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사회 , 경제

김일성·박헌영 6·25당시 중공군 파병요청 50년만에 확인 - 남도일보 기사

화이트보스 2008. 12. 3. 14:43

김일성 친필 중공군 개입요청서신 발견
중국단둥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 소장 -포로수용소유적관에 전시예정
2006년 08월 24일 (목) 13:20:21
   
 
  ▲ 서신말미에 나란히 보이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서명  
 

분단의 고착으로 작용한 김일성 친필서신

역사의 축을 거꾸로 돌리고 민족을 페허로 만든 한국전쟁의 귀중한 사료가 발견됐다.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1950년 10월 1일 김일성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후방의 통로가 봉쇄되고 전황이 급격히 불리해지자 모택동에게 급박한 전황설명과 함께 한국군 참전을 호소하는 친필서한이 중국 단둥의 항미원조 기념관에서 발견되어 조선일보가 입수한 것을 거제시가 사본을 구해 공개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박헌영 공동명의 서한은 초기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보급과 통신등이 차단되어 고립되는 상황을 언급하며  지원을 요청하고 조선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로 내어주지 않기 위해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아끼지 않은 것이라며 "친해하는 모동지시여"라는 존칭으로 중국의 개입을 요청하고 있다.

피아가 500만의 인명피해를 입고 60만 가구의 민가와 5000개가 넘는 학교,공공건물과 1000여개의 병원이 파괴되는 등 전 국토가 페허로 변한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는 다시 되뇌이고 싶지 않은 민족의 불행으로 남았다.

광복의 환희도 잠시 열강의 이익추구와 이데올로기에 한국은 미,소의 패권주의 갈등의 중심에서 스스로의 의사를 국제사회에서 발언조차 하기 어려운 약소국의 설움을 겪고 있었다.

한국이 상대의 독점적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견제한 미,소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아닌 타협이 이뤄져 38선을 경계로 미,소가 진주하게 됨으로서 민족전쟁의 개연성은 이미 나타났다고 볼수있다.

한국전쟁에 미,소련 뿐 아닌 중국도 깁숙하게 개입

북에 진주한 소련은 한반도의 완전공산화를 목적으로 공산정권수립과 함께 국방력강화에 역점을 두어 현대적 장비와 군조직개편을 서두르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마자 미군에 동시철군을 제의하게 된다.

반면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방파제 역활로 한반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기는 했으나 2차대전을 끝내고 다시 소련과의 지상전을 치룰 각오를 다지는 정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고 한국문제에 깊이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방심을 틈탄 남침으로 3일만에 수도가 함락되는 등 일방적인 전황은  낙동강에 방위선을 치고 숨을 고른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압록강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통일의 염원을 이루기 직전까지 이르지만 한,만 국경에 비밀리에 집결한 중공군이 그해 10월 25일 100만이 넘는 대군을 투입 인해전술로 한국전에 개입하자 전세는 역전되고  후퇴해 다시 서울이 함락되고 수복되는 등 3년여를 이득 없는 동족상잔으로 이어졌다.

김일성의 서신이 1950년 10월 1일로 나타나 있는것으로 보아 수세에 몰려 어려운 상황에서 모택동이 약속했던 지원을 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중공군의 개입은 사전에 약속이 되어있던 것으로 보여 한국전쟁에 미,소련 뿐 아닌 중국도 깁숙하게 개입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에 발견된 김일성 박헌영의 친필서한은 통일의 역사 일보전에 모택동에게 보내진 참전요구 서한으로 모택동이 자서전에서 밝힌 "한국전쟁 참전의 고뇌"시기에 참전결정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여 역사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

   
 
  중공군개입을 요청하는 김일성,박헌영의 친필서신  
 

 김일성·박헌영 6·25당시 중공군 파병요청 50년만에 확인


2000년 06월 24일 00시 00분 입력



올해로 6·25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았다.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지만 민족 최대 비극인 6·25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여전히 부진하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한국전쟁 관련 각종 자료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속속 공개되고 있다.
본지는 최근 무르익고 있는 남북 화해분위기를 적극 환영하며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북한과 중국 국경지대인 요녕성 단동시를 찾아 역사의 한켠에 묻어 있었던 6·25 비사들을 밝혀냈다.

