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익릉 단릉 홍릉만 진혈 요건 갖췄을 뿐 ”

화이트보스 2009. 1. 19. 11:44

[풍수기행] “익릉 단릉 홍릉만 진혈 요건 갖췄을 뿐 ”

[풍수기행]<34> 왕릉으로 떠나는 풍수기행(6)- 서오릉 간산기


 


희빈장씨 묘의 전경. 표시 부위 바위를 가르고 솟아 자란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서오릉은 경기 고양 용두동 산 30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동구릉에 이어 두번째 큰 조선왕실의 왕릉군으로 사적 제198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이곳은 ▲경릉(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현씨 능묘) ▲창릉(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 능묘) ▲명릉(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 능묘) ▲익릉(숙종의 비 인경왕후 김씨 능묘) ▲홍릉(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 능묘) 등 5개의 왕능이 한양 궁궐의 서쪽에 있다해서 서오릉이라 불렀다. 또 순창원(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 묘), 수경원(영조 후궁 선희궁 영빈 이씨 묘), 대빈묘(숙종의 후궁 옥산 부대빈 장씨, 경종의 생모의 묘) 등이 주위에 자리잡고 있어 족장지의 전형을 보여준다.

서오릉이 처음 조성된때는 세조 3년(1457) 당시 세조의 세자였던 원자 장이 세자로 책봉된지 2년여만인 1457년 20세에 요절하자 경기도 일원의 여러 길지중에서 명당으로 선정된 곳이다.

특히 부왕이 직접 답사한 후 세자의 묘지로 결정, 이 곳에 처음으로 안장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성종 2년(1471)에 추존 돼 덕종이 되고 그의 묘호도 경릉으로 승격됐다고 한다.

서오릉이 분수혈형의 족장제에 알맞는 명당길지라는 기록과 간산평들은 문헌 여기 저기에 기록돼 전해지고 있지만 어느 명사가 소점했다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고 있어 그 연유가 아쉽다.

다만 세조 12년(1466)에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풍수지리학을 관장했던 서운관을 관상감으로 개칭하고 풍수학을 지리학으로 바꿔 경국대전에 수록해 놓은 점으로 미뤄 세조가 관상감 관원과 당시 경륜을 갖춘 지사로 하여금 의경세자의 유택을 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오릉은 동구릉과 함께 동일한 왕실의 능묘 군집지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서오릉에는 왕릉은 물론 순회세자를 모신 순창원과 숙종의 숙인 장희빈의 대빈묘 등 원과 묘가 경내에 조성돼 있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가 안장된 경릉은 세조의 평소 소신인 간략한 장례로 인해 봉분에 병풍석, 난간석, 무인석 등도 없이 대군묘 형식으로 간략하게 조성됐다.

숙종과 그의 제2계비인 인현왕후가 쌍분으로 조영되고 그 오른편에 단릉으로 조성된 제1계비 인원왕후의 능이 동원이강의 배치를 하고 있는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인력과 경비를 대폭 절감, 간소한 후릉제도에 따라 부장품의 수량을 줄이고 석물치수도 실물크기에 가깝게 했다.

기존의 8각 장명등의 옥개도 4각형으로 제도화함으로써 조선릉제의 새로운 분수령을 형성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인 익릉은 숙종의 능제 단순화 교령이 내리기 이전에 조성된 까닭에 기본적으로 오례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부분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오릉의 능역에서 많은 사람들의 화제에 오른 희빈 장씨의 묘 상단 뇌두 부위에 큰 바위가 있다. 그런데 그 사이를 뚫고 솟아 자란 장송 두 그루가 있어<사진> 보는 사람마다 생전에 표독스런 희빈 장씨가 사후에도 이어져 그 독기가 바위를 가르는 소나무로 환생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선한 끝은 아름다움으로 남아도 악한 끝은 흔적이 흉하다는 엿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산도에서 보듯 서오릉의 혈장 역시 족장지의 형태를 지닌 분수혈형으로서 동구릉보다 그 형세나 규모에 있어 다소 미세한 국세를 이루고 있다.

