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만호정
신라시대 철야현이 있었던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철야 마을. 시원스레 뚫린 시멘트 포장의 농로를 따라 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덕용산 자락에 위풍당당하게 자리한 만호정(挽湖亭)이 피곤한 순례자를 반갑게 맞는다.
10여그루의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수령께나 들어 보이는 늙은 소나무가 남농 허건 화백의 가지 꺾인 노송도(老松圖)처럼 운치있는 모습으로 정자를 찾는 길손의 피로을 풀어준다.
고려시대 초기에 건립 되었다고 전해지는 만호정은 창건 당시 무송정(茂松亭)이라고 칭했으며, 그후 어느 때인가 쾌심정(快心亭)으로 개칭되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영평정(永平亭)으로 다시 명명됐다.
이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차 정자가 퇴폐(頹廢)되자 1601년(선조 35)에 중수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만호정으로 재개명,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만호정은 다른 정자와는 달리 향약(鄕約) 및 동규(洞規)를 시행하였는데 그 내용이 정사기(亭史記)와 철야대동계안(鐵冶大同契案)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정자의 규모로 보아 당시 이 곳이 얼마나 큰 마을이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만호정이 있는 철야현은 무진주의 속현으로 청해진 대사 장보고와 민애왕의 군대가 접전을 벌였던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당시 철야현은 유량이 풍부한 영산강을 끼고 있어 조수가 밀려들때면 대규모의 선단이 다닐 수 있었던 교통 요지였다.
한때 번성과 영화를 누렸던 철야현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춘추강신(春秋講信)을 이행하지 못하고 정유재란에 이르러서는 더욱 인심이 산란해 졌다.
이때 선비 향북당(向北堂) 정준일 (鄭遵一, 1547~1623)이 1600년(선조 33) 가을, 동네에 문서를 돌려 적화의 피해를 입지 않고 외진 모퉁이에 남아 있던 정자를 옮길 것을 결의했다.
그 이듬해인 1601년(선조 34) 가을, 동네사람들의 소원대로 이 정자를 현 위치로 이축 하고, 매곡(梅谷) 서몽희(徐夢曦, 1543~1607)가 영세화평(永世和平)을 기원하는 뜻에서 남평의 별호(別號)인 영평(永平)을 따서 영평정(永平亭)이라 고쳤다.
이후 정자가 퇴락하자 1774년(영조 50) 영건도유가(營建都有可) 서홍조(徐弘祖) 등이 주축이 되어 집집마다 쌀을 거두어 재원을 마련, 정자를 고치고 ‘만호정’이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
구전에는 마을 앞까지 밀려 들어오던 영산강 물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끌어 당긴다는 뜻에서 ‘만호정’이라 이름이 붙어졌다는 설도 전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과 얼이 서려있는 철야마을의 역사와 함께 수 백년을 동고동락했던 만호정, 현재 이 정자에는 나주지역의 대표적인 정자로써 서씨를 비롯 정씨· 윤씨 등 3성씨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만호정기(挽湖亭記)’ 외에도 71편의 제영시(題詠試)가 내려온다.
만호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동규 등을 논의하는 아정동각(芽亭洞閣)으로, 그 성격이 종합된 영풍정자(詠風亭子)로서는 그 규모가 개활무실형(開豁無室形) 정자이다.
특히 이 정자는 동리형성(洞里形成), 성씨세장(姓氏世庄)의 목조 정자로서 비록 여러 차례 중건, 중수과정을 거쳤으나 건축양식이 고풍스러울 뿐만 아니라 영풍정자적(詠風亭子的) 성격과 아정(芽亭)으로써 휴식적 성격 및 향약시행 등의 규범적 성격이 종합된 마을의 다기능 정자로 되어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편 만호정은 지난 92년 전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돼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
김선기
신라시대 철야현이 있었던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철야 마을. 시원스레 뚫린 시멘트 포장의 농로를 따라 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덕용산 자락에 위풍당당하게 자리한 만호정(挽湖亭)이 피곤한 순례자를 반갑게 맞는다.
10여그루의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수령께나 들어 보이는 늙은 소나무가 남농 허건 화백의 가지 꺾인 노송도(老松圖)처럼 운치있는 모습으로 정자를 찾는 길손의 피로을 풀어준다.
고려시대 초기에 건립 되었다고 전해지는 만호정은 창건 당시 무송정(茂松亭)이라고 칭했으며, 그후 어느 때인가 쾌심정(快心亭)으로 개칭되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영평정(永平亭)으로 다시 명명됐다.
이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차 정자가 퇴폐(頹廢)되자 1601년(선조 35)에 중수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만호정으로 재개명,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만호정은 다른 정자와는 달리 향약(鄕約) 및 동규(洞規)를 시행하였는데 그 내용이 정사기(亭史記)와 철야대동계안(鐵冶大同契案)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정자의 규모로 보아 당시 이 곳이 얼마나 큰 마을이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만호정이 있는 철야현은 무진주의 속현으로 청해진 대사 장보고와 민애왕의 군대가 접전을 벌였던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당시 철야현은 유량이 풍부한 영산강을 끼고 있어 조수가 밀려들때면 대규모의 선단이 다닐 수 있었던 교통 요지였다.
한때 번성과 영화를 누렸던 철야현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춘추강신(春秋講信)을 이행하지 못하고 정유재란에 이르러서는 더욱 인심이 산란해 졌다.
이때 선비 향북당(向北堂) 정준일 (鄭遵一, 1547~1623)이 1600년(선조 33) 가을, 동네에 문서를 돌려 적화의 피해를 입지 않고 외진 모퉁이에 남아 있던 정자를 옮길 것을 결의했다.
그 이듬해인 1601년(선조 34) 가을, 동네사람들의 소원대로 이 정자를 현 위치로 이축 하고, 매곡(梅谷) 서몽희(徐夢曦, 1543~1607)가 영세화평(永世和平)을 기원하는 뜻에서 남평의 별호(別號)인 영평(永平)을 따서 영평정(永平亭)이라 고쳤다.
이후 정자가 퇴락하자 1774년(영조 50) 영건도유가(營建都有可) 서홍조(徐弘祖) 등이 주축이 되어 집집마다 쌀을 거두어 재원을 마련, 정자를 고치고 ‘만호정’이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
구전에는 마을 앞까지 밀려 들어오던 영산강 물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끌어 당긴다는 뜻에서 ‘만호정’이라 이름이 붙어졌다는 설도 전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과 얼이 서려있는 철야마을의 역사와 함께 수 백년을 동고동락했던 만호정, 현재 이 정자에는 나주지역의 대표적인 정자로써 서씨를 비롯 정씨· 윤씨 등 3성씨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만호정기(挽湖亭記)’ 외에도 71편의 제영시(題詠試)가 내려온다.
만호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동규 등을 논의하는 아정동각(芽亭洞閣)으로, 그 성격이 종합된 영풍정자(詠風亭子)로서는 그 규모가 개활무실형(開豁無室形) 정자이다.
특히 이 정자는 동리형성(洞里形成), 성씨세장(姓氏世庄)의 목조 정자로서 비록 여러 차례 중건, 중수과정을 거쳤으나 건축양식이 고풍스러울 뿐만 아니라 영풍정자적(詠風亭子的) 성격과 아정(芽亭)으로써 휴식적 성격 및 향약시행 등의 규범적 성격이 종합된 마을의 다기능 정자로 되어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편 만호정은 지난 92년 전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돼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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