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평시 신속결정작전 펼칠 기갑군단 창설하라 |
특명 “북한 급변 사태시 10시간 내 평양 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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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반 |
25년 전인 1982년, 육군은 ‘수도기계화보병사단(약칭 수기사)’이라는 단 하나의 기동부대를 갖고 있었다. 1950년 초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와 유사한 기능을 맡은 부대가 수도사단인데 이 부대의 마크가 맹호였다. 6·25전쟁 초기 서울을 빼앗긴 수도사단은 다른 사단과 똑같이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난 후 이 부대는 수도방위라는 고유 임무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선을 지키는 정예부대가 되었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에 2개 육군 사단을 파병하는데 이때 뽑힌 부대가 맹호와 백마(9사단)였다. 월남이 패망하기 직전인 1972년 육군은 32보병사단(백룡부대)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재편했다. 육군 최초의 기보사단을 만든 것인데 6개월 후 맹호가 월남에서 철수하자 32기보사단 장비를 맹호부대로 보내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을 만들고, 32사단은 다시 보병사단으로 돌렸다. 이것이 1973년 3월22일인데 그 후 10년간 한국은 단 하나의 기계화보병사단만 보유했다. 군사전문잡지인 ‘디펜스 타임스’ 5월호에는 육군의 전차/장갑차 세력 변화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 따르면 한국이 보유한 두 번째 기보사단은 20사단(결전부대)이었다. 1981년 20보병사단은 차량화보병사단이 됐다가 1983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재편됐다. 20기보사단은 사령부가 양평에 있어 ‘양기사’로 약칭됐는데, 수기사와 양기사는 육군 유일의 기동군단인 7군단에 소속돼, 라이벌 의식을 갖고 기동전술을 발전시켰다.
한국군 5개 기보사단 보유 2020 국방개혁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우리 군의 부대 수가 공개됐다. 이에 따르면 현재 육군은 열 개 군단, 22개 상비사단으로 편성돼 있다. 열 개 군단 가운데 9군단(전북 완주)과 11군단(경남 창녕)은 충청 전라 경상 지역을 담당하는 2군 예하에 있다. 2020 국방개혁에 따르면 육군은 조기에 2군사령부를 후방작전사령부(후작사)로 개편하면서 이 군단을 없애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여덟 개 군단이 남는데, 이 가운데 1·5·6·7·수도군단이 경기도를 담당하는 3군사령부에 속하고, 2·3·8군단은 강원도를 작전지역으로 하는 1군사령부에 배속된다. 이러한 체제의 육군이 현재 다섯 개 기보사단을 갖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22개 상비사단의 4분의 1에 육박하는 숫자가 기보사단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육군은 수기사와 양기사 외에 11기보사(화랑부대), 26기보사(불무리부대), 30기보사(필승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2010년쯤 8사단(오뚝이부대)을 기보사단으로 재편할 예정이므로 조만간 여섯 개의 기보사단을 갖는다. 다섯 개 기보사단 가운데 네 개는 3군에 배속되고 화랑부대인 11기보사만 1군에 배속된다. 강원도는 기동전을 펼칠 공간이 적어 한 개 기보사단만 배치하고, 들이 넓고 서울 등 대도시가 많은 3군 지역엔 네 개의 기보사단을 배치한다. 육군은 다섯 개의 기보사단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 환경 변화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정답부터 밝히면 ‘상당히 미흡하다’이다. 미 육군은 여섯 개의 기동사단을 갖고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데, 왜 한국 육군은 다섯 개 기보사단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일까. 북한 육군의 전력과 동서양 전사(戰史)를 통해 드러난 기동부대의 중요성을 검토한 후 한반도 유사시 기동부대 역할을 살펴보기로 하자.
▼ [제1부] 독일의 구데리안이 창시한 기갑부대의 전격전 북한 육군은 휴전선 최전방에 서쪽에서부터 보병인 4군단(황해남도 해주)-2군단(황해북도 평산)-5군단(강원도 평강)-1군단(강원도 회양)을 배치했다. 그리고 그 뒤에 815기계화군단(황해북도 서흥)과 820전차군단(황해북도 사리원), 620포병군단(황해북도 신계), 806기계화군단(강원도 원산)을 배치했다. 815기계화군단과 820전차군단, 620포병군단은 경기도 북쪽 그러니까 한국 3군과 대적하고, 806기계화군단은 한국 1군을 상대한다. 남북한 육군은 DMZ를 경계로 여덟 개 군단을 배치해놓았다. 서부전선에 다섯 개, 동부 전선에 세 개 군단을 배치한 것까지도 똑같다. 차이점은 한국은 일곱 개 보병군단에 한 개 기동군단(7군단)인 데 반해, 북한은 네 개 보병군단에 두 개 기계화군단, 한 개 전차군단, 한 개 포병군단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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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 육군은 서부전선에 있는 보병군단에 한 개씩 기보사단을 넣어놓았다. 즉 1군단에는 30기보사, 5군단에는 8기보사(8사단은 2010년을 목표로 기보사로 재편되고 있음), 6군단엔 26기보사를 두었고, 기동군단인 7군단은 수기사와 양기사로 편성돼 있다. 수도군단을 제외한 서부전선의 전 군단이 기보사단을 갖고(또는 ‘가질 예정’에) 있다
보병부대 지원하는 한국군 기갑부대 1군(11기보사)과 1군단(30기보사), 6군단(26기보사), 5군단(8기보사-2010년 이후)에 배속돼 있는 기보사단을 모으면 육군은 7군단과 같은 기동군단을 두 개 더 만들 수 있으니, 기계화보병 전력이 북한에 비해 미흡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국 육군은 따로 포병군단을 만들지 않고, 군단에 포병여단을, 사단에 포병연대를 배속해놓았다. 그리고 독립된 유도탄사령부를 갖고 있어 포병군단이 없다고 하여 북한에 비해 포병 전력이 열세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북한 육군은 전차군단을 갖고 있으나 한국 육군은 없다는 점이다. 한국 육군은 전차부대를 보병부대와 기계화보병부대 지원용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즉 보병군단을 돕기 위해 기갑여단을 배속시키고, 보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기갑대대(3군 예하 사단)나 기갑중대(1군 예하 사단)를 배속시켜놓았다. 보병부대 작전 지원을 목표로 하는 전차부대는 전차 고유의 장점을 살린 작전을 하지 못한다. 전차가 갖고 있는 독특한 장점을 살려 작전하려면 기갑사단이나 기갑군단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 육군은 전차가 부족해 이러한 부대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반면 북한 육군은 오래전부터 820전차군단을 유지해오고 있다. 기갑군단(사단)과 기계화군단(사단)은 같은 기동부대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2대의 1의 비율로 전차가 장갑차보다 많으면 기갑군단이고, 1대의 2의 비율로 적으면 기계화군단이다. 