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신하의 선산은 용진혈적인데 왕릉의 진혈은 왜 비켜갔을까”
[풍수기행]<36>왕릉으로 떠나는 풍수기행(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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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능의 점혈과 용사는 왕실은 물론 국가경영에 중요한 변인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필자가 왕능을 돌아보고 간산평을 쓰면서 용진혈적의 풍수지리적 만고불변의 이치에 들어맞게 정혈된 왕릉보다 다소 비껴간 경우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두고 두고 분석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가 분명하다.
하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조선 27명의 왕중 자식이 없는 경우가 8명이고 적자 대통은 8명에 불과했다.
또 폐출된 왕이 2명, 단종 처럼 종친에 의해 양위되거나 피살된 경우도 있었다.
왕능은 국운보다 그 왕실의 가족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대입, 유추해 보면 조선 왕능은 용진혈적에 들어 맞지 못한 사례가 결코 적잖이 있음이 입증된다 하겠다.
풍수연구가들 사이에 “조선조 500년은 천운이며 27명의 왕릉 중 영릉(세종대왕) 헌릉(태종) 광릉(세조) 장릉(인조) 외에는 길지명당이 없는데다 이 4개소의 왕능마저 군왕지지는 아니다”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태교로 용맥이 조화를 이뤄 용진혈적 요건을 갖춘 덕릉은 그 음덕의 힘을 발현했던 진혈이었음이 발복에 의해 입증되기도 했다.
덕릉은 추존 덕흥대원군의 능소다.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 덕송리 수락산 아래의 국사봉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동구릉을 작혈시키기 위해 포천시 백운산에서 발원한 강세룡이 죽엽산, 용암산, 깃대봉으로 이어져 내룡하다가 수락산을 우뚝 세운 뒤 그 동락(東落)에 간괘맥과 건괘맥이 감괘맥의 선매를 받아 용진혈적의 태교혈을 맺힌 자리에 자리잡았으니, 그 발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위력은 그 후손에 의해 300년동안 발휘됐다.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아들로 창빈 안씨 소생이다.
1542년 정인지의 손녀와 혼인했다. 슬하에 세아들(하성군 하릉군 하원군)을 두고 30세에 숨을 거뒀다. 그후 1567년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그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조선 14대 왕으로 등극했는데 그가 바로 선조다.
이렇듯 진혈에 자리잡아 발음의 기운이 확인된 왕릉을 관심밖에 두고는 형세만 우미(尤美)해 천하의 명당길지로 꼽혀 풍수연구가들의 답산 필수 코스로 선정된 홍릉과 유릉은 그 형국에 비해 진혈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음이 차츰 드러나고 있다.
왕릉의 후사로도 이는 증명된다. 고종이 생전에 국풍 전기응, 주운한, 김광석, 제갈책으로 하여금 신후지지를 선정하게 했다. 그 곳이 바로 홍릉이다.
하관을 위해 천광을 해 보니까 ‘500년 권책지’란 표석이 출토됐다고 한다. 의기양양해진 국풍들은 천하명당인 ‘매화낙지형’이라고 주상에게 보고 하고 묘역을 호화롭게 조성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용진혈적과는 거리가 먼 불성태교한 자손 패절의 흉지였다.
유릉은 순종의 능소다.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 당시 국풍인 김기응, 김공석 등이 기룡혈의 대지명당이라 해 능묘로 선정했다. 하지만 이곳 또한 애석하게도 국중(局中)의 수세가 모이는 불성태교의 가국지였다.
그런데 홍릉과 유릉 인근에 근조산과 진산을 함께 하고 있는 안동 김씨 서윤 번과 남양 홍씨 부인의 묘소와 여흥 민씨의 산산이 대지명당에 자리잡고 있어 풍수지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산도 참고>
김번의 옥호저수형은 학조산사의 소점으로 결정됐는데 조자손(祖子孫) 3대에 걸쳐 66년간 국권을 휘어잡고 좌지우지 했던 인재가 수많이 배출됐다.
