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38)=광양 신재 학사대

화이트보스 2009. 1. 14. 11:11

조선 중종때 정암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의 새바람을 일으켰던 호남사림의 큰 어른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1482~1536).

선생은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정치가 어지러워 민심이 흉흉해 과감한 개혁이 필요했던 시대에 태어나 ‘바른 말’하고 ‘바른 행동’을 서슴치 않아 화를 당했던 광양 출신의 대표적인 선비이다.

신재는 1482년(성종 13년) 4월 10일 광양시 봉강면에서 출생했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내린 까닭으로 이름을 ‘산두(山斗)’라 했다.

‘산(山)’자는 백두산의 정기를, ‘두(斗)’자는 북두칠성의 정기를 뜻하고 있다. 선생은 8세 때에 시문을 지어 보이는 등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의 나이 15세가 되자 ‘주자강목’ 80권을 안고 석굴에 들어가 칩거하면서 천 번을 통독해 춘추대의를 밝게 한 다음 굴속을 나왔다. 신재가 소년시절 10년 동안 공부했다는 바위굴이 지금도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굴을 ‘학사대(學士臺)’라 하는데 이 옆에는 선생과 함께 자랐을 400~500년 쯤 들어보이는 두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청청한 푸르름을 간직한 채 간간히 찾아오는 길손을 맞고 있다.

자연암굴로 이루어진 바위굴의 내부는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한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자연 우물이 있어 당시 소년 신재의 공부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다.

선생이 이 곳 학사대에서 10년을 계획하고 공부하다 8년 만에 바위굴을 나오면서 우뚝 솟은 백운산에 대한 감흥을 ‘태산압후천무북(泰山壓後天無北)’이라고 한 후 다음 구절을 잇지 못할 때 한 초동이 나타나 ‘대해당전지실남(大海當前地失南)’이라 하면서 공부를 더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자극받은 신재가 10년을 채워 학문을 완성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이 곳 석굴에서 10년 간 공부한 것을 토대로 1504년(22세) 진사에 올랐고 1513년(31세)에는 별시문과에 급제 했다. 이 후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당대의 대학자들과 사귀면서 실력을 쌓았다.

특히 그는 출신지나 조상들의 배경이 극히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문장과 덕행으로써 홍문관을 거쳐 마침내 젊고 재주있는 신하들이 임금의 특명을 받아 공부하던 호당에 올랐다.

신재는 당시 조광조 등이 주창한 도덕정치·혁신정치에 뜻을 같이하여 기존의 권력세력으로 부패양상을 보인 훈구파를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신재가 속한 신진개혁 세력은 지나치게 도학적인 언행과 급격한 개혁으로 왕의 신임을 잃고 보수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을 받게 된다.

1519년(중종 14년)기묘사화를 맞아 당시 의정부 사인으로 있던 신재는 37세의 한창 일할 나이에 화순군 동복으로 유배되고 만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했던가. 당연히 크고 어진 신재에게는 후학들이 몰려 들기 마련이다.

선생이 화순 동복에 머무는 동안 학포 양팽손을 비롯 기 준 박세희 면앙정 송 순 등과 학문으로 교유하면서 호남사림 정신의 텃밭을 일궈 나갔다.

그에게 사사한 수 많은 문하생 가운데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이 신재의 학통을 이어 받았다.

또한 선생은 유배 생활 중에 화순 적벽을 오가며 많은 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 때 그는 오늘날 관광명소로 유명한 ‘적벽’이란 이름 붙이기도 했다.

신재는 유배 15년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3년 후인 53세 되던 1536년 평생 품었던 ‘혁신 정치’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선생이 돌아가신 후인 1578년 현 광양읍 우산리에 ‘봉양사’가 세워져 그의 위패를 모셨으며 그 후 화순 동복에도 도원서원이 세워졌다. 묘소는 현재 봉강면 부저리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반골의 선비’ 신재 최산두.

그는 기묘명현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당대의 경세가요, 큰 학자며 교육자 였다.

도덕성 상실, 모함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오늘의 정치현실을 보면서 그의 450여년 전의 족적이 새삼 그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학사대를 돌아나오는 길손의 등 뒤로 꽃망울 부푼 매화가 툭툭 터지고 있었다. 마치 신재 선생의 못다 이룬 한(恨이라도 달래듯….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 박주하 화백

김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