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조선 창업은 제왕지지에 묻힌 선대의 발음 탓 ”

화이트보스 2009. 1. 15. 16:50

[풍수기행]“조선 창업은 제왕지지에 묻힌 선대의 발음 탓 ”

<30> 왕릉으로 떠나는 풍수기행(1)


 


전주 이씨 시조 신라 사미공 한(翰)과 비 경주 김씨의 단. 조경이란 경사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기쁨이 비롯되는 시조의 단 이름으로만 쓰인다. 이 단은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해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기 위한 것이다.
왕이나 왕후의 유택은 능, 능묘, 능상, 능침 등으로 불린다. 백성들의 묘와는 구분됐다. 그래서 왕능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천하대지였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이런 탓에 왕릉에 대한 풍수지리적 간산의 어려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풍수기행의 소재를 왕능으로 정한 필자의 의도가 무모한 것은 아닐까.

이번 풍수기행의 기획의도는 이승에서 누린 홍복의 차별화가 사후 유택까지 귀결되거나 결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천리의 관점과 가장 지엄한 신분이었던 왕과 왕후의 사후 유택을 가감없이 냉철히 살펴 분석함으로써, 풍수지리학 연구의 또 다른 깊이와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시도했다.

이에 따라 진정한 의미의 풍수지리학 연구 기행이 될 것이라는 가능성과 그런 믿음을 갖고 간산을 시도하고 그 결과를 소개할까 한다.

왕릉에 대한 풍수기행은 몇가지 제한성이 있다.

소재의 범위는 물론 역사 과정을 살펴 독자들의 궁금증을 모두 풀어주기에는 왕권시대가 너무 길뿐 아니라 풍수지리적인 특성을 커버하는 시대적 배경이 다른 탓에 그 한계를 극복하기란 매우 어렵다.

또 왕권시대 장례문화의 근거자료를 수집하는데도 한계성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번 왕릉 기행의 소재와 배경을 다음과 같이 한정시킨다.

우리나라 왕권 군주시대가 5천년을 넘는 긴 역사를 갖고 있지만 풍수지리학을 도입해 왕권의 기반을 구축하고 사후 왕릉조성까지 적용했던 시대가 고려 이후다. 따라서 사료나 문헌 고증 및 자료를 바탕으로 소재를 구해 그 기초위에서 소개할 수 있는 시기는 조선시대로 좁혀진다.

그 가운데 동구릉과 서오릉을 중심에 두고 왕릉의 간산기록을 정리해 소개할까 한다.

이야기의 전개 순차와 내용 구성의 틀도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데 주안점을 두기로 한다.

왕릉은 이른바 국사(국풍)에 의해 소점된 혈이니, 모두 제왕지지의 명혈이며 그래서 왕통이 계승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굳이 이에 대한 답산결과를 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또 왕릉은 어떻게 점혈돼 터가 결정됐고, 관장했던 기관은 어디이며 책임자는 누구였을까. 어떤 절차에 의해 조성됐을까 등이 독자들의 궁금사항일 것이다. 그리고 조성된 왕릉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과연 어떤 자리였을까도 꽤나 관심사항일 것이다.

실제 간산 결과에 의해 분석·평가하고 그 소견을 밝히는 것이 필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조선왕조의 왕릉이 제왕지지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창업 자체가 제왕지지에 묻힌 선대의 발음에 의해 달성됐다는데서 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한다.

승하한 왕과 왕후의 묘가 군왕이 난다는 제왕지지에 쓰였으니, 500년 왕통이 계승됐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설득력있고도 그럴듯한 견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왕릉 중 군왕지지가 거의 한곳도 없다는 것이 풍수지리학을 정통으로 연구한 선대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필자 역시 동구릉과 서오릉 등 몇몇 왕릉을 척산해 살펴본 결과, 군왕지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점된 왕릉과 왕족의 릉(또는 원과 묘)이 가끔씩 보였다면 너무 외람된 표현이라 하겠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수준과 객관적인 평가 관점에서 언급한 것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왕권세습제가 지배했던 군주시대에 처음 왕권을 잡아 통치한 제국을 통치하게 된 원인이 어떤 영향을 받아 이뤄졌는지를 따져보는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조선왕조를 창건한 이성계가 혁명가로서 성공하기까지 두가지 변수가 맞아 떨어졌다고들 한다.