한국군은 장갑차가 많은 기계화사단은 갖고 있지만, 전차가 많은 기갑군단은 갖고 있지 못하다. 기갑군단과 기계화군단 같은 기동부대는 보병군단보다 후방에 배치된다. 보병군단이나 보병사단에 100㎞는 머나먼 길이지만, 시속 60㎞로 달리는 기동부대엔 옆 마을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동부대는 후방에 있다가 취약점이 발견된 쪽으로 벼락같이 치고 나가 100여㎞를 돌파해 일거에 전세를 뒤집는다. 기갑군단이나 기갑사단의 중요성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육군과 이에 대응한 미·영·불·소 육군의 경험을 통해 인정받게 되었다. 전차는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4년 영국군 공병 중령인 스윈턴에 의해 개발됐는데, 스윈턴 중령이 전차를 개발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보병 중심의 참호전이었다. 보병은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진격한다. 이때 상대 보병은 깊은 참호에 숨어 기관총을 쏴대므로, 돌격한 병사들은 고지에 이르지 못하고 대부분 고꾸라졌다. 상대가 돌격할 때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군은 독가스까지 사용했으나 전황을 타개하지 못했다. 병사의 희생을 줄여보려던 스윈턴 중령은 무한궤도를 달고 있는 농업용 트랙터를 보고 참호를 건너뛰며 공격할 수 있는 ‘움직이는 토치카’ 개발에 착안했다. 그리고 신무기의 정체를 가리기 위해, 이 무기를 식수를 받아놓는 ‘(물)탱크’로 불렀다.
가명이 본명이 된 ‘탱크’ 그가 생각한 ‘움직이는 토치카’는 무한궤도 위에 쏟아지는 기관총탄을 막을 수 있도록 두꺼운 철판으로 방호를 하고 그 앞에 기관총을 달아 공격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스윈턴은 이러한 개념으로 개발한 무기에 ‘마크 1’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위장 명칭인 탱크도 사용되었다. 그 후 영국 육군은 마크 2, 3, 4를 개발했으나, 이들을 통칭 탱크라 했다. 가명으로 출발한 탱크는 본명이 된 것이다. 이 탱크가 일본과 한국에 들어와 고대전투에서 말을 이용해 만들어졌던 ‘전차(戰車)’로 번역되었다. 전차는 두꺼운 장갑(甲)을 한 기동(機) 무기이므로 ‘기갑(機甲)’이란 이름도 얻었다. 전차는 영국에서 개발됐지만 활용술은 독일에서 발전했다. 전차는 독일어로 ‘판저(Panzer)’인데,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격전(電擊戰)’이라는 뜻의 독일어 ‘Blitzkrieg(블리츠크리에그)’와 전차를 뜻하는 독일어 ‘Panzer’를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3S로 불리는 surprise(기습) speed(속도) superiority(우세)를 특징으로 하는 전격전은 구데리안(1888~1954)과 로멜(1891~1944)에 의해 발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국가에서 육군의 주력은 보병이었다. 구데리안은 보병이지만 기동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처음 구데리안은 차량을 이용한 기동을 생각했는데 이 부대는 아군 지역에서는 빠르게 기동하나 적지(敵地)에서는 방호능력이 없어 제대로 기동하지 못했다. |
그리하여 전차를 앞세워 돌진할 수 있는 장갑 기능을 갖춘 기동 부대의 창설을 주장했다. 구데리안은 보병 장군들의 미움을 사 한직으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계속 기갑부대 육성을 부르짖었다. 그러자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는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여 주목했다.
게슈타포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들은 히틀러가 어느 날 구데리안을 불렀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지금 독일은 동쪽으로는 소련, 서쪽으로는 프랑스에 둘러싸인 형국이다. 이러한 포위를 뚫고 독일의 국력을 극대화하려면 빠른 기동부대, 그중에서도 전차부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소련과 프랑스를 밀어내고 독일을 유럽의 중심국가로 만들 생각이 있었으므로 기갑부대를 이끌 군사령관에 구데리안을 임명했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같은 게르만 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와 합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오스트리아에도 나치당이 있었기에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독일과 합병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기동부대가 평시에 이룬 독-오 통일
과거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그러나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데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 후에는 헝가리 등 거느리고 있던 많은 나라를 독립시켜, 자신은 작은 국가로 전락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는 독일과 합병해 옛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침묵하는 다수’는 독일과의 합병을 두려워했다.
독일이 안팎에서 오스트리아와 합병하자는 여론을 일으키자 주변국인 프랑스와 소련이 긴장했다. 이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합병해 세력을 키우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만일 독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합병한다면, 이들은 합병을 방해하는 차원에서 군사적인 개입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프랑스와 소련이 개입하면 오스트리아의 합병 반대파들은 군사적인 봉기를 일으킬 개연성이 다분했다. 이러한 충돌을 피하는 방법은 주변국과 오스트리아의 반대세력에 반대할 틈을 주지 않도록 ‘눈 깜짝할 사이’에 합병하는 것뿐이다. 구데리안은 히틀러가 이러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기갑부대를 육성했다.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 주의 파사우(passau) 시는 오스트리아와 접한 국경도시인데, 여기서부터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까지의 거리는 200㎞가 되지 않는다. 1938년 히틀러는 구데리안 사령관에게 “72시간 내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구데리안은 그 즉시 “독일군이 진격하면 오스트리아군이 저항할 수 있으니, 평화를 지키기 위해 출동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녹색 깃발을 달고 가겠다”고 보고해, 승인을 받고 바로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예하 부대장들이 “200㎞를 달릴 기름이 확보돼 있지 않다” “교전에 대비한 탄약이 부족하다”는 등 갖가지 ‘아니오’를 상주했다. 이에 대해 구데리안은 “일단 연료탱크만 채우고 출발하고 도로에서 주유소를 만나면 독일 정부의 이름을 걸고 외상으로 넣어라. 탄약은 지금 갖고 있는 것만 싣고 출발해라. 진격 도중에 오스트리아군이 사격을 해오면 교전하지 말고 우회하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싸움이 아니라 신속한 진격이다”라고 지시했다.
