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40)=광양 수월정

화이트보스 2009. 1. 14. 11:12


조선 선조때 광양인 정 설이 나주목사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건립한 수월정은 송강과 수은이 즐겨찾아 많은 작품을 남겼다.
가장 낮은 곳에서 있으면서도 빛을 발하는 이가 있다. 광양 출신으로 조선 선조때 나주목사를 지냈던 정 설(鄭渫)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리라.

그는 평생을 청렴결백한 공직생활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던 인물로, 만년에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정자를 짓고 지역의 선비들과 어울려 여생을 보냈다.

450여년 전 그의 행적을 더듬기 위해 매화가 뚝뚝 떨어지는 어느 봄날,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섬진나루터에 자리한 수월정(水月亭)을 찾았다.

누가 세월을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는가.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섬진강 물결 위로 수 백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듯 매화 꽃잎이 하얗게 흐르고 있었다.

섬진 마을(일명 매화마을) 초입에 고즈넉이 서 있는 수월정, 그 밑으로 섬진강의 어원을 이룬 섬진나루가 옛 전설을 간직한 채 수월정과 앙상블을 이루며 봄빛 따사로운 햇살을 맞고 있다.

이 정자는 정 설(鄭渫)이 나주목사에서 물러나 1573년에 건립됐다.

당시 당파싸움으로 호남지역으로 유배왔던 송강 정 철(1536~1593)이 이곳의 풍광과 정자의 아름다움에 반해 즉석에서 수월정기(水月亭記)란 가사를 지어 노래했다.

뿐만아니다. 선조때 형조좌랑을 지낸 수은 강항 또한 수월정 30영이란 시조 30수를 지어 이 정자를 노래 했다하니, 이곳의 풍광이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이 가리라.

송강과 강항이라는 큰 선비들의 드나듬이 있어서일까. 지금은 고풍스러운 옛 정취는 찾아볼 수 없지만 살랑이는 봄 햇살 속에 450여년이 흐른 오늘도 옛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청아하게 묻어나는 듯 하다.

송강이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노래했을 수월정기(水月亭記)를 음미해 본다.

- … … 백운산 동쪽 능선을 옥상으로 삼고 섬진강의 상류를 옥하로 삼은즉 경치에 대하여는 말할 나위 없다. 하물며 천하의 삼신산에 방장이 그 하나이니 불을 때서 밥을 지어 먹는 사람으로써 이 세상에 살아 이 산의 이름을 들은 자가 또한 드믄데, 거기서 기거하고 마시고 먹으며 아침 저녁으로 상대하니 그 즐거움이 어떠 하겠는가? 왼쪽은 영(嶺)이며 오른쪽은 호수라, 섬과 산봉우리를 껴 안은 듯 하며 배는 왔다갔다 하고 구름은 높이 떴다. 호수는 나룻터와 빈들과 고기떼들이 모여 위천(渭川)은 넓고 물은 붉고 빛나서 학동(鶴同)의 아지랭이와 악양(岳陽)의 저녁 연기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붉은 구름이 봉우리를 이루어 서리가 내리면 천림(天林)이 붉게 물들고 얼음이 얼면 장천(長川)이 희어 천태만상이 모두 방(房)아래서 보게 되니 수월의 터는 이러한 경치를 선택하여 지은 것이리라.-

수월정이 서 있는 섬진나루는 이 정자와 함께 섬진강 이름의 유래가 된 두꺼비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야기인 즉, “고려 말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심하였는데 한 번은 왜구들이 강 하구로 부터 침입해 오자 진상면 섬거에 살던 두꺼비 수 십만 마리가 섬진나루터로 몰려와 울부짖자 왜구들이 놀라 물러갔다. 또 한 번은 강 동편에서 왜구들에 쫒기운 우리 병사들이 섬진나루 건너편에서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었는데 두꺼비 떼들이 강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 우리 병사들을 건네주었다. 뒤쫒아 온 왜구들도 두꺼비 등을 타고 강을 건너던 중 강 한 가운데에 이르러 두꺼비들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려 왜구들이 모두 빠져죽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다사강, 모래내, 두치강 등으로 불리우던 이 강을 두꺼비 ‘섬(蟾)’자를 써서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특히 수월정이 자리한 섬진나루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매복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는 군사적 요충지다.

1705년에는 정식 수군진이 설치되어 수군 장교인 별장이 1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주둔하기도 했다. 섬진진에는 1895년 진이 폐쇄 되기까지 4척의 병선과 200~300명의 군사가 주둔하여 섬진나루를 경비하였고, 선박세와 통행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을 인근 고을로부터 거두어들이는 경제활동도 병행하였다.

현재 수월정 주변에는 수군 별장의 공적비 좌대로 쓰인 두꺼비석상 4기와 1999년에 세운 섬진강유래비, 수월정 유허비, 그리고 선박을 묶었던 선돌바위가 보존되어 옛 정취를 그대로 느끼게 하고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