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3캠프에서 바라본 설릉. 가운데 불쑥 돌출한 커니스 너머의 왼쪽 벽을 통해 오른 다음 오른쪽 아래로 내리뻗은 설릉을 따라 와야 제3캠프에 다다른다. 우상단은 커니스 중앙 돌출부를 지나고 있는 대원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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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일인 9월1일 새벽부터 비가 왔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공항으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진다.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평소와 사뭇 다르게 보였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은 들기도 했다.
네팔에 도착한 다음 우리는 고소순응차 랑탕지역에 있는 5,850m의 나야캉부터 올랐다. 고산등반은 난생 처음인 나는 역시 등반 처음부터 고소가 와서 머리가 아팠다. 이렇게 힘든 등반은 처음이다. 힘들어하고 있는 나를 대장이 보시고 “수석아! 악으로, 깡으로 올라가는 거야!”라고 말했다. 힘이 생기는 것 같았고, 나는 김용길 대원, 셰르파 1명과 정상에 섰다.
등반 도중 크레바스에 나만 자꾸 다리가 빠져 힘이 많이 들었지만, 나야캉 등반을 마치고 카트만두에 돌아왔을 때는 홀가분하고 시원했다. 이제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될 것인데, 빨리 하고 싶다는 설렘과 기대감이 나야캉 때보다 훨씬 더 컸다.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에서 헬기를 타고 안나푸르나 팡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는 반가운 얼굴들-베이스캠프 구축을 위해 먼저 들어온 대원들을 만나 자꾸 웃음만 나왔다.
베이스 도착 후부터 한 10일 가량 눈이 와 12일만에야 C1을 설치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계획보다 시간은 늦어졌지만 좋은 일이기도 했다. 벽에 눈이 많이 붙어서 벽 등반이 수월해질 것 같다는 것이다.
다음날부터 벽 등반을 시작했다. 벽에 붙은 눈이 많아서 C2까지는 그래도 빨리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C3 진출은 그렇지 않았다. 바위지대이고 경사가 세기 때문에 힘들었다. 등반은 점점 계획보다 늦어졌다. 이제는 능선 돌파를 해야 하는데, 되도록 최대한 빨리 등반을 해야만 한다.
- ▲ C1 바로 아래 아이스폴 지대의 크레바스에 설치한 사다리를 지나고 있는 대원. / 제1캠프를 향해 오르고 있는 홍성욱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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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에서 고소증으로 혓바닥 마비
나는 C3에서 고소증이 크게 왔다. 그렇게 아파보기는 생전 처음일 것이다. 혓바닥이 마비되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 전날 밤에 좁은 텐트에서 4명이 잘 때 추워서 앉아서 잠을 잔 것이 화근이 된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형들 2명을 남기고 베이스캠프로 내려가야만 했다. 베이스캠프 하산도 쉽지 않았다.
베이스캠프에서 하루 쉬고 다시 C1에서부터 차근차근히 등반해 나갔다. 다음 날은 C2를 그냥 지나쳐서 한 번에 C3까지 12시간동안 올랐다. 다음날 C4까지 전진했다. C4로 가는 길은 600m 정도 빙벽을 하며 트래버스를 하고, 400m 정도 큰 봉우리를 넘어야 하는 난구간이다.
C4에 다다른 뒤 박홍기, 김용길 대원의 몸 상태가 나빠졌다. 그래서 나와 셰르파 1명이 같이 최종캠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오전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서 오후에 출발했다. 같이 가야 덜 위험한데, 셰르파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셰르파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날은 어두워져서 랜턴을 켜야만 했다.
무전으로 상황을 알리니 최종캠프에 있는 셰르파 1명을 내려 보내겠으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등반을 시작했다. 그런데, 설벽 구간의 고정로프가 없어졌다. 최종캠프 이후로 로프가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고 앞에 간 셰르파가 걷어간 것이다. 겁도 나고 당황도 되었다. 그곳이 10년 전에 고 김여훈 대원이 사고 난 장소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금씩 올랐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옮기며 등반하니 어느덧 벽 위에 서게 되었다. 그 때의 성취감은 나야캉에 올랐을 때보다 더 컸다. 형들과의 무전을 마치고 올라가고 있는데, 위에서 셰르파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와 같이 최종캠프로 갔다. 유현종 대원이 반겨주었다.
