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수려한 산세에 기운 서려“판·검사 족히 서넛은…”
<2> 양택의 길지 화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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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택(陽宅·집터)의 길지(吉地)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다음회(3회)에서 소상하게 언급하겠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필자의 선친은 쌍둥이 39쌍이 나온 당시의 집터가 싫은데다 양택으로서의 아쉬운 점이 있다고 판단한 나머지 구례땅 일우(一隅)에 또 다른 명당(明堂)의 집터(다섯마리의 鳳이 집을 찾아가는 형국의 집터)를 구해 정착했다. 이후 선친은 5남5녀를 두었을 만큼 대가족을 이루었다. 사형(舍兄)을 포함한 필자와 동생은 초등학교에서 교직의 길을 걸었다. 다음 기회에 다섯마리의 봉이 집을 찾아가는 형국의 집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으므로 이번회에서는 생략한다.
1960년대말 무렵 필자가 평교사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경쟁률이 매우 심했던 광주시내(光州市內) N초등학교로 전근와 도시교육에 적응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1968년 3월이었고 필자 나이 32세때였다. 광주로 전근해온 필자는 부임 첫해에 3학년 2반 담임이 되면서 당시 필수과정인 가정방문길에 나섰다. 당시만해도 시골길을 돌고 돌아 산골 깊히 자리한 아주 작은 마을을 찾았다.그런데 그 마을 어귀에 다달은 필자는 마을의 윗산의 수려함과 빼어난 봉우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정방문의 본디 목적을 순간 잊어버린 채 수봉(秀峰)으로 솟아 오른 그 산세(山勢)에 정신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예의 풍수지리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된 것이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작은 마을이지만 정녕 이 마을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이 배출됐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가설적인 확신을 가졌다. 가정방문보다 이런 상상에 더 정신이 팔려 스스로 우습기도 했지만 당시엔 어느 곳을 가든지 그렇듯 턱없는 호기심과 풍수지리학적인 예상을 버릇처럼 하곤 했다. 1960년대만 해도 교사가 시골마을에 가정방문을 하면 교사 주위에 어린 제자들이 몰려 들었고 마을 이장도 동구밖까지 나와 반겨주던 그런 낭만이 있었다. 마을로 안내 하려던 이장을 붙잡고 “이장님 이 마을에서 판·검사급 인물이 족히 서넛명은 나왔지요”라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그 시절 판·검사정도가 배출돼야 인물이 난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이장은 때아닌 질문에 “아니 우리마을에 대해 어찌 그리 잘아는지 궁금하다”고 오히려 되묻는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경망스럽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말 그대로 기고만장해진 채로 “이장님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이 마을에서 그 정도의 인물이 배출된 것이…”라고 또다시 다그쳐 물었다. 이에 대해 이장은 “선생님 말처럼 이 마을은 비록 8~9세대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사시(司試) 합격자가 4명이나 배출됐다”고 확인해 줬다. 가정방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그리고 그 다음에도 시안(試眼)이라고 할 것 까지는 아니어도 호기심반 확신반 정도로 풍수지리에 대한 이치를 현장에서 확인하곤 한다. 당시 어설픈 시도에서 나온 질문이, 틀림없는 사실로 드러나자 필자는 놀라움을 넘어섰으며 남들이 비웃거나, 이상하게 여겨도 풍수지리학을 진지한 관심거리와 진지한 연구과제로 삼아야겠다는 의지를 되새겼다. 몇 해가 지난뒤에도 예의 그 마을을 다시 찾아가 두루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마을 가운데를 굽이쳐 흐르던 도랑은 복개돼 도로로 변했다. 현대식으로 단장한 집들이 더 많이 들어서 그 마을은 처음 본 것 처럼 큰 규모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김모 검사의 집과 모 변호사의 집만 나이많은 부모들이 지키고 있을 뿐(근래 들었더니 그 부모들은 현재 타개했다고 함) 외지인들이 이사와서 그 터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확인한 사실이지만 중장(中將)으로 예편한 모 인사가 빨간 양옥집을 신축해 살고 있었다. 그동안의 망설임을 무릅쓰고 이제까지 익명으로 소개했던 그 마을의 소재를 밝히고자 한다. 왜냐 하면 그 작은 마을에서 왜 그토록 많은 인물들이 배출됐는가를 풍수지리학의 관점에서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은 까닭이다. 행정구역상으론 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해 있는 화산마을이다. 광주대에서 제2순환도로를 타고 화순방면의 나들목이 나오기전 오른쪽으로 올려다 보면 빼어난 산봉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산이 곧 노적봉이고 그 건너편, 손에 잡힐듯이 가까운 산이 화산(花山·꽃봉우리 같은 모양의 산)이다. 그래서 이 마을 이름도 화산마을이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산마을을 형성시키기 위해 우뚝솟은 노적봉은 그 본원(本源)이 무등산으로부터 비롯된다. 무등산은 광주·전남지역 모든 산의 발원처(發源處·처음 시작되는 태조산)가 되는 조종산(祖宗山)이다. 다만 곡성군 옥과면의 뒷쪽 산맥인 설산(雪山)으로부터 발달한 큰 산줄기(幹龍脈)가 호남고속도로에서 크게 비룡(飛龍·산맥이 치솟아 오름)한 연후에 한 줄기 큰 산맥은 만덕산을 거쳐 무등산을 일으켜 세우지만, 그 중 한 줄기의 큰 산줄기는 화순군 북면에 소재한 백아산을 거쳐 곡성군 통명산(通明山 해발 745고지)을 세운 뒤 곡성군 일대 섬진강 서쪽과 서남쪽으로 연이어 지지만, 무등산의 큰 산봉우리는 전남·광주의 모든 산을 통솔하는 태조산(太祖山·한 지역의 산봉과 산맥이 시작되는 모태적인 산)의 위용을 떨치고 있다. 그 무등산의 한 줄기 산맥이 구비구비 꿈틀 꿈틀 생기있게 돌고 돌아서 화순과 광주 경계인 너릿재를 돌아 지원동 목동마을의 우산인 분적산을 세운 뒤 낙맥(落脈·산맥이 비탈을 이루며 내리쏟은 상태), 비룡(飛龍), 좌우로 뱀장어가 헤엄치 듯 흔들면서 전진 등을 거듭하다가 이내 치솟아 올라 수려하면서도 힘차게 솟아오르는 노적봉을 만들었다. 그 양 옆으로 노적봉으로 이어진 중심산맥을 옹호하는 산맥이 있으니 그 한줄기가 화산에서 노적봉을 옹위하며 멈춰섰다. 화산마을에서 노적봉을 바라보고 오른쪽(화산마을에서는 靑龍에 해당)에는 또 다른 산맥이 호종(護從·같이 따라오며 옹호함)하는 산맥이 있으니, 노적봉에 모아진 땅의 기운(地氣)이 예사롭지 않게 서리어 있는 까닭에 큰 인물들을 배출한 것이다. 이는 풍수지리학적 접근 방법일 뿐이다. 현대적인 해석을 곁들이자면 작은 마을이지만 한 집안에서 사시에 합격하자 그 영향을 받은 동네 후배들도 열심히 노력해 연이어 사시합격자가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역시 길지에 자리한 집안에선 3성 장군까지 배출했다. 양택의 길지인 화산마을이 공부(면학)하는 분위기가 더해져 훌륭한 인물을 배출했다는 얘기다. 자식 교육에 열성을 쏟아 부은 부모들의 노력도 인재배출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여염집만 해도 큰 형이 열심히 노력해 일류대학에 가고, 고시에 합격하면 동생들도 형의 그런 영향을 받아 열심히 공부하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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