여흥민씨 선산인 보검갑출형은 근조산인 묘적산을 안산으로 하는 회룡고조형국의 3태교구의 대지다. 민영기 대신의 13대 조산인데 3명의 왕비가 배출되고, 한말에 명성왕후 민비의 비호아래 민영환, 민영준, 민영기, 민태호, 민승호 등은 30년간 국권을 좌지우지했다.
다시말해 근조산을 함께하고 있는 왕릉은 허화가국인데 반해 신하의 선산은 천하대지의 요건을 갖춘 진혈이었던 것이다.
조선 왕릉중 최고의 수혈로 알려진 영릉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원래 세종의 영릉은 경기도 광주땅 태종의 헌릉(현재 서울 강남구 내곡동) 옆에 있었다.
소헌왕후가 승하하기 1년전 세종은 예조판서 김종서 등에게
헌릉 근처에 자신의 능자리를 잡도록 명령했다.
세종의 유언으로 1450년 소헌왕후 옆으로 능침을 정했다.
그후 영릉의 이전문제가 제기된 것은 세조때였으나 세조의 장례가 끝나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또다시 영릉을 옮기는 문제가 본격 논의되기 시작해 결국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된다.
영릉의 혈처는 그 형국이 빙글돌아, 다시 주산인 북성산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국에 속한다.
이렇게 볼때 북성산의 내룡맥은 빙글돌아 영릉쪽으로 와서 뒷편 남한강의 삿갓바위에 부딪혔다가 북성산을 향해 되돌아가는 형국이 된다.
혈이 앉은 자리는 두마리의 봉황이 서로 즐기는 양봉상락형이라고도 하고 그 형국이 모란꽃이 반쯤 핀 모습과 같다해서 모란반개형이라고도 한다. 형국의 아름다움이나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돌아 앉아 혈처에 이르는 용세가 형기와 함께 이기의 요건에 충족돼 용진혈적을 형성해 서기어린 지기가 혈장에 맴돌아 서리는 것이 핵심이다.
영릉은 다른 왕릉과 다르게 회룡고조형으로 결혈했으며 삼태교구의 용맥이 조화롭게 음양 배합을 비뤄 참된 용의 교구가 성립된다.
다만 그 용맥의 본원이 후중하거나 특립특출한 기상이 적어 용세가 강세룡에 미치지 못하고 입암에 반사돼 혈처에 이르는 성봉이 현무정으로서 좀더 고수(高秀)하지 못한 점이 옥에 티라고나 할까.
그래서 장상(將相)의 명혈로는 모자람이 없지만 군왕지지로는 아쉬움을 남는다고 전해진다.
왕릉을 돌아보면서 끝내 풀리지 않은 궁금증은 그 시대에 천하대지의 명당을 잡아쓴 신하들의 부귀영화는 보장받게 한 지사의 안목과 왕릉을 길지명당에 소점하지 못한 당대 최고의 국풍의 안목이 왜 그리 차이가 컸을까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안동 김씨와 여흥 민씨의 사례는 물론이고 동래 정씨외 반남박씨등의 사례도 참고해볼 만하다.
반남 박씨는 전남 나주 반남땅 봉치의 명당 길지를 쓰고 정승 7명, 대제학 2명, 문과급제자 215명을 배출했다.
광산 김씨는 조선 8대 명당인 전북 순청 인계면의 천마시풍형의 대지에 김극뉴를 안장하고, 정승 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 문과급제자 253명을 배출했다.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이 문묘에 배향됐다. 이밖에 한산 이씨, 광주 이씨, 달성 서씨, 연안 이씨 등도 명당을 쓰고부터 발신해 부귀영화를 누렸고 나라살림을 좌지우지했다. 지면관계로 다 소개하지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 왕릉을 뒤로하고 역대 대통령 6명의 생가와 선영을 간산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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