룬을 띄우는 동영상을 보면 관계자들이 애드벌룬에 삐라 주머니를 매달아놓고 기도한 뒤 “할렐루야”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9월 부시 초청 행사서도 삐라가 최고 화제

2007년 4월 이후 삐라 살포는 북한민주화운동본부가 독자적으로 전담해왔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는 기독탈북인연합회와 삐라 내용의 우선 순위를 놓고 갈등을 보여왔기 때문이었다. 두 민간 단체는 ‘민주화가 먼저냐, 선교가 먼저냐’를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박상학 대표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우선 물과 빵을 줘야 한다”면서 “선교는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후 북한민주화운동본부는 2007년 말까지 삐라 살포와 함께 정치범수용소 해체운동을 해왔다. 2008년 1월 박상학씨는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나와 북한에 삐라를 보내는 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을 출범시킨다. 이와 함께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애드벌룬팀 요원들이 모두 자유북한운동연합으로 옮겨왔다. 역시 박 대표의 동생 영학씨는 현재 자유북한운동연합 애드벌룬팀장으로 7명의 팀원과 함께 기술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박상학 대표는 지난 9월 23일 부시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얀마·러시아의 반체제 인사와 함께 뉴욕 맨해튼 남쪽 해안에 있는 거버너스섬에 갔다. 박상학 대표는 삐라 10장을 안쪽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들어갔다. 이 대북 삐라는 앞서 9월 18일 인천 앞바다 무의도에서 보낸 삐라였다. 박 대표는 부시 대통령에게 삐라에 담긴 내용의 일부(6·25전쟁의 진실)을 설명했다. 삐라는 이날 최고의 화제가 되었다.


北측이 삐라 불만 제기하자 오히려 후원금 쇄도

부시 대통령은 “자유확산의 전초에 서 있는 당신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번역해서 읽어보고 싶은데 선물로 줄 수 없느냐”고 했다. 거버너스섬에서 있은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은 CNN 등 미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북한 측이 공식적으로 ‘삐라 살포’를 문제 삼기 시작한 이후 자유북한운동연합(www.ffnk.net)은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탈북자들은 ‘탈북여성간첩 원정화 사건’이 터진 이후 일반인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껴왔다. 실제로 자유북한운동연합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보면 ‘대북 삐라 사건으로 탈북자단체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글이 상당수 차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인의 관심은 후원금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10월에만 600만원이 넘었다. 단체 결성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후원자의 70% 이상이 1만원씩 보내온 사람들이다. 접속자가 몰려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일도 일어났다. 10월 10일에는 서울평화상 수상자인 수전 솔티씨가 무의도에서 있은 자유북한운동연합 측의 삐라 살포를 지켜보기도 했다. 박상학 대표는 “김정일은 위대한 인민의 자애로운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면서 “우리는 그들이 감췄던 수령의 비밀을 파헤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


| 대북 삐라의 역사 |

1970년대 말 남북관계 물꼬 트기 위한 타개책
라디오도 실어 보내… 대만 기술도 배워 활용


대북 삐라의 역사는 197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심리전 총국에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대화에 물꼬를 트기 위한 타개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한다. 심리전 총국은 대만에 있는 대륙공작대의 사례를 연구해 보고한다. 당시 대만 정부는 매일 풍선에 육포, 기름 등의 식료품을 실어 중국 본토에 띄워 보내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북한 동포들이 남한방송을 듣게 하자는 취지에서 라디오를 보내기로 한다. 북한제 ‘천리마 라디오’와 똑같은 라디오를 국내 전자업체에 제작을 의뢰해 삐라와 함께 풍선에 실려 보냈다. 풍선에 타이머를 달아 풍속과 시차에 따라 터지게 하는 기술은 대만 정부로부터 전수받았다. 정부는 이와 함께 대만 측이 계절풍을 이용해 산둥성 등지에 삐라를 보낼 수 있도록 전라북도 부안에 임시 기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20여년간 우리 정부는 체제 선전을 하는 삐라를 계속 북한에 보냈다. 정부 차원의 대북 삐라가 사라진 것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후부터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4월 ‘삐라 살포를 금지해 달라’는 북한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 조성관 편집위원 mapl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