구데리안의 전차들이 전속력으로 파사우 시를 통과할 때, 파사우 건너편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독일군 전차의 위용과 전차에 내걸린 녹색 깃발 때문에 교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독일 부대는 전차를 앞세워 줄줄이 빈으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도로에 들어섰다.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것은 3월12일인데 워낙 진격 속도가 빨라 다음날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합병을 선언할 수 있었다.
재빠른 국민투표
그리고 한 달이 못 된 4월10일, 오스트리아 국민을 상대로 국민투표를 실시해 합병 찬성 99.7%라는 높은 지지율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주변국들은 오스트리아 주민이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과의 합병에 찬성했다고 하니 개입할 명분이 없었다. 기동부대 덕분에 독일은 전시가 아닌 ‘평시’에, 오스트리아와 민주적인 합병을 이뤄낸 것이다.
오스트리아를 대상으로 한 ‘게르만 국가 통일’을 달성한 히틀러는 기갑부대의 중요성을 확실히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동부대 육성에 전력을 기울여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할 때도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게르만족으로 구성된 국가가 아니기에, 오스트리아에서처럼 동조세력을 얻을 수 없었다. 동조 세력을 얻기 힘들면 게르만 족을 두려워하며 게르만 족이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복속 세력’을 얻어야 한다. 독일군의 위세가 강해지면 복속 세력이 증가하고 반대로 약해지면 ‘저항 세력’이 급팽창한다.
방어전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어선(線)’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방어선의 어느 한 곳이 뚫려 적군이 쏟아져 들어오면, 뚫리지 않은 곳에 배치돼 있던 병력을 적군을 막아 세울 수 있는 곳으로 빼내, 제2 방어선을 형성해야 한다.
구데리안의 기갑부대는 폴란드 침공에서도 최선봉을 달렸다. 구데리안군의 진격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폴란드군은 제2 방어선을 형성할 수 없었다.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독일은 공군력과 ‘5열’이라고 하는 정보부대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사전에 폴란드에 침투해 있던 5열 요원들은 후퇴하는 폴란드군 사령부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고 독일 공군기들이 정밀 폭격함으로써 폴란드군 지휘부는 완전 마비돼버렸다.
히틀러는 대단한 모략가다. 그는 폴란드를 독일이 독식하면 주변국인 소련이 두려움을 느껴 참전할 수 있다고 보고, 사전에 소련과 폴란드 분할을 약속했다. 독일군은 1939년 9월1일 새벽 4시부터 폴란드를 공격해 7일엔 바르샤바 남서쪽 36마일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폴란드는 루블린으로 수도를 옮기고 총체적인 저항을 준비하는데, 17일 동쪽에서 소련군이 공격해 들어왔다.
질적 우세 무너뜨리는 양적 열세
논두렁을 오르는 순간 전차 포신은 하늘을 향한다. 전차의 포신은 지면과 나란한 수평각 이하로는 내려오지 못하므로, 이러한 전차는 전방에 있는 상대 전차를 쏠 수가 없다. 반면 상대 전차는 장갑이 약한 아군 전차의 바닥을 향해 결정타를 날릴 수 있다. 전차 포신이 하늘을 향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무논에서 맴돌 수도 있다. 그러나 맴돌기는 상대에게 목표물이 돼주는 행위가 된다.
한반도는 도처에 전차가 은신하기 좋은 산과 언덕이 있다. 성능이 떨어지는 전차일지라도 산과 언덕에 숨어 있다가 근거리 사격을 하면 성능 좋은 적 전차도 한순간에 깨질 수 있다. 한반도의 자연조건은 성능 좋은 전차라고 하여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2006년 ‘국방백서’는 북한군이 보유한 전차는 3700여 대이고 한국군이 보유한 전차는 2300여 대로, 북한이 한국보다 1400여 대 많다고 밝히고 있다. 전차 대수에서는 한국이 38대 62의 비율로 열세다. 한국군 전차의 성능이 아무리 우수해도 38대 62라는 양적 열세를 가볍게 돌파할 정도로 우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은 6·25전쟁의 경험 때문에 전차 전력 육성에 노력해왔다. 북한 경제력이 무너졌다고 해도 북한 전차는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서 전략가들은 한국은 전차 대수의 증강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99대 98로 끝난 농구시합에서는 패자(敗者)도 최선을 다했다는 박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은 이종 격투기와 같아서 약간의 우세가 섬멸을, 약간의 열세가 전멸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부족한 전차 전력을 메워준 것이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이었다. 주한미 8군은 상대 전차를 잡는 공격헬기로 무장한 항공여단을, 주한미 2사단은 기갑여단과 항공여단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유사시 미국은 수많은 전차를 한국에 보낸다는 작전계획 5027을 갖고 있었기에, 한국은 부족한 전차 전력을 상쇄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이 전차의 운용술이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내가 죽으면 상대를 공격할 수 없으므로 전투는 그야말로 ‘아생연후(我生然後)에 살타(殺他)’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장기 시합은 아무리 많은 말이 살아남아도, ‘한(漢)’이나 ‘초(楚)’ 같은 장이 떨어지면 패배한다. 따라서 본격적인 공격을 하기 전, 장을 보호하는 ‘궁’을 짜는 경우가 많다.