그 날 마지막 부분에 로프를 설치하고 온 현종 형은 많이 피곤한 모습이었고, 아파보였다. 특히 손가락 동상이 심했다. 이미 검게 변한 상태였고, 통증도 크다고 했다. 빨리 내려가야 할 상황이었는데도 내일 정상공격을 하고 내려갈 것이라고 굳게 다짐한 모양이다. 같이 죽을 끓여먹고 내일 등정을 위해 빨리 잠을 청했다.
그러나,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눈이 내리지는 않는데, 많이 날렸다. 아침부터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기를 빼앗겨버린 것 같다. 유현종 대원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결국 등정길을 나와 셰르파만 가게 되었다. 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눈으로 보는 거리와 실제 거리는 오차가 있었다.
- ▲ 제3캠프가 설치된 설릉 위를 향해 주마링으로 벽을 오르고 있는 대원들. / 제4캠프지를 나서고 있는 대원들. 등 뒤의 안나푸르나 내원쪽으로 운해가 들어찼다. / 제3캠프. 여기서부터 날카로운 설릉을 따라 살벌한 가로지르기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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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200m 앞두고 눈물 머금은 후퇴
C1에서부터 C4까지는 팡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열망하던 팡을 나는 지금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다. 그리고 오르고 있다. 이런 감격적인 순간을 모든 대원들과 나누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팡봉의 난이도가 높게 느껴졌다. 바짝 서있는 데다가 바람까지 많이 불었다. 힘들게 계속 등반을 해도 추위가 느껴졌다.
그런데 고정로프가 부족했다. 확보용 스노바도 거짓말처럼 다 떨어졌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뒤돌아보니 유현종 대원이 저쪽 봉에서 보고 있다. 유 대원도 안타까운 모양이다. 셰르파들은 그냥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팡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약 200m 정도밖에 안 되는데 돌아가려니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눈물을 머금고 최종캠프로 향했다. 정말 안타까웠다.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유 대원과 천천히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도 만만치 않았다. 손이 시린데 벙어리장갑을 벗어야만 하강기를 걸 수 있다. 그래도 내려가려면 어쩔 수 없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최종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이스캠프에 있는 대장과 교신했다. 대장은 밑에 있는 줄을 끊어서 같이 줄을 묶고 올라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우리 멤버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셰르파들은 장비가 없으면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먼저 올라갈테니, 밑에서 확보만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래도 셰르파들은 못 하겠다며 하산을 권했다.
대장은 결국 우리도 내려오라고 지시했다. 빨리 내려가지는 못한다. 유 대원의 상태가 더욱 나빠졌기 때문에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올 땐 꼭 정상을 찍겠다고 굳은 다짐을 했다. 그 단단한 눈 속에 내 다짐을 묻고 내려왔다. C4에서 하루, 다음날 C1까지, 그 다음날에야 베이스캠프에 내려설 수 있었다.
고정로프와 장비가 도착하여 다시 베이스캠프가 분주하게 돌아갔다. ‘이번에는 꼭 하고 돌아온다’는 다짐으로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2개조로 나누어서 하루 간격으로 운행했다.
C2까지 갔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C1으로 되돌아와 김용길, 박홍기 대원과 같이 쉬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무전에서 들려왔다. 오늘 컨디션이 제일 좋았던 박봉하 대원이 C3를 50m 남겨두고 300m 정도 추락했다는 것이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박봉하 대원이 무전을 보낸 때는 이미 추락한 뒤였다. 다행히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C3에 있던 이학영, 서석근 대원이 박 대원이 떨어진 곳으로 내려가 구조작업을 했다. 다행스럽게 빨리 박봉하 대원을 찾아서 응급조치를 했다고 한다.
- ▲ C5-정상 구간의 리지. 바로 앞의 칼날 능선을 지나 저 위 설원에 C5가 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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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로프 끊어지며 대원 또다시 추락
2차 등정시도를 위해 일단 나 혼자 C3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 날은 내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힘들게 12시간을 올라갔을 때와는 달리 7시간20분만에 C3에 도착했다. 휴식을 취하며 몇 시간이 흐를 즈음 다른 대원들이 올라왔다. 그중 이종헌 대원(의료)은 박봉하 대원을 간호하기 위해 밑으로 내려갔다. 다시 공격을 결정한 대장의 결단력은 정말 대단하다.
