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 ] 발복의 명혈 봉황산 후중한 자태와 기상 예사롭지 않는 명터
[풍수기행 ]<4> 西倉의 2개 양택지 (상)
빼어난 산봉우리와 이어진 산맥의 氣응축
새로 돋은 부드러운 가지서 과일맺는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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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과정에서 어느 곳은 음택(陰宅·사람이 죽어 묻히는 곳) 명당의 땅이고 또 어느 고장은 양택(사람이 현세의 삶을 누리는 곳) 명당의 터로서 더 유명해진다. 즉 생거진천(生居鎭川·살아서는 진천땅), 사후용인(死後龍仁·죽어서는 용인땅)과 같은 전설이 곧 그것을 의미해 준다.
전남지역도 그러한 전설이 고장마다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몇몇 고령층의 터주대감들 사이에서나 기억될 따름이다. 광주땅 역시 마찬가지다. 생거두암(生居斗岩·살아서는 두암땅) 사후본양(死後本良·죽어서는 본량땅)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아마 꼬두뫼라고 옛 사람들이 불렀던 그 곳에 양택 명당이 있다는데서 ‘살아서는 두암땅’이라는 말이 전설처럼 불리어졌을 것이다.
또 본량의 용진산 아래에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호남 8대 명당인 만월괘서형(滿月掛西形·보름달이 서쪽에 걸려있는 듯한 형세)이 있다고 전해진 까닭에 죽은 뒤에는 본량의 명당이 들어가고 싶은 염원에서 그런 말이 진해진다고 본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본량땅에도 주택지로서의 훌륭한 터가 존재하고, 그 양택의 길지에서 이미 상당수의 인물들이 배출되고 있다. 광주땅에서 풍수지리학의 이치대로라면 생거두암도 물론 그에 합당한 삶의 터전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생거서창(生居西倉)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지 않나 싶다.
그것은 풍수지리학의 이론에 입각해서도 상락(上落), 중락, 하락중, 그러니까 명당터를 형성하게 하는 원리에서, 그 터를 형성하는 태조산(太祖山·명당혈을 형성하게 하는 발원의 산 봉우리)의 곧장 아래의 땅(상락) 보다 더 부드러워진 중락을 거쳐 살기(殺氣)를 완전히 벗고 서기(瑞氣)로 변화돼 온후한 하락의 위치에 있는 땅이 명당으로서의 요건이 더 갖춰진 터라고 한다.
이런 이치에 비춰봐도 광주·전남의 태조산이라할 수 있는 무등산 바로 가까운 터보다는 박환(剝換·조악하고 딱딱하며 거친 산맥이 점점 아름답고 부드러워지는 과정)이 잘 돼 좋은 지기가 가득 서리어진 서창땅이 양택 명당으로 적정한 곳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과일이 해묵고 거친 원둥치의 나무보다 새로 돋아난 부드러운 가지에서 맺는 이치에 비교된다. 이는 이론뿐만 아니라 이미 태조산인 무등산의 용맥(龍脈)이 기복(起伏), 이위(꾸불꾸불 생동감 있는 움직임), 박환의 과정을 거쳐 황룡강 가까이에 자리잡은 봉황산(鳳皇山) 아래의 구룡마을과 봉학마을로 이어진다.
따라서 구룡마을에선 호남 거부인 송원그룹 고제철 회장이 배출되고 봉학마을에선 국중인물(國中人物)의 반열에 오른 김동신 전 국방부장관이 배출됐다. 또 시장 및 교육감 등 요직에 오른 인물도 많다.
고장은 물론 나라의 발전에 기여해온 인물들이 줄지어 태어났다는 사실에서도 대촌(大村)을 포함한 서창땅이 더 할 나위없는 풍수지리학적 명당 요건을 갖춘 곳임이 입증된다.