하나는 개인의 역량과 노력도 뒷받침됐지만 시대적 상황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다른 하나는 풍수지리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도참설에는 ‘한양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새 왕조를 열 것이다’는 내용이 전해옴에 따라 이미 고려조에서 이씨 성을 가진 관리를 한양에 파견, 지기(地氣)를 누른 역사적 기록이 전해진 것만 봐도 이를 전혀 무시할 수 없다.

이 태조가 개국의 명당을 살펴서 그 진위를 밝혀 놓은 기록들이 명백하게 전해진 것 또한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조선왕조 족보의 하나인 완산실록에 따르면 전주 이씨 시조인 신라 사공 이한 공의 3세손인 이천상 공이 신라말기에 중국으로 건너가 9년동안 풍수지리학에 도통한뒤 전주 건지산 왕자봉 아래에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서룡시우형(瑞龍施雨形)의 명당대지를 찾아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을 안장했다.

그 묘소를 두고 “내 후손에서 왕이 될 자손이 반드시 날 것이므로 중간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 묘를 다른데로 옮겨서는 안된다”고 후손들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그 후 16세손인 이린이 고려 명종때 집주라는 벼슬을 지냈다.

이린이 전쟁에 나가 대패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책임을 묻게 됐다.

이 때 나온 것중 그의 선조묘가 문제가 됐다.

특히 당시 국사인 이대극이 왕에게 “한양터에 전주 이씨가 등극하게 되는데 이는 서룡시우형의 시조묘의 발음에 힘입어 이뤄진다”고 진언하자 명종은 이린을 유배시키고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를 파굴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파묘 순간에 청천벽력과 폭우가 쏟아져 파묘에 참여했던 인부 10명이 죽고 모두 혼비백산해 흩어지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명종은 천시(天時)라며 파묘 중지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묘가 바로 건지산 아래 전주 이씨의 조경단(시조의 묘터)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전주 이씨의 또 다른 선대묘에 군왕지지로 알려진 이양무의 묘인 경준묘가 세인들의 주목을 끌며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린의 손자이자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는 그의 아버지 이양무에 이르러 전주에서 살았고 자신은 전주에서 관직을 맡았다.

용비어천가에 목조의 사적이 실려있듯이 이안사는 전주 지주사와 다투고 강원도 삼척으로 피신한다.

삼척에 온 그는 친산 이양무의 산소 준경묘를 깊숙한 산골 노동산 아래에 안치하고 모친 묘소 영경묘를 이웃 가까운 곳에 안장했다.

필자가 독자들에게 알리려는 관심사항은, 앞서 건지산 아래의 군왕지지인 시조묘(조경단)와 함께 준경묘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준경묘는 오늘날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다.

이 곳의 산소벌안에서 서 있노라면 풍수지리에 관계없이 대지명혈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워낙 전문적인 내용이라 여기서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풍수지리학적으로 분석해도 이 산소는 군왕지지로서 손색이 없다.

고려의 500년 도읍지를 무너뜨리고 조선의 새 왕조가 창건된 것은 전주의 조경단과 삼척의 준경묘의 발음에 의해 얻어진 에너지가 뒷받침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함경도 이성계의 생가터도 분명 군왕의 지기를 받게할 터이지만 이를 실증적으로 제시하지 못한점이 못내 아쉽다.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는 풍수지리적 요건은 음택의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인물이 잉태된 생가터(양택)도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생가터에 대한 기록이나 실제 간산평이 사뭇 궁금해진다. 이후 역대 대통령 생가터 편에서 생가터가 참으로 중요하다 것이 입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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