예정대로 이학영, 최찬규, 나 3명과 셰르파 3명은 C4로 출발했다. 나는 선두에 서서 빠르게 치고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이학영 대원이 나를 부르며 돌아오라고 손짓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사람 숫자가 모자랐다. 설마! 저 밑에 검은 색 점 3개가 움직이고 있었다. 최찬규 대원이 고정로프가 끊어지며 350m 정도 추락한 것이다. 선박용 로프가 아닌, 더 좋다는 새로 나온 짠 로프로 준비했는데 이게 끊어질 줄이야! 하늘에 대고 한숨을 쉬며 한탄했다. 무전으로 최찬규 대원은 괜찮다고 전해 들었다. 하지만 괜찮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350m를 날랐는데-.
우리는 C3로 돌아가 다시 텐트를 쳤다. 텐트 안은 완전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 때 대장의 무전이 왔다. 모든 캠프 대원들은 일단 몇 시간 잠을 자라는 지시였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다시 무전기가 울리며 “다들 잘 듣기 바란다”로 시작해서 “분위기가 좋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자. 이대로 다 포기하고 내려가면 너무 억울하지 않냐? 박봉하, 최찬규 대원이 사고가 난 상황에서 정상공격을 하는 것이 정말 유감이지만 용기를 내어 한 번 더 해보자”라고 말씀하셨다.
대장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내가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전에는 기가 많이 꺾여 있었다. 더불어 박봉하, 최찬규 대원의 애정 어린 격려 무전을 받고 내일을 준비했다.
다음날 아침, 이학영, 서석근 대원이 아침밥을 맛있게 해주었고 나는 힘을 내서 C4를 거쳐 최종캠프까지 올랐다. 마지막 캠프의 두 텐트 중 하나는 다 부셔지고 한 개만 무너질 듯 말듯 모습만 유지하고 있었다. 텐트를 보수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여기까지 온 것은 저기 보이는 저 시커먼 봉우리 위에 오르기 위해서다. 내가 우리 멤버 모두를 대신해서 꼭 오를 것’이라는 각오를 가지고 텐트를 떠났다. 매일 바람이 강했지만 오늘은 유달리 더욱 세게 느껴졌다. 가는 길에 바람에 밀려서 다섯 번이나 주저앉아 버렸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전보다 웬지 더 힘들게 느껴진다. 그래도 이제 더 이상 후퇴는 없다!
전에 끝냈던 부분에서 다시 등반을 이어갔다. 200m짜리 로프 한 롤을 다 쓰고, 조금 잘라서 가지고 간 로프를 사용하려고 꺼냈다. 그런데 그 로프가 엉켜버렸다. 그 로프를 풀려고 1시간 정도를 소비했다. 그 때 아마 동상기가 좀더 심해진 듯하다.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바로 앞에 있을 줄 알았던 정상은 더 멀리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40m 정도 올라가니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장관이 펼쳐졌다. 셰르파들과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이곳이 정말 안나푸르나 팡의 정상이란 말인가! 감격의 눈물이 났다. 해발 7,647m의 정점, 11월29일 오후 1시40분(현지시간)이었다.
- ▲ 벽을 향해 아이스폴 지대를 가로질러 낸 루트의 설릉 위에 한 대원이 서 있다. / 제3캠프로 가기 위해 벽을 오르는 대원. 빙하 저 건너편에 명봉 마차푸츠레가 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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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대원들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
팡은 안나푸르나 내원의 거의 중앙부에 있기 때문에 모든 봉우리들이 다 보인다. 이 경치는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어치를 가진다. 그 감동의 시간을 만끽하고 조심스레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것보다 더욱 조심스러웠고, 체력 또한 많이 소진된 상태여서 겁도 났다. 내려오는 중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우리 멤버들, 친구들, 원정을 도와주신 분들이 많이 생각났다.