명당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하면 용진혈적(龍眞穴的·산 봉우리는 빼어나고 거기에서 이어진 산맥은 생기있게 내려와 서기가 가득히 서려 응축된 터를 적확하게 형성하는 것과 이런 곳을 어김없이 찾아내는 이치)이라고 정의하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풍수지리를 연구하고 관심을 갖는 학자는 물론이고 일반적인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 주의 주장이 십인십색(十人十色)일 만큼 서로 다르긴 하다. 그러나 용진혈적이 풍수지리학의 핵심적 원리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생거서창이라고 할 만큼 그 곳은 용진혈적의 풍수지리적 이치에 합법한 땅일까. 수년전 어느날 이른바 내로라하는 풍수연구가들이 한데 모일 기회를 가졌다. 이미 발복의 명혈로 알려진 봉황산 아래의 부귀지지(富貴之地)를 확인하기로 작정하고 이내 현지를 향해 출발했다.
우선 무등산으로 부터 발원해 내룡(來龍)한 용맥(산맥의 줄기)이 화순으로 통하는 너릿재를 돌아 광주에서는 무등산 다음으로 높다는 분적산을 일으켜 세운 용맥은 화산마을 가까운 제2 순환도로로 낙맥한 연후에 기룡(起龍)하고 화룡(산맥이 좌우로 선회함)해 금당산을 세운뒤 금당산 줄기가 절골 가까운 학산(鶴山)을 세운 다음 서남방으로 다시 회룡해서 하늘높이 치솟아 드디어 명산인 봉황산을 특립시켰다.
그런 연후에 그 중 하나의 지맥(가지쳐 나누 듯 산맥이 갈래지워 나아감)이 봉학마을로 내려앉아 토성체(土星體·봉우리가 일자형의 산)로 마무리한 뒤 꿈틀꿈틀 살아움직이는 산맥이 휘돌아 안착한 곳에 평범한 주택이 동남향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빈집이 있었다.
비어있는 그 주택지가 혈적(기를 담고 내려온 산맥이 그 기를 서리게 한 곳)이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과 믿음으로 그 마을에 오래 살아온 어른에게 물으니 “그 집이 바로 4성 장군과 국방부장관이 태어난 태자리다”고 확인해 줬다.
봉황산의 후중하면서도 빼어난 자태와 그 기상을 마무리하여 정리한 현무봉(玄武峰·집터나 묘터의 바로 뒤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서 멀리 내룡한 산맥을 따라 전해온 터에 고스란히 내려보내기 위해 뭉쳐진 취기의 산 봉우리)이 일자문성(一子文星)의 토성체로 형성된 것 모두가 예사로운 터가 아님을 증명해 준다.
새삼 명혈의 발복에 감탄하면서 그 봉황산에서 서남쪽으로 크게 낙맥해 사뿐히 내려 앉아 우선(右旋·시계바늘 반대 방향으로 호룡하는 산맥의 형세)해서 평화롭게 자리잡은 20여세대의 구룡마을에 당도해 당대 거부가 태어난 양택지를 찾아 나섰다.
#그림1중앙#
처음엔 찾아간 곳은 마을 뒷의 첫번째 만두(巒頭·낮으막한 산봉우리)의 대밭 아래 그럴싸한 고택 기와집이 송원 고 회장의 생가일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허사였다. 송원 고 회장의 생거터가 아니었기에 다시 용맥(산줄기의 맥)을 따라 양택지를 찾아 헤맨지 1시간여만에 보기에도 초라한 토담집(현재는 복원됨)을 확인해 보니 그 집이 바로 송원 고 회장의 생가였다.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산맥이 180도를 빙글돌아 다시혈을 맺어 할아버지산을 돌아보는 형세의 터)의 보기드문 명터인데다 다시한번 숨고르기(結咽·짤록한 산의 형세)를 한 산맥의 줄기가 끝마디로 치솟아(비룡) 오른뒤에 우측으로 감돌아 작혈(作穴)했으니, 삼태(차후 설명예정임)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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