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 “조선 창건부터 왕권수호에 풍수사상 활용 흔적 뚜렷 ”
[풍수기행] <32> 왕릉으로 떠나는 풍수기행(3) - 조선시대 왕릉의 정혈과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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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종묘와 사직을 왕조의 2대지주로 삼고, 터를 잡는 일을 풍수지리를 전담하는 서운관 관원들에게 시켰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을 보면 과거시험의 음양과 풍수지리영역에 출제했던 이론 과목으로 청오경, 장경, 지리신법, 명산론<사진참고> 등의 순서로 정하고 이에 관련된 분과적 지리서를 확충해 나갔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들 서적 모두가 중국에서 저술돼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이다.
그런 탓에 풍수지리의 정통성을 가리는 척도는 중국 한나라 청오자가 지은 청오경과 진나라 곽박선생이 지은 장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어쨌든 과거시험에 음양과를 둬 그 시험에 합격한 풍수지리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로 하여금 능묘(陵墓)의 후보지를 찾아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길지를 왕가의 능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운관의 관원들은 경륜이 짧고 경험적 실증에 약한 탓에, 이른바 국풍의 반열에 오른 명사가 왕명을 받아 능묘지역 선정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대지명혈의 재혈에 착오가 없도록 했다.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 였다.
당시 국사로 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던 도선은 장차 천명을 받아 특출한 사람이 나올 것을 예견하고 송악군(현 개성)에 가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때 왕건의 아버지인 왕용건의 집터를 잡아주며 왕건의 출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는 내용이 도선본비에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가 왕사로 존경받고 이 태조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고려때 부터 조선초기까지 소위 3화상으로 유명한 지공, 나옹선사와 함께 불교에 도통했던 인물중의 하나였다.
무학대사는 고려 충숙왕(1327)때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18세에 원나라에 유학했으며 함경도 석왕사에 머물고 있을때 이성계를 만나 그의 꿈을 “국왕이 될 예언성 큰 꿈”이라고 해석한 후, 인연을 맺기 시작해 이 성계가 왕위에 등극하자 왕사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한양 정도 논의때도 여러 중신들과 제도권의 풍수지리학자들의 의견을 다 듣고 난 다음, 결론적으로 무학대사의 의견을 물었다는 기록에 비춰봐도 그에 대한 이태조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태조의 묘터로 현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시장자 자리에 정혈, 건원릉을 조성했다고 전해진다.그런데 필자가 끝내 풀지 못한 궁금증이 하나 있다. 그토록 이 태조가 무학대사를 신뢰했다면 한양의 궁궐터를 정할때 인왕산 아래에 짓지 않고, 하필이면 정도전 하륜 등 비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현 경복궁터에 지었을까 하는 점이다.
무학대사외에도 왕의 주위에서 풍수지리에 관한 중요한 조언을 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
무학대사의 뜻에 함께하며 한양터의 궁궐자리를 인왕산 아래로 조언했던 권중화를 비롯, 서운관의 풍수지리학자이자 조선초기 국책 풍수사업에 많이 참여했던 이양달은 태종때부터 세종까지 두터운 신임속에서 왕의 자문역할을 했다.
예종때 세종의 능침을 여주땅 모란반개형인 현 영릉으로 천릉하는 대사를 맡은 상지관 안효례, 흥선대원군에게 충청도 덕산의 가야산아래 군왕지지를 소점해 주고 왕권을 되찾게한 정만인, 그리고 고종때의 국풍 전기응, 주은한, 김광석, 김공석 등 왕위가 바뀌거나 일정기간을 두고 한시대에 걸쳐 국지사로 행세한 인물들이 문헌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국풍의 명단이나 상지사의 명단이 시대와 왕권에 따라 빈틈없이 정리되지 못해 소상히 알 수 없는점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태조실록에 확실히 전해온 것은, 조선조의 왕도를 전도하는 과정에서
서운관의 관리들은 이론에 밝은 법안(法眼) 지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고, 거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안목이 부족해 국가경영전략을 내다보는 풍수지리의 역할을 해내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당시 국정의 중책을 맡았던 도평의사사에서 “지리라는 학문은 분명치 못한 곳이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각기 자기 의견만 내세워 서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어느것이 참말인지, 어느 것이 거짓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다. 고려조에서 전해오는 비록마저 이와 비슷해 음양산정도감을 둬 일정하게 교정하라”고 요청했다. 태조 이성계는 이를 인정하고 허락했다.
