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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지 않은 암연정을 무작정 찾아나선 어느 따스한 봄날 오후.
두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만개한 매화 꽃잎이 착잡한 순례자의 마음을 다소나마 위안시켜 줬다.
임금이 내린 벼슬을 마다하고 향리로 내려와 고즈넉한 곳에 정자를 지어 지역 선비들과 어울려 시문을 논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던 조선의 선비 암연처사(岩淵處士) 서천일(徐千鎰·1483~?).
암연처사가 지었다는 암연정은 간데없고 정자 터로만 추정되는 곳에 잡초만 무성히 우거져 세월의 무상함만 보여주는 광양시 옥룡면 계곡리 산 기슭.
이 정자의 주인인 암연처사는 조선 중종 때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에 제수 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이곳에 자신의 호(號)를 따서 암연정(岩淵亭)을 짓고 학문에 전념, 올곧은 선비정신을 끝까지 꺾이지 않고 만년을 보냈다.
선생은 문장에도 능해 많은 저술을 했다고는 전하고 있으나 대부분 유실됐고 현재는 상현록(尙賢錄), 문인록(門人錄) 등 두 책만이 전 할 뿐이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암연정을 서천일의 고손인 월파(月波) 서진귀(徐盡龜·1633~?)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 광양 현감으로 온 김중남이‘岩淵亭記’를 썼고, 이 중수기를 살펴보면 암연처사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정자를 짓고 자신의 청렴결백함을 시문으로 읊어 임금께 고했다.
중종은 뒤늦게 암연처사의 억울함을 알고 벼슬을 권유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평민으로 여생을 마쳤다.
비록 정자의 흔적은 없지만 암연정에 관한 몇 수의 싯구가 현존하고 있어 이 곳을 드나들었던 선비들의 흔적을 엿 볼 수 있다.
-암연정에 서서 바라보니 끝없는 감회
비 개니 장강(長江)은 한눈에 보이네
여울에 백로는 눈빛 띠어 사랑스럽고
청송은 언덕을 가득채워 아름답구나
충천에 달 밝으니 호기는 가득하고
수면에 바람이니 소매끝이 시원하네
달빛과 바람은 써도써도 남아돌아
이 몸이 아득히 그림 속에 신선인듯
<서진귀의 ‘암연정’전문>
서진귀는 고조부의 올곧은 선비정신에 감화돼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암연정을 지키며 시문(詩文)과 낚시로 소일하며 세상을 등지고 한평생를 살았다.
월파는 뼈대 있는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할말은 하는 강직한 성품을 소유한 선비였다.
월파는 이때 해남으로 유배 온 고산 윤선도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지역 향교 중건에 깊이 관여해 오늘날 ‘광양정신’을 살찌우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암연정이 있었던 정자 밑으로 용소(龍沼)가 흐르고 있다. 지금을 수량이 줄어들어 개천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당시 기록으로 보아 이곳을 ‘장강’(長江)으로 표현했으니, 쾌 큰 강이 흘렀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고조부 암연처사가 품었던 큰 뜻을 평생 간직한 채 이곳에서 낚시로 소일했던 월파의 흔적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암연정 밑에 있었던 용소 옆‘월파대’(月波臺)라고 새겨진 바위가 그것이다.
푸른 이끼로 뒤덮인 월파대 위로 산죽(山竹)이 바람결에 울어댄다.
마치 권력을 놓고 이전투구하는 오늘의 정치현실을 강하게 질타라도 하듯….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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