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 경복궁-북악산 조화롭지 못해 불안정 ”

화이트보스 2009. 1. 19. 10:50

[풍수기행]“ 경복궁-북악산 조화롭지 못해 불안정 ”

[풍수기행]<31> 왕릉으로 떠나는 풍수기행(2) - 조선 궁궐터와 왕릉 개관


 


조선시대 왕릉 전경


조선시대에 들어 태조 이성계가 첫번째 추진했던 국책사업중의 하나가 한양으로의 천도였다. 그런 뒤 이 태조는 자신의 유택을 어디로 정할지를 놓고 걱정 했다. 군주왕권시대는 말할 것 없고, 오늘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양택과 음택의 발복이 조화를 이뤄야 가능하다.

특히 두가지 변인중에서도 양택(생가터)의 중요성이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왕능만을 일방적으로 답산해 얻어진 자료만으로 조선왕조의 영고성쇠와 파란만장한 과정을 풍수적 요인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음·양택은 상호작용의 변인임이 중요한 사례로 입증되고,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무학대사와 권중화는 “조선의 대궐은 현 인왕산 아래 사직공원자리에 유좌묘향(정서쪽을 배경으로 정동쪽을 향함)을 놓아야 한양터의 국세에 들어 맞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러나 정도전 등은 “자고로 성왕들은 남향터를 잡아 집권해야 천하의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남쪽의 밝은 형상을 보고 밝은 정치를 한다”며 “대궐을 동향으로 놓을 수 없으므로 선현의 말대로 남향을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득세해 끝내는 남향을 놓을 수 있는 현재의 경북궁터에 자리잡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졌다.

혁명주체 세력의 이런 의견이 워낙 강하자 무학대사 등은 한 발 물러서 “(현재의 경북궁터에)궁궐을 짓되 물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는(우선수) 국세이므로 해좌사향(서북북에 배경을 삼고 동남남쪽을 향함)으로 입향을 정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혁명주체 세력들은 “그러면 다시 중들의 세력이 중흥할 것”이라 주장하며 끝까지 자좌오향(정북에 배경을 두고 정남을 향함)을 놓고 만 것이다.

여기서 믿기 어려울 만큼 적중된 신비스런 비전인 ‘산림비기’의 한 구절이 회자되며 전해왔음을 상기해 보면 정말 놀랍고도 흥미롭다.

“한양에 도읍을 정할때 스님의 말을 따르면 길하고 정(鄭)의 말을 들으면 궁궐 좌향을 자계좌(배경을 북방에 두는 좌향)로 할 것이다. 그러면 남산이 태고(매우 높음)하니, 신유능군(군왕을 업신 여기는 신하가 있게 됨)이요, 한강다탄(한강물이 크게 여울짐)해 국무십년안(나라의 편안한 날이 십년을 넘지 못함)이라 혹은 국난이요 또한 국상이라”

산림비기의 이런 내용은 불행하게도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조선개국 10년만에 왕자난으로 골육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뒤이어 정종 양위, 단종애사, 연산·광해군의 폭정으로 반정이나 폐출당한 군왕, 임진왜란 7년의 풍진, 정묘·병자호란으로 임금의 남한산성 붕어, 연산생모 윤비 폐출 등 혼란이 요동쳤다.

또 27명의 왕 가운데 무자(無子)의 왕이 8인이요, 적자 대통계승이 어려웠으며 군약신강(君弱臣强)으로, 명당을 쓴 권신과 척신들의 국권 실제장악, 군왕의 허약에다 경술년 망국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명종 8년과 임진왜란 등 개국 100년도 안된 사이에 두번에 걸친 궁궐소실 및 장녹수, 장희빈 등의 여인천하 시대가 있기도 했다.

원래 경북궁터는 대궐터가 되지 못하는 양택혈이라는 것이, 정통풍수지리학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그 원리에 상응하는 지리적 요건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방대한 까닭에 몇가지만 소개한다.

서울의 판국은 백두대간이 내려오다 철령에서 간인룡(동북방에서 남서방으로 뻗어내린 용맥)이 700리를 내룡하다가 강세룡인 도봉산에서 치솟아 용루의 형태를 만들었으므로 강세룡 중의 강세룡이다.

남산 너머 조산이 되는 관악산 역시 속리산에서 발조 700리를 북쪽으로 역룡 역세하다가 경북궁터의 주산인 북악산과 대치하는데 이 역시 강세룡(염정 화성)이다.

