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 이태조 유택 중심혈 비켜가 의아할 따름 ”
[풍수기행] <34> 왕릉으로 떠나는 풍수기행(5) - 동구릉 간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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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을 5시간에 걸쳐 동호인과 함께 자세히 간찰한 점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동구릉의 그 많은 명혈을 맺기 위한 용맥의 본원부터 살피는 것이 순서일 성 싶다.
족장지의 수많은 혈을 짓기 위해 내룡한 용맥은 대간룡에서 분지 돼 대지룡 맥락의 혈장까지 줄기차게 이어 온 강세룡이 확실하다.
변계량이 지은 ‘건원릉 비음기’에는 “건원릉은 장백산(백두산)을 뿌리로 해 2천여리를 뻗어오다가 철령에 이르러 꺾여져 서쪽으로 수백리를 내려와서 우뚝선 것이 백운산(경기도 포천시)이다.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100여리 뻗어와서 북으로 모이면서 남으로 행한 산이 곧 검암산이다. 능의 좌향은 계좌정향(북쪽에서 15도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향은 남쪽에서 15도 서쪽으로 향한 방위)”이라고 적혀 있다. 틀린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왕릉의 위상을 염두에 두고 너무 확대 과장된 것임을 필자는 2천500분의 1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모든 산맥의 본원이 백두산에 두고 있다.
하지만 동구릉의 본원이 되는 태조산 격은 포천시 소재의 백운산이라는 것이 사실과 더 가깝다.
백운산도 그 간룡맥이 동구릉으로만 단일용맥으로 어어져 있지 않고 서쪽으로는 광덕산, 명성산으로 뻗어나가다 북서쪽의 임진강까지 발달해 있다. 다른 한 자락은 국망봉으로 남락하다가 연인산, 대금산, 청우산, 깃대봉, 운두봉, 천마산으로 어어져 남남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다 그 유명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이라할 덕소 김번의 ‘옥호저수형’의 묘터를 만든 묘적산에 이른다.
또 한 용맥이 국망봉, 청계산, 현등산을 거쳐 백석이 고개에서 한 가닥의 산줄기가 서쪽으로 머리를 틀어 천보산으로 흐르다가 굽이굽이 용틀임치면서 한양터의 원맥이 되는 북한산에 이르게 된다. 백석이 고개에서 남향으로 분맥 돼 국사봉, 죽엽산, 용암산, 깃대봉, 수락산으로 이어져 오다가 동구릉의 근조산(가까이 있는 본원의 산)이라할 불암산을 일으켜 세우고, 소조산 격인 검암산이 솟구쳐 그 남쪽 울 하에 태릉을 지어 놓고, 이내 동편으로 회두하다 ‘강릉’을 지어 놓고는 잘록한 결인처를 만들어 새우개 고개를 넘어 작혈을 예고하며 마지막으로 크게 솟구쳐 동구릉의 마지막 진산이자 주산이 되는 용마산을 우뚝 세운다. 다시 머리를 남쪽으로 틀어 동구릉의 현무봉을 만들고는 마치 봉황이 날개를 드넓게 펼치듯이 좌우로 개장해 무려 57만평이 넘는 능역을 짓고는 그 큰 날개를 오롯이 접어서 청룡 백호가 서로 교쇄해 동구릉 능역의 모든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나가게 하는 능묘의 국세를 만든다.
주룡의 형세나 거슬러 올라 그 근본을 살피고 나면, 과연 동구릉과 같은 길지명당을 지을 수 있는 강세와 동·정(動·靜)의 요건을 갖춘 용맥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본원이 되는 태조산을 백두산까지 연결시킨 건원릉 비음기는 너무 확대 해석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포천의 백운산이나 국망봉에 그치는 것이 더 실제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면 왕릉의 주룡의 격을 폄하시키는 것일까.
어쨌든 위이, 기복, 낙맥, 비룡, 결인, 과협 등 주룡의 윤서를 밟아 내려 온 동구릉의 주룡은 대단하다.