이 태조의 입장에서 중신들이나 서운관 관원들 모두 미덥지 못했을 것이다. 중신들의 풍수 수준은 상식을 벗어나지 못했고, 서운관 하급관리들의 수준은 문자에 얽매인 법안으로 안목이 너무 좁아 국사에 반영하기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안된 것이 풍수이론을 체계화시키고 정리하는 음양산정도감을 설치한 것이다.
권중화, 정도전, 성석린, 남은, 정총, 하륜, 이직, 이근, 이서 등으로 하여금 서운관원과 함께 지리와 도참설에 관한 여러가지 책을 모아 참고해 교정토록 했다.
이상 소개한 내용은 조선의 왕도를 전도할때 터를 정하는 직접적인 과제 해결을 위한 조치였겠지만 이는 조선왕조의 전과정을 통해 풍수지리를 국책 즉, 궁궐개보수를 비롯, 왕조를 굳건히 다지는 일과 왕족의 능묘선정 등에 기본이 되는 지침서이자 강령이 됐을 것이다.
왕조의 창건과 왕권 수호 및 국가경영의 기조에 풍수지리사상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기틀삼아 조선왕조의 궁궐을 한양의 경복궁터로 확정하고, 이어 이성계는 그의 사후 유택을 정하는데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때를 기해 이성계는 과거 고려시대때 왕릉의 조성에 따른 막대한 폐해를 개선하기 위해 이른바 족장제를 도입할 것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왕사인 무학대사에게 1족1산에 장사를 지내는 길지의 족장지를 골라 왕족의 능묘를 조성할 수 있도록 그 적지를 구하도록 지시했다.
이 태조가 1산1혈의 능묘제를 지양하고 1산1족 능묘제를 강조한 까닭은 성묘에 불편하고 묘지를 지키는 일에 품이 많이 들며 묘를 고치고 다듬는 일에 과다한 경비가 들고 묘를 잃어 버릴 우려가 크다는 단점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하기야 1명의 왕이 붕어할 경우 그에 소요되는 경비와 인력은 상상을 초월했다는 기록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왕조실록에는 이 태조가 태종8년(1408)에 붕어하자 충청도에서 3천500명, 황해도에서 2천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모두 6천명의 병정과 인부가 60일간에 걸쳐 능역을 조성했다니, 정말 그 폐해가 얼마나 컸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 탓에 이태조의 족장제 도입은 설득력이 충분하다고 본다.
족장지란 명당길지가 여러군데 자리잡고 있는 한 권역의 지역에 많은 묘소를 조성하는 장사형식을 뜻한다.
족장지 유형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분수혈형이고 다른 하나는 방수혈형이다.
이는 중국 명대의 서선계, 서선술 형제가 지은 인자수지(人子須知)에서 논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사진과 도해 참고>
이런 두가지의 족장제 유형중 조선시대에 도입한 것은 분수혈형으로 건원릉을 비롯해 9개의 능이 안치된 서오릉과 숙종 1계비의 명릉 등 5개의 능묘가 조성된 서오릉, 그리고 서삼릉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밖의 왕릉은 1산1혈로 돼 있다.
이태조가 강조해 시행했던 족장제도 이조 중엽 선조 장지를 동구릉으로 결정했을 당시 지관들이 풍수지리 이론상 1산1혈외에는 불길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이원익이 반박, 반론을 물리친 사실이 경기도 시흥땅에 있는 이원익 신도비에 명기돼 있다. 또 철종 임자년(1855년)에 이호연의 저서 지리연회에는 족장제 찬성론이 들어있다. 족장론이든 1산1혈론이든 조선 왕릉이 과연 군왕의 유택으로서 용진혈적에 맞게 쓰여졌는지를 밝혀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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