최종캠프에 도착해서 소식을 베이스에 무전으로 알렸다. 너무도 좋아하시는 선배들 덕에 내 기분이 더욱더 좋아졌다. 푹 쉬라는 대장의 말을 듣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정상에 오른 감격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내 인생에 다시는 못 올 순간처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아침 일찍 텐트를 걷어서 배낭에 넣고 중요한 장비들을 챙겨서 하산을 시작했다. C4에 들러 중요한 장비들을 더 챙기고, C1까지 단번에 내려왔다. C1에 도착했을 때 모든 대원들이 나와서 반겨주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 박봉하, 최찬규 대원을 봤을 때는 더욱더 눈물이 나왔다. 안부를 묻고 상태를 물어보니 전보다 좋아진 것 같다. 내일 헬기가 와서 후송한다고 했다. 우리도 역시 내일 모두 하산한다고 들었다.
- ▲ 정상에 선 박수석 대원(왼쪽)과 왕디 셰르파. 안나푸르나4봉쪽을 바라보고 촬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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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드디어 베이스캠프로 내려가는구나. 안도의 한숨이 계속 나왔다. 빨리 가서 대장을 뵙고 싶었다. 국내에 있는 보고 싶은 사람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C1에서의 마지막 날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드디어 헬기가 도착, 부상한 두 대원을 실어갔다. 내려가는 길은 많이 변해 있었다. 크레바스가 더 벌어지고 빙탑들이 무너져 있었다. 2시간 정도 내려오니 기대하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대장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홍성욱 대장은 “막내인 네가 강원대 산악회의 숙원인 안나푸르나 팡의 마지막 점을 찍었다! 17년을 우직하게 한 곳만 바라보며 모든 것을 팽개친 미련한 우리네의 모든 회한이 노출된 이곳, 안나푸르나 팡 동벽~남릉 개척등반을 마무리했다”며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 등반의 성과가 얼마나 큰 것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년 전 이곳에서 유명을 달리한 고 김여훈 대원의 이름을 따서 우리는 우리가 새롭게 완성한 이 길을 달과 여훈길이라고 명명했다.
- ▲ 제2캠프로 가고 있는 대원들. 사진의 왼쪽 구석 위 능선상에 제3캠프, 그 다음 오른쪽으로 능선을 따라 4,5캠프를 설치했다. 사진 중앙부 오른쪽 옆의 피라미드 모양의 봉이 팡봉 최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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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팡봉 동벽~남릉 루트
강원대팀, ‘17년간 세 번 시도’끈질긴 투혼 발휘
강원대산악회의 박수석 대원과 셰르파 두 명이 함께 오른 안나푸르나 팡봉의 동벽~남릉 루트는 1.4km의 벽등반과 4km(실거리 6km)의 설릉을 통과해야 하는 전인미답의 길이다. 팡봉은 등정 자체가 어렵기로도 유명한 봉으로, 79년 이탈리아원정대 이후 12개 원정대가 시도했으나 80년 오스트리아대만 성공했을 뿐 강원대팀(단장 류재형)에게 두 번째로 발길을 허락한 난공불락의 봉우리다.
오스트리아원정대는 강원대 원정대가 오른 루트의 반대쪽에서 정상으로 바로 이어지는 능선을 통해 등정을 이루었다. 이 루트에 비해 강원대팀이 오른 동벽~남릉 루트는 한결 위험하고 어려운 것으로 평가된다. 6km에 달하는 긴 리지를 통과해 거봉 등정을 이룬 예는 등반사상 희귀한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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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대산악회는 개교 60주년, 산악회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이번 원정길에 올랐으며, 등반 개시 45일만인 11월29일 오후 1시40분(현지시간) 7,647m의 팡 정상에 올랐다.
강원대 산악회는 91년 1차 원정에서 벽을 통과, 6,400m 지점까지 도달한 바 있고, 97년 2차 원정에서는 7,200m까지 진출했으나 김여훈 대원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 후 17년이 지난 이번 3차 원정에서 꿈을 이루었다. 추락해 어깨 골절상 등을 입은 박봉하 대원은 일주일간 입원치료 후 퇴원했으며, 최찬규 대원은 동상 치료 중이다.
이번 원정은 강원도를 비롯해 하이원리조트, GTB강원민방, 춘천시청, 스벤손코리아, 영원무역 등이 협찬했다.
/ 글 박수석 등정대원 사진 강원대산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