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 호박넝쿨에 호박 주렁주렁 열리는 형의 명당 ”

화이트보스 2009. 1. 19. 11:16

[풍수기행]“ 호박넝쿨에 호박 주렁주렁 열리는 형의 명당 ”

<33> 왕릉으로 떠나는 풍수기행(4) - 동구릉 간산기


 


동구릉 묘역의 전형인 태극문양의 홍살문.􀀃�군왕이 홍살문을 통해 정자각으로 걸어가는 참도와 신도,􀀃�민도가 있으며 오른쪽으로 수북청이 세워져 있다. 그 뒤로 능원이 이어지고 그 위로는 능묘의 봉분이 자리잡고 있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번지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동구릉은 태종 8년(1408)에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자 一山多穴의 원리에 따라 족장제 도입을 지시했던 이 태조의 유훈으로 건원릉(나라의 연호를 정했다는 뜻)이라는 능호를 붙여 처음 안장하면서 왕릉군이 조성된 곳이다.

동구릉은 57만평의 대지위에 조선시대 왕과 왕비 등 9개 능에 17위의 유택이 들어선 국내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처음에는 9릉이라하지 않았으나 철종 6년(1855)에 추존왕(죽은뒤 왕위에 추증됨) 익종의 능묘인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된뒤부터 동구릉이라 부르게 됐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묘인 건원릉을 비롯 ▲현릉(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목릉(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및 계비 인목왕후 김씨) ▲휘릉(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 ▲숭릉(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혜릉(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씨) ▲원릉(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수릉(순조의 세자인 추존왕 익종과 신정왕후 조씨) ▲경릉(헌종과 효현왕후 김씨 및 계비 효정왕후 홍씨) 등 9개 능으로 조성됐으며 1970년 사적 제 193호로 지정된 국가문화재다.

조선의 왕릉은 대부분 서울과 경기(개성 포함) 일원에 있다.

도읍지인 한양으로부터 100리안에 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단종의 무덤인 장릉이 강원도 영월에 자리잡고 있다.

이 가운데 왕릉답사의 최적지로 동구릉이 손꼽힌다.

다음이 서오릉이다.

동구릉만 둘러봐도 조선시대의 다양한 형식과 묘제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고, 제시해 놓은 설명문 등을 통해 조선왕조의 역사까지 되짚어 볼 수 있다. 왕릉은 입구에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을 지나 왕이 오르던 참도의 돌길을 따라 가면 정(丁)자 모습의 정자각이 있고, 오른쪽으로 비각과 제사준비를 하던 수복청이 있다.

정자각 뒤로 언덕같은 능원이 이어지며 그 위가 봉분이다.

봉분은 삼면을 담장(곡장)으로 둘러쳤으며 그 안쪽으로 무덤을 수호하는 석조각의 호랑이와 사악한 것을 불리친다는 양이 놓여있다.

봉분앞에는 상석과 장명등, 좌우에는 망주석이 있으며 그 앞에는 말을 거느린 신하와 장수가 서 있다.

봉분도 아랫부분을 12면으로 된 병풍석으로 두르고 각면에는 화려한 문양과 함께 12지신상을 새겼으며 그 바깥 역시 12면으로 된 난간석을 둘러쳤다.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런 양식은 삼국시대 이래 전통위에 중국의 제도가 더해져 정립된 것이라 한다.

특히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고 심이지신상을 새긴 것은 통일신라시대 부터 비롯된 우리의 전통적인 능묘 조성 양식이다.

동구릉에는 건원릉과 같은 단릉외에도 왕과 계비를 한 봉분에 함께 모신 합장릉, 홍살문과 정자각 등은 하나지만 봉분과 석물을 완전히 따로 쓴 동원이강, 한 담장안에 2위의 봉분을 조성한 쌍릉, 또는 3기(왕과 비, 계비)의 봉분을 마련한 삼연릉 등 다양한 형식의 묘제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동구릉에는 서오릉과 달리 그 지위에 따라 달리 칭하는 원이나 묘의 무덤이 없는 게 특징이다.