오방진(五方陣)과 오각편제
포(咆)를 뒤로 빼내고 사(士)의 위치를 바꿔 장을 보호할 궁을 짜는 것이 전투에서는 진(陣)을 짜는 것에 해당한다. 장기는 ‘장기판’이라고 하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싸우나, 전투에는 이러한 제한이 없다. 장기판의 장과 사는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나, 전투사령부는 제한 없이 이동할 수 있다. 전장에 나간 지휘관은 언제 어느 곳에서 상대가 기습해 오더라도 유생역량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전투는 아생연후, 즉 방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반적인 방어는, 기동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산이나 강 같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실시한다. 지형지물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진법은 지형지물이 없는 완전 평지를 상정해 방어에 가장 유리한 형태가 무엇인지 찾는 것에서부터 발전했다.
완전 평지에서 방어하기 좋은 형태의 진을 개발한 후, 이 원형을 그때그때 주변상황에 맞춰 변형하는 것으로 진법은 발전해온 것이다. 동서양의 병법가들은 오래 전부터 완전 평지에서 방어하기 가장 좋은 진으로 ‘오방진(五方陣)’을 꼽아왔다. 여기서 방(方)은 사각형을 뜻하므로 오방진이란 말은 나올 수 없다. 오방진이란 용어가 생긴 것엔 까닭이 있다.
오방진은 사각형의 꼭짓점에 해당하는 곳에 부대를 배치하고(四方陣), 사각형의 가운데에 또 하나의 부대를 배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사방 어느 곳에서 적이 쳐들어와도 2~4개 부대로 대응할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적이 꼭짓점으로 쳐들어오면 꼭짓점에 있던 부대로 일차 대응하고, 좌우 꼭짓점에 있던 부대가 지원한다. 그래도 전력이 달리면 가운데 있던 부대가 출동해 지원한다. 적이 양 꼭짓점 사이로 쳐들어오면 양 꼭짓점에 있던 부대가 막아서고, 이어 중앙에 있던 부대가 출동해 지원한다. 적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쳐들어오면 네 꼭짓점에 있던 부대가 모두 대응하고, 중앙에 있던 부대는 그중 약한 곳을 돌아다니며 지원하는 기동방어를 한다.
오방진을 택하지 않고 6각진, 7각진 혹은 원진(圓陣)을 채택하면 보다 넓게 방어망을 구축해,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벨기에 축선을 선택해 집중 공격한 독일군처럼 어느 한쪽으로만 쳐들어오면, 오방진보다는 적은 병력으로 방어에 나서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삼각형으로 진을 짜고 중앙에 기동 방어부대를 두는 3각진은, 아군의 활동 공간이 협소해진다는 약점이 있다. 일자진(一字陣)은 정면에서 오는 적을 막는 데는 매우 유리하나 후방이나 측면에서 오는 적은 막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5개 여단으로 구성된 기갑군단
오방진은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에도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군이 공격하면 적군은 아군이 접근해올 것으로 예상되는 통로에 일부 부대를 매복시킨 후 아군을 통과시킬 수 있다. 그리고 아군을 정면에서 막아서 앞뒤에서 포위 공격한다. 이러한 포위전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구조가 오방진이다.
전차는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두꺼운 장갑을 쓰고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화력과 기동력을 갖췄으므로, 공격과 방어를 일원화한 무기로 꼽힌다. 공격과 방어를 일원화한 전차와 공격과 방어를 일원화한 오방진이 만나 탄생한 것이 현대 육군의 5각체제다.
독일과 소련은 원래 8월23일 소련이 먼저 폴란드를 공격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의심 많은 스탈린은 독일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독일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거져 줍는 차원에서 폴란드를 공격했다. 독일과 소련은 각자가 점령한 만큼의 폴란드를 사이좋게 나눠 먹게 되었다. 이때의 폴란드 처지가 일본과 중국 러시아에 둘러싸인 지금의 한국과 아주 비슷하다. 히틀러는 같은 민족으로 구성돼 있어 내부 동조자가 있었던 오스트리아와 합병할 때는 주변국이 개입할 틈을 주지 않고 초스피드로 진격했고, 내부 동조세력이 적은 폴란드를 병합할 때는 사전에 주변국에서 먹잇감의 일부를 던져줌으로써 주변국의 개입을 막는 기지를 보였다.
슐리펜 계획, 만슈타인 계획 여기서 히틀러가 멈춰 섰다면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을 도발했다 패배한 국가’라는 오명을 씻고, 러시아·프랑스·영국과 더불어 유럽 정치를 좌우하는 강력한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4강 체제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 패권국가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영원한 라이벌 프랑스를 굴복시켜야만 한다. 나폴레옹 때의 프랑스는 독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유럽의 패권을 장악했다. 반면 비스마르크 총리 시절의 프로이센은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빌헬름 1세는 파리에서 독일 황제에 취임하였다. 1승1패를 주고받은 양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다시 맞붙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군의 공격으로 시작됐는데 프랑스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이를 막아냈다. 이때 프랑스를 이끈 총리가 클레망소(1841~1929)인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클레망소 총리는 유능한 군인인 포슈(1851~1929)를 연합군 총사령관에 오르게 한 상태에서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훗날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 건조하는 항공모함에 클레망소와 포슈의 이름을 붙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프랑스는 독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독일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러시아(소련) 카드를 활용해 왔다. 독일이 강성해지면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양쪽에서 견제하는 외교술을 구사해온 것. 이것이 독일에는 스트레스였다.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만 유럽 패권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비책을 제시한 이가 독일 육군의 참모총장인 슐리펜(1833~1913)이다. 슐리펜은 러시아의 ‘둔중함’에서 비법을 찾고자 했다. 러시아가 국가 총동원령을 내려 병력을 동원하는 데 6~8주일이 걸릴 것으로 판단한 그는 먼저 프랑스를 점령하고 이어 독일군 주력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러시아를 친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을 실현하려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된 병력과 물자를 단기간에 러시아 전선으로 옮기는 방안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철도를 ‘내선(內線)’용 기동로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독일은 철도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 독일 내부의 철도 수송망이 완성되자 ‘슐리펜 계획’은 실행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때부터 슐리펜은 어느 쪽으로 프랑스를 쳐들어갈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슐리펜은 프랑스를 공격하기 가장 좋은 통로로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 있는 벨기에 축선을 꼽았다. 벨기에는 저지대인지라 대부대가 기동하는 데 좋기 때문이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엔 숲과 산악지대가 많아 대부대가 기동하는 데 불리했다. 