또 의정부에서부터 용암산 자락을 호종하며 주룡의 우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중랑천에 이른다. 그 좌측에는 포천 가까이 솟은 수리봉 산골에서 흘러 내려온 물줄기가 국사봉 아래에서 근원이 된 산골물과 합수, 주룡의 좌측을 호종하며 남향으로 내려 흐르다가 새우개 고개의 분수령에서 내려온 물과 합수, 동구릉의 주산과 현무봉을 휘감아 우회하면서 이른바 수전현무의 창암천을 이루다가 포천지역의 죽엽산 깊은 계곡에서 발원, 수백리를 내려온 물과 합쳐져 왕숙천으로 넘쳐 흘러 동구릉의 청룡자락을 옹호하며 돌아 흐른다. 이후 우측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접어드는 수세는 가히 동구릉 능역의 지기를 오롯이 지켜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이렇듯 빼어난 주룡맥을 구비, 마무리된 동구릉의 국세에 자리잡은 능묘들은 과연 용진혈적에 자리잡았을까.
출입이 완전 통제 돼 자세히 둘러보지 못한 목릉과 숭릉을 제외하고는 능묘에 이르는 후룡맥과 그 용맥이 과연 혈적의 충분조건을 충족됐는지를 살펴봤다.
그러나 간산 결과 우리 일행은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우선 동구릉의 정혈 중 정혈에 속하며 시장자(始葬者)가 다름 아닌 태조 이성계의 유택인 건원릉이 왜 그 곳에 정혈됐는지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첫째 동구릉의 전체 국세를 관장하는 현무봉격에 해당되는 중심의 산봉우리에서 발달한 천심룡(으뜸이 되는 봉우리에서 마치 뚫고 나오듯 뻗어내린 중심출맥)에는 휘릉이 자리잡고, 건원릉은 상봉의 개장맥 좌측 용맥자리에 점혈된 점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둘째로는 건원릉의 혈처는 형기적 용세론에 의존해서 소점된 듯 교구통맥이 성립되지 않아 더욱 놀랍고 의문스러웠다.
셋째 혈처로 돌아오는 용맥은 두번씩이나 결인하고 중간에 마치 봉협을 방불케하는 봉만이 응결된 점이 빼어난 입수(入首)처럼 보였지만 그 용맥의 행도는 감룡(북쪽에서 남쪽방위로 내룡한 맥)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그 끝자락에 봉분을 짓게된 점은 어떤 근거인지 도대체 이해 되지 않았다.
필자는 비로소 동구릉의 간산기를 남긴 많은 선각자들이 건원능의 규모와 형기적 용세에 감탄은 하면서도 혈처의 용진혈적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언급하지 않은 연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준비해간 엘드로(수맥·기맥탐지기)도 시원찮은 결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건원릉을 무학대사가 소점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무학대사의 유일한 풍수지리서인 ‘정음정양’론이나, 그가 가장 중요시했던 정혈법이 교구통맥이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필자와 일행은 산도의 <가>지점에 큰 매력을 느꼈으며 그것도 아니면 건원릉 바로 옆의 지점에 대해서도 심도있는 논의를 거쳤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중국 송대 옥수경 등 용격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한 명사 장자미와 풍수지리학의 중시조라 일컫는 당대 양균송선생이 남긴 명언을 재음미 하면서 동구릉의 9개 능묘중에서 단지 경릉과 원릉만이 정혈에 대한 정도를 일깨워 줬으며 <가> <나> <다> <라> <마>지점과 지점에 대해서는 “왜 이들 지점에는 정혈하지 않았는지…” 궁금증만 더 했다.
용진혈적이나 교구통맥법에 의한 정혈, 그리고 용장혈졸(龍長穴拙·용맥은 으뜸이나 혈은 볼품없이 숨겨 자리잡는다는 뜻)이라는 풍수지리학의 진수를 함축해 놓은 개념과 용어를 다시한번 생각나게 했던 동구릉의 간산을 마무리하고 서오릉으로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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