그 조종산이 북한산에서 발조된 것에서, 이미 동구릉에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세한 용세와 혈장의 국세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왕실의 능묘지로 선정된 것은 혈을 맺기 위해 내룡한 용맥의 행도와 혈처의 제반 요건이 풍수지리적인 준거에 비춰 결코 격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룡맥 행도만 봐도 북한산을 출발한 용맥이 주룡의 용격을 갖추면서 노적봉, 슬기봉, 비봉, 향로봉을 거쳐 박석고개에서 숨고르기와 제살과정을 거쳐 비룡, 낙맥을 거친뒤 서오릉의 진산이 되는 응봉을 치솟게 한다.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치듯 넓고 크게 개장해 혈처를 여기저기의 용맥 기지맥지에 결혈시키면서 아우르듯 포옹한 뒤 좌우의 날개를 창릉천과 용두천이 모이는 그 안쪽에 오릇이 접어 교쇄해 지기의 유실과 설기를 막고 성서로운 땅의 훈기가 혈처에 서리도록 감싸고 있다.

하지만 용진혈적의 원리에 따라 두루 살펴본 결과 익릉, 단릉, 홍릉 등 3개 능묘만이 진혈의 요건을 갖췄을 뿐 다른 왕릉은 규모나 조영에 쏟은 정성과 노력에 비해 혈증에 아쉬움이 많고 지기의 응결 상태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지기탐지 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최근 개장해 그 안내판에 풍수지리적 연구에 소중한 적지임을 제시하고 있는 명릉에 대한 간산에 큰 기대를 갖고 꼼꼼하게 내룡맥을 측정하고 재삼 세철해 종합 분석한 결과 좌선룡 결작 요건을 갖춘 혈처인데도 간인맥(동북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음미룡에서 첫번째 교도를 형성해 30도의 몸을 트는 형세) 음룡과 양룡의 중매격인 갑묘룡(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맥)의 끝자락 두툼한 곳에 정혈함으로써 교구통맥에 미치지 못한 곳에 능묘가 조성된 까닭에

국풍이 설정한 혈처에 스민 뜻을 도저히 헤아리지 못해 답답한 심정이었다. 이런 필자의 소견에 대해 독자들이나 풍수지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폄하할 것이라 믿고 있으면서도 간산소감을 밝힌 것은 나름대로 객관적인 근거와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임을 밝혀 둔다.<사진 1 참고>

여기서 명릉의 혈처에서 60도 꺾어 비스듬히 내려가는 용맥은 왜 간과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른족으로 50여m거리에 안정된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은 용진혈적에 들어 맞는 요건을 갖췄는데 왜 같은 능역에 쓰여진 능이 이렇듯 차이점을 드러내는지 마냥 궁금할 따름이다.

정혈에 있는 인원왕후는 경은 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1704년 왕비로 책봉됐으며 1757년(세조 33년)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소생없이 승하해 같은해 7월 명릉 서쪽에 단릉으로 조성됐다.

그러니까 1674년에 승하한 숙종보다 83년 후에 조성된 단릉은 점혈의 책임이 전혀 다른 지사에 의해 이뤄졌을 것이니, 그 견해 차이를 예측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또 서오릉에 처음으로 조성된 경릉도 그 뒷 용맥을 자세히 실측한 결과 우선룡에다 용맥의 행도가 진혈조건인데 보기좋게만 내려온 감룡(북방에서 남방으로 내려온 맥) 자락의 덩실한 언덕위에 정혈돼 교규통맥과 용진혈적의 이법에는 거리가 멀게 조성됐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주저스럽기만 하다. 또 일반적인 능 배치와 상반되게 덕종 능이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이제 동구릉과 서오릉의 간산기를 마무리하고 다음회에 1산1혈의 왕릉과 왕릉기행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제37회부터 역대 대통령의 생가와 선영으로 풍수기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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