또 벨기에는 중립국인지라 프랑스는 벨기에와 접한 국경선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지 않은 것도 이유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슐리펜 계획은 의외의 복병을 만나 실패했다. 첫째 복병은 벨기에의 저항이 대단했던 것이고, 둘째 복병은 영국군의 참전이었다. 독일은 영국이 프랑스를 도와 참전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프랑스보다 센 영국이 참전했으니 사태가 꼬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침공이 여의치 않자 러시아를 향한 동부전선 공격도 지지부진해졌다. 그 결과 독일은 지루한 참호전을 거듭하다 국력이 소진되면서 패배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독일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독일의 재침에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독일 공격에 대비하려면 독-불 국경에 강력한 방어선을 건설해야 한다. 프랑스의 육군장관인 마지노(1877~1932)는 독일군의 재침을 막기 위해 벨기에에서 스위스 사이의 독-불 국경선에 지형지물을 이용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마지노선(線)’다. 프랑스는 독일군이 침공해온다면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벨기에 축선을 이용할 것으로 보았다.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이 임박했을 때 프랑스는 큰 원군을 얻었다. 영국이 대군을 파병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한국과 일본 이상으로 ‘아옹다옹’하는 사이인데 왜 영국은 연거푸 프랑스를 도와준 것일까. 여기엔 영국만 아는 남모르는 사연이 있다. 네덜란드 건드리면 자동 참전하는 영국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한다는 것은 벨기에 북동쪽에 있는 네덜란드도 지배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네덜란드에는 로테르담 등 세계적인 항구가 있는데, 과거에도 네덜란드에는 항구가 많았다. 해양문화가 발달한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아주 쉽게 영국으로 배를 띄울 수 있다. 이러한 네덜란드 지역을, 영국을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큰 정부가 장악하면 영국은 심각한 안보 위협을 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네덜란드는 중립국가였으므로 영국은 네덜란드부터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유럽 제패를 꿈꾸는 독일이 점령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네덜란드를 점령한 독일이 해군력을 동원해 영국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88년 영국은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상대로 국운을 건 일전을 벌였는데, 이때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을 장악한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다(스페인령 네덜란드). 이때 영국함대를 이끌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궤멸시킨 인물이 해적 출신인 드레이크다. 드레이크의 승리로 영국은 스페인을 제치고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를 제패하는 패권국가로 떠올랐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이끌던 1803년 영국은 또 한 차례 유사한 위기를 맞았다. 네덜란드 지역을 차지한 나폴레옹이 해군을 동원해 영국 정벌을 준비한 것이다. 이에 영국에서는 넬슨 제독 지휘로 응전했는데, 넬슨은 스페인의 트라팔가 앞바다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이러한 경험이 있어 영국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점령하려는 나라가 있으면 바로 선전포고를 하고 일전에 들어간다.
프랑스군 후퇴보다 빨랐던 로멜의 돌격 영불연합군은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벨기에 쪽으로 독일군을 보낼 것으로 판단하고 그곳으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벨기에의 동쪽엔 자그마한 내륙국가인 룩셈부르크가 있는데, 룩셈부르크와 국경을 접한 프랑스의 아르덴 주(州)는 우거진 숲이 있는 해발 350~500m의 고원지대다. 그때까지 절대 다수의 전략가는 기동부대는 아르덴 숲을 통과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육군의 만슈타인만은 “아르덴 숲으로 기동부대를 통과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즉각 “만슈타인 주장대로 작전계획을 바꾸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독일은 벨기에 축선으로 돌격한 과거의 슐리펜 계획을 버리고 룩셈부르크-아르덴 지역을 돌파하는 만슈타인 계획을 채택했다. 그러나 영불연합군은 아르덴 숲으로는 기동부대가 들어올 수 없다고 믿고, 벨기에의 ‘브레다’란 도시로 집결했다. 고정관념만큼 위험한 적은 없다. 세계적인 승리는 대개 고정관념을 깨는 형태로 이뤄졌는데, 고정관념을 깨는 동인(動因)이 바로 기동이다. 아프리카 북부(지금의 리비아)에 있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이베리아 반도로 상륙한 다음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쳐들어갔다. 로마는 카르타고군이 알프스를 넘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바다(지중해)만 바라보고 있던 로마는 뒤에서 나타난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 기습에 놀라 16년을 쩔쩔매다, 스키피오가 자마대전(大戰)에서 코끼리 부대를 격멸함으로써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폴레옹도 예상치 못한 통로로 부대를 기동시킨 지휘관이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산맥을 통과할 때,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며 병사들을 독려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알프스 산맥을 넘은 나폴레옹군은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내친김에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쳐들어가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1797년), 유럽 패권을 장악했다. 예상치 못한 곳으로 기동부대를 투입한다는 교훈을 1940년의 나폴레옹 후예들은 완전히 망각했다. 나폴레옹의 교훈을 되살린 것은 신성로마제국(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후예다)의 후손인 만슈타인이었다. 1940년 구데리안이 이끄는 독일군 기갑부대는 숲으로 둘러싸인 아르덴 고원을 은밀히 돌파했다. 그리고 브레다에 집결해 정면에서 다가오는 독일군과 일전을 벌이는 영불연합군을 뒤에서 공격해 일거에 혼란에 빠뜨렸다. 독일군이 협공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영불연합군은 해안으로 도주했다. 대서양 연안의 프랑스 도시인 덩커크에서 영국이 보낸 함정이 이들을 구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덩커크 철수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연합군이 당한 최대의 패전이었다. 덩커크 철수는 6월5일 끝났는데, 이로써 독일은 5월10일 시작한 벨기에 작전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덩커크 철수가 이뤄지는 동안 독-불 국경선의 프랑스군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독일군이 적은 병력을 동원해 속임수 공격을 계속했기 때문이었다. 파리를 향한 공격도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주도했는데 이때 최선봉에 섰던 부대가 로멜이 이끄는 7기갑사단이었다. 로멜 부대는 벨기에 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하는 프랑스군보다 떠 빨리 진격했다. 진격 도중 프랑스군과 조우해도 그는 이들의 무장을 빼앗거나 항복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그냥 파리로 내달렸다. 로멜의 돌격 덕분에 독일군은 벨기에 출발 9일 후 파리에 무혈 입성했다.
