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전선생 풍수기행] 당대의 巨富배출된 명당은 이런 곳…아래 매월마을
[봉전선생 풍수기행]<1> 프롤로그와 五萬石지기 태어난 매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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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明堂)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풍수지리학의 신비스런 이치로 밖에 설명 할 수 밖에 없는 명당대지(明堂大地)에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코 명당은 존재한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광주시내에서도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광주시 서구 매월동에 수려하게 솟아 있는 개금산(蓋金山) 밑에 자리한 회재(懷齎) 선생의 생가터가 바로 당대(當代) 5만석(五萬石) 꾼을 낳은 명당이다. 필자가 한창 풍수지리의 오묘한 이치에 흠뻑 빠져 그 진실여부를 밝혀 본답시고 이곳 저곳을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30대 후반쯤으로 기억되는 어느날, 개금산의 수려함에 홀려서 한 시간여를 걸어 당도한 곳이 바로 개금산 아래의 매월마을이었다. 풍수지리학의 이치대로라면 이 마을 어디엔가 몇 만석꾼 정도의 큰 부자가 났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 마을의 촌장격(村長格)이 될 만한 어르신(현재도 생존에 있음)을 찾아 뵈었다. 그 어른은 朴氏(忠州 朴氏)姓을 가진 사람으로 매월마을에서 오랜 세월 살아 오고 있는 터였다. 때마침 툇마루에 앉아 산서(山書·풍수지리학에 관한 서적)를 보고 있었기에 반가운 마음과 한편으론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드린 후, 예의 궁금증에 대한 질문을 드렸다. 그 어른은 “그렇다오. 이 마을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때쯤인가 5만석꾼이 나왔다는데 그 분이 바로 음성 박씨(陰城 朴氏)인 회재 선생이었다오”라고 답을 주었다. 이어서 그 어른은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궐같이 컸다는 그 부잣집은 전란통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여기저기서 나오는 기왓장 조각만이 그 때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오”라고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필자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후룡(後龍-집터나 묘터의 뒷쪽에 솟아 있는 산봉우리, 즉 주산(主山)에서 발달한 산맥을 의미함)이 특립특출(特立特出)하면 큰 인물이 태어나는 명담임을 예고한다고 하지만 풍수지리학의 원리가 이토록 맞아 떨어질 수 있다니…’ 그저 놀라고 놀랄 따름이었다.
화산(花山)마을(광주시 동구 소태동- 다음회에 소개)의 신비함을 확인한지 1년이 지나 찾아간 매월마을에서의 이런 성과는 풍수지리의 신비함을 또 다시 확인한 터라 경탄과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을 정도였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후에 확인한 일이지만 당대의 거부(巨富)가 된 회재 선생은 광주시사(光州市史)에도 그 업적이 기록될 만큼 그 많은 재산을 자신만을 위해 쓰지 않고 군량미로 쾌척하는 등 나라와 이웃을 위해 사용했던 청부(淸富)로서의 본을 보인 명사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재벌을 비롯한 있는 사람들이 회재 선생의 본을 받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른바 축재보다는 용재(用財)를 실천한 사람이 회재선생이었던 것이다. 회재 선생의 이런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금의 풍암지구로 통하는 6차선도로를 ‘회재로’라고 명명하고 있다. 회재 선생은 매월마을앞에 저수지를 만들어 이웃들이 가뭄에도 걱정없이 농사 짓도록 배려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역시 회재 선생의 따뜻한 이웃사랑 실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이 저수지는 현재 ‘전평제’로 불리고 있는데 서구청이 이 곳에 나무도 심고 편익시설을 설치한 후 시민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400여년전에 만들어진 전평제가 당시에는 물 걱정을 덜어주고 요즘와선 시민들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앞으로 회를 거듭할수록 숱하게 제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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