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19세기 당시 독도에 들어간 자국 어민을 ’해금령(海禁令)’ 위반으로 처형하는 등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한 고문서가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는 일본 시마네현 하마다역사사료관에서 올초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고문서를 발견했다고 1일 밝혔다.
이 문서는 1838년 2월 당시 시마네현의 통치자인 ’마쯔다이라가 하마다(浜田)’가 각 어촌에 보낸 ’어해서어제본장(御解書御諸本帳)’으로 죽도(당시 울릉도의 일본식 명칭)에 들어가면 극형(사형)에 처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문서 내용을 보면 또 1690년대 안용복 장군 등이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땅이라고 항의한 뒤 일본 바쿠후(幕府)가 죽도와 송도(당시 독도)에 일본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해금령을 내렸지만 한 일본인 어부가 이를 어겼다가 사형을 당했다.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는 일본 시마네현 하마다역사사료관에서 올초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고문서를 발견했다고 1일 밝혔다.
이 문서는 1838년 2월 당시 시마네현의 통치자인 ’마쯔다이라가 하마다(浜田)’가 각 어촌에 보낸 ’어해서어제본장(御解書御諸本帳)’으로 죽도(당시 울릉도의 일본식 명칭)에 들어가면 극형(사형)에 처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문서 내용을 보면 또 1690년대 안용복 장군 등이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땅이라고 항의한 뒤 일본 바쿠후(幕府)가 죽도와 송도(당시 독도)에 일본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해금령을 내렸지만 한 일본인 어부가 이를 어겼다가 사형을 당했다.
뿐만아니라 일본 정부는 해금령을 어기고 울릉도에 몰래 들어가 밀업을 한 요나고(米子)의 어선선주 카이즈야 하찌우에몬(會津屋八右衛門)을 처형한 뒤 비슷한 사건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촌의 촌장들에게 이 문서를 보내고 서명날인까지 받았다.
모두 4장으로 된 이 문서에는 당시 일본 어촌 촌장들의 서명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후 일본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넘보지 않다 19세기말-20세기 초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다시 독도에 대한 침탈을 시작했고 그 같은 행태가 아직 계속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김 교수는 “해당 문서는 죽도(울릉도)에 대한 해금령만 언급하지만 해금령을 어겼다가 처형된 카이즈야 하찌우에몬(會津屋八右衛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심문조서 등에는 당시 해금령에 독도도 포함됐다”며 “이는 일본이 독도를 조선의 영토라고 인정한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시마네현에서 발견된 문서와 관련해 당시 독도를 일본인들이 조선 영토로 인정한 사실에 대해 일본 내 학자중에서도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입력 : 2008.12.01 09:52 / 수정 : 2008.12.0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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