르클레르의 활약 세계 최강의 육군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던 프랑스가 열흘도 못 돼 독일군에 수도를 빼앗기자 전격전과 독일 판저(전차) 부대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다. 전격전과 독일 전차부대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전차는 영국에서 개발됐지만, 전차를 이용한 전격전은 독일에서 꽃피웠으니 영국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하여 기동전력 육성에 전력을 기울여 영국식 기동전의 대가인 몽고메리를 낳았다. 몽고메리는 1942년 북부 아프리카에서 독일 기갑군단을 이끈 로멜을 상대하게 되었다. 몽고메리는 방어전을 거듭하다, 영국군 전력이 독일군을 능가하게 되자 비로소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 기갑군단을 공격해 승리를 이끌었다. ‘사막의 여우(로멜)’를 잡은 몽고메리에게는 ‘사막의 생쥐’란 별명이 붙었다
질적 우세 무너뜨리는 양적 열세 논두렁을 오르는 순간 전차 포신은 하늘을 향한다. 전차의 포신은 지면과 나란한 수평각 이하로는 내려오지 못하므로, 이러한 전차는 전방에 있는 상대 전차를 쏠 수가 없다. 반면 상대 전차는 장갑이 약한 아군 전차의 바닥을 향해 결정타를 날릴 수 있다. 전차 포신이 하늘을 향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무논에서 맴돌 수도 있다. 그러나 맴돌기는 상대에게 목표물이 돼주는 행위가 된다. 한반도는 도처에 전차가 은신하기 좋은 산과 언덕이 있다. 성능이 떨어지는 전차일지라도 산과 언덕에 숨어 있다가 근거리 사격을 하면 성능 좋은 적 전차도 한순간에 깨질 수 있다. 한반도의 자연조건은 성능 좋은 전차라고 하여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2006년 ‘국방백서’는 북한군이 보유한 전차는 3700여 대이고 한국군이 보유한 전차는 2300여 대로, 북한이 한국보다 1400여 대 많다고 밝히고 있다. 전차 대수에서는 한국이 38대 62의 비율로 열세다. 한국군 전차의 성능이 아무리 우수해도 38대 62라는 양적 열세를 가볍게 돌파할 정도로 우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은 6·25전쟁의 경험 때문에 전차 전력 육성에 노력해왔다. 북한 경제력이 무너졌다고 해도 북한 전차는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서 전략가들은 한국은 전차 대수의 증강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99대 98로 끝난 농구시합에서는 패자(敗者)도 최선을 다했다는 박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은 이종 격투기와 같아서 약간의 우세가 섬멸을, 약간의 열세가 전멸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부족한 전차 전력을 메워준 것이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이었다. 주한미 8군은 상대 전차를 잡는 공격헬기로 무장한 항공여단을, 주한미 2사단은 기갑여단과 항공여단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유사시 미국은 수많은 전차를 한국에 보낸다는 작전계획 5027을 갖고 있었기에, 한국은 부족한 전차 전력을 상쇄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이 전차의 운용술이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내가 죽으면 상대를 공격할 수 없으므로 전투는 그야말로 ‘아생연후(我生然後)에 살타(殺他)’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장기 시합은 아무리 많은 말이 살아남아도, ‘한(漢)’이나 ‘초(楚)’ 같은 장이 떨어지면 패배한다. 따라서 본격적인 공격을 하기 전, 장을 보호하는 ‘궁’을 짜는 경우가 많다.
오방진(五方陣)과 오각편제 포(咆)를 뒤로 빼내고 사(士)의 위치를 바꿔 장을 보호할 궁을 짜는 것이 전투에서는 진(陣)을 짜는 것에 해당한다. 장기는 ‘장기판’이라고 하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싸우나, 전투에는 이러한 제한이 없다. 장기판의 장과 사는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나, 전투사령부는 제한 없이 이동할 수 있다. 전장에 나간 지휘관은 언제 어느 곳에서 상대가 기습해 오더라도 유생역량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전투는 아생연후, 즉 방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반적인 방어는, 기동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산이나 강 같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실시한다. 지형지물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진법은 지형지물이 없는 완전 평지를 상정해 방어에 가장 유리한 형태가 무엇인지 찾는 것에서부터 발전했다. 완전 평지에서 방어하기 좋은 형태의 진을 개발한 후, 이 원형을 그때그때 주변상황에 맞춰 변형하는 것으로 진법은 발전해온 것이다. 동서양의 병법가들은 오래 전부터 완전 평지에서 방어하기 가장 좋은 진으로 ‘오방진(五方陣)’을 꼽아왔다. 여기서 방(方)은 사각형을 뜻하므로 오방진이란 말은 나올 수 없다. 오방진이란 용어가 생긴 것엔 까닭이 있다. 오방진은 사각형의 꼭짓점에 해당하는 곳에 부대를 배치하고(四方陣), 사각형의 가운데에 또 하나의 부대를 배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사방 어느 곳에서 적이 쳐들어와도 2~4개 부대로 대응할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적이 꼭짓점으로 쳐들어오면 꼭짓점에 있던 부대로 일차 대응하고, 좌우 꼭짓점에 있던 부대가 지원한다. 그래도 전력이 달리면 가운데 있던 부대가 출동해 지원한다. 적이 양 꼭짓점 사이로 쳐들어오면 양 꼭짓점에 있던 부대가 막아서고, 이어 중앙에 있던 부대가 출동해 지원한다. 적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쳐들어오면 네 꼭짓점에 있던 부대가 모두 대응하고, 중앙에 있던 부대는 그중 약한 곳을 돌아다니며 지원하는 기동방어를 한다. 오방진을 택하지 않고 6각진, 7각진 혹은 원진(圓陣)을 채택하면 보다 넓게 방어망을 구축해,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벨기에 축선을 선택해 집중 공격한 독일군처럼 어느 한쪽으로만 쳐들어오면, 오방진보다는 적은 병력으로 방어에 나서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삼각형으로 진을 짜고 중앙에 기동 방어부대를 두는 3각진은, 아군의 활동 공간이 협소해진다는 약점이 있다. 일자진(一字陣)은 정면에서 오는 적을 막는 데는 매우 유리하나 후방이나 측면에서 오는 적은 막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5개 여단으로 구성된 기갑군단 오방진은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에도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군이 공격하면 적군은 아군이 접근해올 것으로 예상되는 통로에 일부 부대를 매복시킨 후 아군을 통과시킬 수 있다. 그리고 아군을 정면에서 막아서 앞뒤에서 포위 공격한다. 