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사람들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금천(錦川)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
수 백년을 흘렀을 금천의 물줄기는 예전처럼 많은 수량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의 청렴결백한 정신이 이 강을 타고 지금까지 후세의 가슴에 잔잔히 녹아 있으리라.
나주시 세지면 벽산리 금천의 상류, 그 언덕배기에 고즈넉이 자리한 정자 한 채가 조선의 큰 선비를 기리며 400여년 수령 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사이로 외롭게 서 있다.
인고의 세월을 말해주려는 것일까. 이 정자를 오르는 층층의 돌계단 틈새엔 푸르른 이끼가 한껏 돋아나 있다. 그리고 정자 주변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대나무 숲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으면 정면으로 탁 트인 드넓은 들녘이 시원하게 들어온다. 우수를 갓 넘긴 봄보리가 푸릇푸릇 돋아나 짙은 향을 발하며 세상사에 찌든 길손을 잠시 편안한 휴식처로 인도한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를 두고 한 말일까.
금천을 내려다 보며 자리한 이 정자는 인조 8년(1640년)에 건립됐으니, 무려 400여년이란 시공을 뛰어넘어 현대인과 단단한 끈을 잇고 있다.
원래 이 정자 터는 조선 세종때 호조참판을 지냈던 조 주(趙注)의 별서였다.
조 주는 1429년(세종 11년) 문과에 장원해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사리사욕이 없는 청렴근검과 공평정대로 명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말년에는 호조판서를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은퇴 후 이 마을에 거주하면서 나주 근처에 묵고 있는 시인묵객들과 어울려 시문은 논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때의 나이가 80세였다.
조 주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도 매년 동지와 정월 초하루, 그리고 성절(聖節)이 이르면 필히 나와서 망궐례(望闕禮)을 올렸다.
조 주의 일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고을에 들어올때 성문(城門) 앞에 이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렸으며, 공청(公廳)에 들어 갈 때에도 필히 걸어서 갔다.
사람들이 이유를 물으면 답하기를 ‘수령(守令)은 임금의 업무를 나누어 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성중(城中)은 수령이 소재(所在)한 곳이기 때문에 이와같이 한 것’이라고 답했다.
훗날 이 별서는 조 주가 그의 외손인 광산김씨 김운해(金運海, 호 碧流亭)에게 양여했다. 김운해는 외조부의 높은 학문과 인품을 기리기 위해 이 터에 자신의 호를 따서 1640년(인조 8년)에 벽류정을 건립해 나주근교의 선비들과 어울려 시문을 논했다.
벽류정 김운해(1577~1646)는 경남(景南)의 아들이며 조주의 외손으로 32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어가를 모시고 공주에 내려갔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서 호전(戶典)에 관한 일을 맡은 공으로 전마와 갑옷 등을 하사받았다.
벼슬은 김해부사에 이르렀다.
조주가 벽류정에게 양여한 이 정자는 훗날 광산김씨 벽류정공 종중에서 관리, 1678년(숙종 4년)과 1862년(철종 13년)중수를 거듭하여 오늘날까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벽류정은 나주에서 보기 드문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정자로 주변에 대나무와 느티나무 고목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벽류정은 단층의 팔작지붕 고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에 중제실을 갖춘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정자에는 글씨에 능한 황사 민규호(黃史 閔奎鎬)와 위당 신헌(威堂 申櫶)의 현판과 김수항(金壽恒)의 정기 등 11개의 현액(縣額)도 함께 보존돼 있어 이곳을 찾는 길손을 맞고 있다.
봄바람이 가끔씩 살랑이고 있었다. 정자 뒷편으로 병풍처럼 둘러진 대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사각이는 소리가 조선 선비들의 글읽는 소리마냥 청아하기만 하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박주하 화백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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