능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경우의 무덤이며 원은 왕이나 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임금의 부모나 왕세자 내외의 무덤이다. 묘는 대군이나 공주, 후궁 등의 무덤이다.

왕위나 비에 있었다 해도 폐위돼 복권되지 못한 연산군, 광해군, 희빈장씨의 무덤도 묘라 칭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왕릉군 즉, 족장지를 누가 찾아서 점혈했을까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어 어느 하나로 딱히 결론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

필자의 예측으로는 다음 두가지 설이 상호 협력을 통해 이뤄낸 합작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한양으로 전도한 이후 한 가지 걱정을 털고 나서 자신의 유택을 어디로 정할지를 놓고 걱정을 했다.

이 즈음 왕릉이 1산1혈로 설정되는데 따른 폐해를 덜기 위해 족장제를 도입할 것을 제안하고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 근교를 돌아보고 오늘의 동구릉 지역에 이르러 자신의 유택은 물론 왕가의 묘지를 한지역에 모아 쓸 만한 족장 대지를 찾아내게 된다.

그런 후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태조는 어느 고개에 올라 “이제야 걱정을 덜었다”고 말했다.

그 곳이 바로 ‘근심을 잊는다’는 망우리 고개다.

또 다른 설은 조선실록에 나타난 기록으로, 당시 검교감찬 의정부사 김인귀가 지금의 동구릉지역에 길지가 있다고 보고해 영의부사 하륜 등이 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무학과 이 태조가 현재의 동구릉을 둘러보고 결정했다는 속설과는 다른 셈이다.

여기서 되짚어 볼만한 사실은 설혹 태조와 무학이 한발 앞서 동구릉의 길지를 찾아 점혈했다 해도 무학이 입적한 때가 태종 5년(1405)이었고 그가 입적한 3년뒤인 태종 8년(1408)에 이 태조가 붕어했으니 건원릉을 조성할 즈음에는 무학이 타계한 탓에 능묘의 재혈과 조성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다.

만일 그때까지 무학이 생존해 있었다 해도 태조가 없는 무학의 영향력은 한계에 부딪혔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다.

그것은 실록에 나타난 무학대사에 대한 혹평에서 확연하게 입증된다.

‘무학의 언행이 풍수이론에 밝지 못한 듯 해 풍수대가는 아니다’라는 대목이 바로 그 것이다.

무학대사가 풍수대가가 아니었다면 이 태조만한 인물이 그에게 속았을리 없으며 무엇보다 백성들 사이에 그 토록 많은 설화를 남겨놓았을리 만무할 것이다.

실제 그가 태종 5년에 타계하자 회암사 부도에 안장시켰지만 사간원이 상소문에서 “자초 무학은 천한 노예출신이고 살아서 종교적 업적도 별로 없었으며 죽어서는 아무 이적(異蹟)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왕사 칭호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탄핵하면서 그의 부도를 훼절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필자가 동구릉을 간산하고 느낀 점은 그 곳은 분명 분수혈형(分受穴形)의 족장지로서 마치 잘 자란 호박 넝쿨에 많은 호박이 열리듯, 길지명당을 간직한 좋은 땅이 확실하다는 것을 분석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이 태조와 무학대사가 이곳에 왕릉군을 조성하자고 의기 투합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얘기다.

다만 당시 족장지에 걸맞는 땅을 찾아 놓고도 태조의 유택이 될 건원릉의 혈처를 재혈하지 않았거나 재혈했다고 해도 두 사람이 모두 타계한 싯점에 이르러 건원릉의 소점자리가 당시의 국풍이나 풍수지리에 밝은 중신들에 의해 변경되지 않았을까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다음회는 간산을 바탕으로 객관적 관점과 이론적 근거에 의해 동구릉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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