이러한 포위전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구조가 오방진이다. 전차는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두꺼운 장갑을 쓰고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화력과 기동력을 갖췄으므로, 공격과 방어를 일원화한 무기로 꼽힌다. 공격과 방어를 일원화한 전차와 공격과 방어를 일원화한 오방진이 만나 탄생한 것이 현대 육군의 5각체제다. 5각체제, 또는 5각편제는 한 사령관이 5개 부대를 지휘하는 구조다. 지금의 한국 사단은 3개 연대로 구성되고, 연대는 3개 대대, 대대는 3개 중대, 중대는 3개(또는 4개) 소대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3각편제를 택하고 있다. 3각편제는 2개 부대를 앞으로 보내 싸우게 하고 1개 부대는 약한 쪽을 지원하는 예비대 임무를 맡기는 구조다. 이러한 편제는 전방 작전에만 진력하는 ‘두터운 일자진(一字陣)’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부대는 후방과 측면 공격에 취약하므로 공격할 때는 일자진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상대가 일자진을 뚫고 후방으로 침투해 포위 공격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동부대는 이러한 선을 만들지 않는다. 기동부대는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구데리안 부대, 파리로 진격한 로멜의 기갑사단처럼 고립을 자초하며 적진으로 뛰어들어간다. 따라서 산지사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도록 5방진 체제, 즉 5각체제를 갖추는 것이 좋다. 5각체제의 사단은 5각연대-5각대대-5각중대-5각소대로 구성되니 5×5×5×5=625개 소대를 갖는다. 반면 3각 체제의 사단은 3×3×3×3=81개의 소대를 보유하니, 5각체제의 사단은 3각편제의 사단보다 일곱 배 이상 크다. 때문에 5각편제의 사단은 ‘군단’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5각편제의 연대는 3각편제 사단보다 많은 5×5×5=125개의 소대를 가지므로 ‘여단’으로 부른다. 5각편제 군단라고 해서 모든 것을 5각으로 할 수는 없다. 대대 이하는 3각으로 편제해서 일반 사단보다 약간 큰 3×3×3×5=135개의 소대를 갖는 경우가 많다. 기갑부대는 군단으로 편제하는 것이 좋다. 북한은 5개 여단으로 편성된 820전차 군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기갑군단을 갖고 있지 않다. 한국 육군은 전차부대를 보병부대 지원용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한국군은 7군단 등 5개 기계화보병사단을 갖고 있으나 이 부대는 기갑군단 대용이 되지 못한다. 기계화보병사단의 주력은 장갑차다. 장갑차는 보병 수송이 주목적이라 전차만큼 장갑이 두껍지 않다. 주포도 전차에 비해 현저히 작은 편이다. 장갑차는 상대 전차의 공격을 받으면 한순간에 찢어지지만, 장갑차의 화력은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없다. 한국군의 전차 대수가 북한군에 비해 38대 62의 비율로 열세인 것은 바로 5각 편제의 기갑군단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시급한 기갑군단 창설 물론 한국은 전차 생산업체인 (주)로템으로 하여금 생산 설비를 확충해 전차 생산량을 늘리라고 하면, 단시간 내에 1400여 대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엔, 수명이 다해 도태하는 전차를 대체하는 물량이 들어올 때까지 로템은 일감을 잡지 못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 육군은 기갑군단은 차치하고 기갑사단이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주)로템이 적정한 수준으로 XK-2 등 우수한 전차를 생산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갑사단을 만들려면 보병사단 해체를 결심해야 한다. 장비가 많은 기갑사단은 보병사단보다 자산 규모가 훨씬 크므로 기갑사단을 만들려면 육군은 두 개 이상의 보병사단을 해체해야 할 것이다. 한국군이 효과중심작전에 눈을 돌렸다는 것은 육해공군의 기동부대를 육성할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뜻이다. 육군의 기갑군단, 해군의 기동함대, 해병대의 공지(空地)기동부대, 공군의 원정군(遠征軍)은 각군을 대표하는 기동부대다. 이러한 부대를 갖추면 한국은 유사시에는 한국을 방어할 수 있고, 평화시에는 상대를 억제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사람들은 평화시에 왜 군비를 증강하느냐고 묻는데 평화를 보장하는 억제는, 군비 증강을 통해 형성된다. 억제를 통한 평화유지는 군비 증강뿐만 아니라 동맹을 통해서도 강화될 수 있다. 가장 강력한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에는 평화를 유지하는 지름길이다. 한국이 기갑사단이나 군단을 갖는다면 북한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해군력과 공군력에 이어 육군 전력에서도 균형이 무너지면, 북한 실세들 사이에서는 한국과의 대결을 회피하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일부는 심리적인 투항을 하는 모순이 일어난다. 이러한 모순이 커지는 순간이 바로 ‘북한 급변(急變)’ 사태다. 어설픈 핵과 미사일을 갖고 있지만 무너진 경제력을 재건하지 못하면, 북한의 모순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이러한 모순이 구식이긴 하지만 엄청난 전쟁 물자를 비축한 북한에서 폭동으로 확대된다면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는 심각한 안보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내란에 참여한 세력은 각자 입맛에 따라 주변국에 도움을 청할 것이므로, 주변국들은 북한 추이는 물론이고 다른 주변국들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이 위기는 누군가가 북한에 들어가 치안을 잡아야 풀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은 침략으로 이해돼 북한 주민들로부터 거센 항전을 받을 수 있다. 좋은 사례가 아프간과 이라크다. 아프간은 소련군이 들어왔을 때는 물론이고 미군이 들어온 지금도 결사 항전을 거듭하고 있다. 미군은 군사적으로는 50여 일 만에 이라크를 접수했지만 이라크를 안정화하는 민정작전에 실패해 고전을 하고 있다. 북한의 치안을 회복하려면 북한 주민들이 항전 의식을 갖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 내전을 종식시킬 군사력과 북한 주민의 항전의식을 불식시킬 매력을 동시에 갖춘 나라는 어디일까. 한반도는 어느 한 외세가 개입하면 다른 외세도 개입하는 곳이다. 만에 하나 한국이 ‘동맹을 활용’하는 차원에서 미국과 함께 북한 급변사태에 대처하겠다고 하면,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이 개입했으니 자국도 해야 한다며 바로 개입할 수 있다. 