모두가 하늘을 찌를 듯한 출진룡이라 상등룡이라고 하지만 혈을 맺는 당처에 와서 귀인이 병풍을 두르고 고즈넉이 앉아 있듯이 그 배경에는 후중하면서도 넓고 포근하게 펼쳐진 산이 웅좌해서 뒤켠의 모든 강세룡의 살기를 가려 줘야만 한다. 이는 기본중의 기본이다.

인왕산 밑에서는 뒤켠의 숱한 살기가 숨겨져 나타나지 않지만 북악산(청와대 후산)밑인 경북궁은 살성에 노출돼 그에 의한 흉화를 면하기 어렵다.

그런데다 정북방에는 삼각산이 경북궁을 엿보며 넘겨다 보는 흉한 규봉사가 있다.

특히 궁궐의 배경이 되는 진산의 용세 하나만 보더라도 경북궁터는 왕도(王都)로서 결점이 너무 많아 진정한 궁궐터가 될 수 없는 곳이다.

주위의 산세를 자세히 살펴볼때 삼청동에서 한국일보사 쪽으로 내려가는 용맥과 가회동에서 낙원동까지 내룡한 용맥, 명륜동옆으로 종묘까지 내려간 용맥 모두가 실상은 인왕산 아래의 사직공원터를 위한 호종의 용맥들이다.

그리고 인왕산의 오른쪽 백호맥(터에서 앞을 보고 오른쪽의 호위사)에서 뻗어 내려 남산을 지나 장충동을 거쳐 청계천까지 굽어드는 맥과 약수동 뒷산들과 왕십리에 이르기까지 오른쪽에서 거두어 주는 모든 산맥은 아래쪽에서 인왕산 터를 옹위하는 하수사들이다.

그런데 경북궁 뒤는 주산이 없는 사실상 과산에 가깝다.

북악산이 언뜻 보기에 목성체인 탐랑성의 수려한 산봉으로 그 형태를 갖춘듯 보이지만 다시 주목해 보면 주산이 되기에는 오른쪽으로 편립돼 있는데다 손바닥처럼 터를 감싸 듯 솟아 있지 못하고, 마치 손등같이 무정하게 배면하고 있는 형세가 분명하다.

TV화면에 잡힌 청와대와 그 후산 북악산이 어쩐지 짜임새가 없고 안정되지 못해 불안정한 것처럼 느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일까.

여기서 중국 송대의 풍수지리 대가 주경일 선생의 지적을 다시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뒷산이 양 팔을 벌리듯 감싸고 둥글게 솟지 않으면 맥이 내려오지 않고 개면(솟은 산이 양팔을 벌리 듯 펼침)이 안되면 혈을 맺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한양 천도가 거론될때 풍수지리학에 밝은 무학대사와 권중화의 의견을 무시하고 안왕산을 외면했던 것은 천운일까 국운이였을까.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는 과거사가 아닐 수 없다.

조선개국 시기는 서기 1392년(임신년)이다.

이로 부터 519년 동안 즉, 제1대 태조부터 제27대 순종까지 왕릉(왕후의 능호까지 포함)은 64위다.

여기에다 왕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하는 등 사후에 능호를 추존받은 경우까지 더하면 능의 수는 더 많아진다.

64위중 왕릉은 25위이고 왕후릉은 37위다.

그러니까 계비 왕후의 능은 12위인 셈이며 연산군, 광해군과 그 들의 비와 희빈 장씨는 능호를 받지 못하고 묘로 격하됐다.

능은 왕위에 즉위한 군왕의 묘를 포함, 사후 추존돼 능의 반열에 오른 경우이며 원은 후궁이나 세자책봉을 받지 못하는 등 능호를 받을 수 없는 경우에 해당된다.

묘는 폐출돼 왕위나 왕후지위에서 평인으로 실격된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왕능을 포함한 왕족의 묘는 1산 1혈과 1산 다혈로 크게 나눠 배치돼 있다.

이 태조의 왕릉인 건원릉을 비롯해 모두 9개의 능 17위는 경기도 구리시 인청동 62번지 동구릉에 안장돼 있다. 제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의 명능을 비롯, 5개의 능 14위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6번지 서오릉에 안장됐다.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현릉과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 등 20개 능과 2개 묘는 궁궐로부터 100리 안팎의 1산 1혈에 안장돼 있다.

다만 태조의 비 신의왕후를 비롯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은 북한땅에 있어 사적으로 지정되지 못해 안타까운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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