6·25전쟁 당시 김일성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과 박헌영 외무상이 모택동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에게 지원군 출병을 요구하는 공동명의의 친필서신을 보낸 사실이 전후 50년만에 처음으로 확인됐다.
또 서신발송 1주일후 모택동이‘항미원조(抗美援朝·북한을 돕고 미국을 물리친다는 뜻)지원군 조직’을 골자로 한 6개항의 군사소집령을 직접 작성,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팽덕회 최고사령관에게 지시한 사실도 밝혀져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중국 공산당이 6·25출정 40돌을 맞아 지난 93년 7월 중국 요녕성 단동시에 개관한‘항미원조 기념관’내 전시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이들 자료들은 현재 중국 공안당국의 철저한 보안속에 전시되고 있으며 김일성과 박헌영 서신의 경우 A4용지 2장 분량의 한글 친필과 김일성이 직접 써내려간 A4용지 5장 분량의 한자 친필 등 모두 7장으로 작성됐으며 모택동의 지시공문도 A4 2장 분량에 달한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10월1일‘존경하는 모택동 동지 앞’이란 글을 통해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는 조선인민에게 당신이 각 방면에 배려를 베풀어준데 대해 당을 대표해 충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시작, 전후 3개월간의 정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서신은 특히 “우리 인민군은 상륙침입한 미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우고 있으나 적이 약 1천대의 각종 항공기로 매일 주야없이 전선과 후방을 폭격, 항공기가 없는데다 기동력이 떨어진 우리로서는 참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다”며 기울어가는 전세를 낱낱히 설명해 나갔다.
서신은 이어 “우리는 조선을 제국주의 식민지로 내놓지 않기 위해 장기전을 대비한 모든 대책을 강구중이나 적들이 시간여유도 주지않고 계속 진공, 자체 힘으론 극복할 가능성이 없다”며 “이에 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원조’즉, 중국 인민군의 직접 출동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즉각적인 출병을 강력 요청했다.
한편 서신을 전해받은 모택동은 1주일후인 10월8일 ‘조선인민 해방전쟁을 지원하고 미제국주의에 반항하기 위해 중국 인민지원군을 조직한다’라는 내용을 포함, 모두 6개항에 걸친 지원군조직 지시서를 직접 작성, 팽덕회 총사령관에게 전달했다.
군사소집령에 따르면 지원군은 팽덕회를 총사령관 및 정치위원으로 제38·39·40·42군을 주축으로 조직되며 임무는 ‘동북 3성(요녕·길림·흑룡강성)을 후방기지로 조선을 지원하는 일’이라고 명시돼 있다.
또 이 지시공문에는 “인민지원군은 조선에 들어간 뒤 조선인민에게 우호심과 존경심을 심어주고 그들의 습관을 존중하고 정치제도를 준수해야 한다”며“이것은 승리를 보증하는 중요한 정치기초”라고 적혀있다.
이와 함께 모택동은 “조선에 들어가기전 예측가능한 곤란상황을 심각하게 준비해야 하며 높은 열정과 용기, 인내심으로 어떤 고난도 극복해야 한다”며 “이렇게 하면 승리는 우리에게 속할 것”이라고 지원군 행동지침까지 세심히 강조했다.
이에 대해 전남대 박만규 교수(역사교육과)는 “북측의 요구로 중국측이 개입했다는 학계의 주장은 줄기차게 제기돼 왔으나 결정적인 사료는 부족했었다”면서 “이번 친필서류는 학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외교안보연구원 관계자도“중국이 내부적으론 사회통합을, 외부적으론 긴장조성을 위해 한국전에 개입했다는 그동안의 주장이 현실로 입증됐다”며 “특히 모택동이 서신발송 1주일후 지원군 조직 지침을 육필 작성한 사료는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항미원조기념관은 6·25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에 의해 지난 90년 착공, 지난 93년 7월27일 개관됐으며 전시관과 기념관, 전경회관 등이 들어서 있다.
중국 단동/송창헌 기자 chang@kjtimes.co.kr


송창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