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蓮花浮水形’쌍봉 기운받아 무려 39쌍 태어나
[풍수기행]<3> 여수 현천리 쌍둥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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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풍수지리학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어쩌면 운명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풍수지리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다.
필자가 태어난 곳은 요즘 관광지로 유명한 구례땅 섬진강변의 일우라는 농촌마을이다. 하지만 선고(先考·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은, 그러니까 필자의 본향(本鄕)은 여수시 소라면 현천리 중촌마을이다.
그 곳은 필자로 해서 8代祖부터 자리잡고 200년 넘게 살아온 鄭家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이 마을은 1970년대 중반 무렵부터 쌍둥이 마을로 유명해졌다. 본향이자 조상 대대로 살아 온 땅이 바로 39쌍의 쌍둥이가 태어나 중앙방송 매체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따라서 필자가 풍수지리학에 관심을 두게된 인연으로 연결된 셈이다.
7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된다. KBS 중앙방송의 저녁 9시뉴스에 느닷없이 쌍둥이 마을이 소개됐다. 그 뒤 시청자의 요청에 의해 또 한번 방송이 되면서 현천리는 전 국민의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됐고, 결국 세계적인 진기록으로 인정받아 기네스북에 오르게 될 만큼 유명해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종가(宗家)의 마을이지만 자주 현천리에 들리지 못했다. 그저 쌍둥이가 많이 태어난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 그토록 전국의 톱 뉴스거리가 될 줄은 전혀 모른채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세계적인 진기록이 될 만큼 쌍둥이가 많이 태어난 마을을 종가로 두고 있는 인연이 바로 풍수지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에 운명적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선친이 가무내(玄川) 종가의 둘째 아들로서 호의호식한 처지인 당시의 좋은 생활을 마다하고 굳이 멀리 떨어진 구례땅 일우에 새 터를 잡아 어려운 객지생활을 택한 이유가 풍수지리학적인 조건 때문에 쌍둥이가 많이 태어났고, 그 쌍둥이터가 싫어 그 곳을 떠났다고 한다.
또 쌍둥이 마을 터가 부(富)만 있지 귀(貴)가 없는(인물이 나지 않는 터) 그 곳이 오래 살만한 양택지(陽宅地)로서도 마땅잖아 22살 약관의 나이에 이향(離鄕)한 사실을 알면서 부터 과연 풍수지리학이 미신이 아니라 그 속에 불가사의한 이치가 깃들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선친이 틈만나면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말로써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땅에서 훌륭한 인물이 난다는 것을 강조 하곤했다. 쌍둥이 마을로 유명해진 현천리 중촌 마을은 마을 어귀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샘물이 있는데 아들 딸을 못 낳아 애태운 사람들이 그 샘물을 많이 떠다가 마셨다고 한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학계에서도 쌍둥이가 많이 태어나는 원인을 규명해보자는 노력이 시작됐다. 그리고 유명하다는 지관(地官·풍수지리가)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당시 서울의 K의대에서 그와 관계된 전문학자들을 쌍둥이 마을 현지에 상주시켜 특별연구시설을 마련한 뒤 3년에 걸쳐 그 신비스런 출생의 비밀을 캐내려는 의욕적인 노력을 펼쳤다. 그렇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미완의 장을 남겨두고 철수했다고 한다.
당시 필자의 선친은 “인걸은 지령인 것을…”이라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이미 백년전에 풍수지리에 정통한 일지(一指)스님이 그 현천땅을 일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모양의 명당)의 양택길지라는 말을 남겼고, 발복(發福)과 더불어 백년쯤 지나면 큰 부자가 나고 더불어 쌍둥이가 줄을 지어 태어날 것이라고 예연을 했으니, 풍수지리학을 너무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곤 했다.
아닌게 아니라 썅둥이 마을에서는 만석꾼이 세번이나 나왔을 만큼 부촌(富村)으로도 알려졌으나 이상하리만치 귀(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고승 일지스님의 예언이 이토록 적중해 예증된 것을, 마냥 허무맹랑한 미신이나 속설로만 치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필자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으면서 풍수지리학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의지는 높아만 갔다.
쌍둥이 마을을 간산(看山·터를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자세히 살피는 것)하고 평가했던 옛 선사의 예언이 관점이나 이론적 근거없이 내킨대로 제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현재까지 풍수지리학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일지스님은 연화부수형의 양택지이니 물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 예언 또한 필자를 놀라게 한다. 왜냐 하면 쌍둥이 마을은 원래 면 소재지인 덕양으로 연결된 곳을 제외하곤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였던 반도형국의 지형적 특성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때 마을 뒷산너머의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만든뒤 부터 마을 앞 소라남초등학교 부근의 언덕까지 넘실거리던 바닷물이 끊겨 버렸다. 그 이후론 그렇게 부촌이던 마을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풍요를 누리던 옛 부자마을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됐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분명하다.
풍수지리학에서는 땅(星辰과 龍脈)과 물은 음·양의 합국(合局)으로 조화를 이루는 중요한 변인이어서 그 두 변인이 갖추어진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매우 큰 차이가 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연화부수형의 명당에만 적용되는 변수가 아니라 양택이든 음택(陰宅·죽으면 묻히는 땅)이든 산세와 수세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주요 요인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39쌍의 쌍둥이, 그도 75세대의 단위마을 중 그 가장(家長)의 향방(向方·뒷 主山을 뒤안으로 삼고 동쪽을 바라본집-山圖참고)이 같은 35세대의 집과 11개 성씨의 가정에서만 출생된 엄연한 사실을, 과학이 따라잡지 못했다고 해서 어쩌다 일어난 현상이거나 믿어서는 안될 미신으로만 치부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색하며 탐구해볼 분야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명산과 명당에 쇠말뚝을 박아버린 만행을 저질러 왔다. 그래서 이런 쇠말뚝을 제거하려는 민간단체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쌍둥이 마을도 물길을 막아 버린 일제에 의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력은 역시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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