때문에 한반도 통일 문제에 천착해온 전략가들은 한국은 단독으로 북한 문제에 개입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이 미국을 이끌고 북한 급변사태에 개입하는 것은 전시에만 가동하는 한미연합사를 앞세우는 것이니 주변국에게 ‘전시’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평시작전권을 가진 합참 주도로 단독 개입하면 ‘평시’로 이해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이 단독으로 북한 문제에 개입할 때 가장 염려해야 하는 것은 중국의 대응이다. 전략가들은 이 문제는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과 중국은 1992년 8월24일,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하는 것으로 과거사 문제는 덮고 바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수교 공동성명은 한중 관계를 규율하는 기본이다. 이 성명에는 ‘양국은 상대의 주권을 존중하고 상대의 영토를 인정하며, 상호 불가침을 하고 상호간 내정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일한 중국 정부이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과 더불어 ‘중화인민공화국은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과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있다.
중국, 한반도 평화적 통일 지지 여기서 주목할 것이 ‘중국은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한 부분이다. 이 문구대로라면 한국이 외세를 동원하지 않고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평시 상태에서 북한과 통일한다면 중국은 지지해야만 한다. 2003년 한국에서는 북한 급변사태 때 한미연합군이 개입하는 작전계획 5029가 밝혀져 논란에 휩싸였다. 이 작전계획은 김영상 대통령-김동진 합참의장 시절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계획은 작성 단계에서부터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첫째 이유는 한미연합사는 북한군이 공격을 한 전시에만 합법적으로 가동할 수 있다는 분석에서 나왔다. 한미연합사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탄생했는데,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이 공격을 받았을 때에만 한미 양국이 군사적으로 대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 급변사태는 북한이 전쟁을 도발한 것이 아니므로 한미 연합사가 이를 상정해 작전계획을 세우는 것은 법적 타당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연합사가 북한 급변사태에 개입하면 중국은 한미 양국이 전시를 만들었다고 보고, 북한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들은 북한 급변사태는 합참 주도로 한국군이 단독으로 개입하고 미국은 방패막이가 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동북아에서 한반도를 경영하는 정부의 비중은, 유럽 대륙에서 독일을 경영하는 정부의 비중만큼 무겁지 못하다. 한국의 비중은 차라리 네덜란드에 가까운 편이다. 독일과 영국과 프랑스에 둘러싸인 네덜란드가 인접한 소국인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통일을 이루려 한다면 세 강국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세 강국은 네덜란드가 자력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세 강국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다짐을 하며 아주 빠른 시간에 통일을 해야 마지못해 그 통일을 인정할 것이다. 1990년 독일은 외세 개입 없이 통일을 이루었다. 당시의 콜 정부는 미-독 공조를 중요시했지만 통일 과정에는 미국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미국을 끌여들었다면 다 쓰러져가는 소련은 어떤 형식으로든 독일 통일에 반기를 들었을 것이다. 서독은 미국을 서독을 지원하는 중요한 후원세력으로 둠으로써, 영국과 프랑스도 독일 통일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독일 통일은 서독군이 아주 빠르게 동독에 진주해 단기간 내에 동독군의 무장을 해제시켰기에 가능했다. 민주적인 절차로 이뤄지는 통일일지라도 무장한 세력이 반기를 들면 복잡해지는데, 독일은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았다. 북핵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6자회담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쪽으로 범위를 넓히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남북한을 뺀 4개국이 한반도 재통일을 논의하는 상태에서, 북한 급변상태가 발생하면 4개국이 모두 개입해 한국 주도의 통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은 6자회담은 북핵 문제 해결에 국한시키고 전체 한반도 문제는 남북한이 주도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북핵 문제를 놓고 6개국이 치열한 신경전을 펼치는 와중에 북한에서 한국과 합병을 바라는 외침과 이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충돌하고, 이 충돌이 점점 커져 희생자가 속출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한국군은 평화유지 활동을 위한 북한 진주를 결정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사전에 주변국들에 북한 치안 문제는 민족 내부의 일이니 한국이 단독으로 대처하겠다는 통보를 해 양해를 얻고 행동을 개시한다. 그리고 막 창설된 한국군 기갑군단에 지뢰가 제거된 경의축선을 따라 10시간 내에 200km 떨어진 평양을 접수해 치안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동시에 공지(空地) 기동부대인 해병대는 원산으로 상륙해 같은 임무를 수행하라는 지시가 내려간다. 평양을 접수한 기갑군단은 곧 북한 수뇌부를 통해 무장해제를 하는 한국군에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 순간 한국군 보병사단이 DMZ를 넘어가 북한군을 무장해제시킨다. 이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쯤 한국은 대규모 대북 원조를 단행해 북한의 기아(飢餓)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한국과의 합병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통일을 이룬다. 꿈같은 가정이지만 이러한 일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들의 것이다. 한국은 자기 방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기갑군단을 가져야 한다. 과연 한국은 10시간 내에 평양을 점령할 기갑군단을 단기간 내에 창설할 수 있을 것인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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