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선조의 괴로움 호소…이장 통해 후손 평화이뤄”
[풍수기행]<53> 현몽과 적덕에 의한 명혈득지(3) 꿈속에서 선조의 괴로움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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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공통적인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채 현재도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프로이드의 ‘꿈의 연구’와 그 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다는 쉐르너가 1861년에 발표한 ‘꿈의 정의’, 그리고 위대한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꿈에 대한 견해에 이르기까지 꿈에 관한 연구와 가설적 검증이 수세기에 걸쳐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필자도 현몽, 즉 죽은 사람이나 신령 따위가 꿈에 나타나 일러주는 계시와 암시적 현상에 의존해 ‘현몽과 적덕에 의한 명혈득지’편을 쓰고 있다고 밝힌다.
우리 전래의 꿈에 대한 분류에 근거해 단순화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가장 확실한 것은 꿈은 다가올 사건이나 상황을 틀림없이 예지해주고 있다는 수 많은 사례들이 그 신빙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꿈을 잘 꾸는 사람 또한 제한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 현실로써 입증되고 있다는 점 또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번 풍수기행의 소재인 ‘현몽에 의한 선조의 괴로움-이장으로 해결’ 역시 영몽이나 정몽에 관련성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사례는 쑥스럽고 민망스럽기는 하지만 필자의 일가에서 겪었던 사실에 근거를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산도 A>지점에 필자의 직계 선대가 안장된 이후와 <사진>에 필자의 선고를 조장한 다음부터 필자의 모친(현존 87세)의 꿈에 선대가 나타나 “추워서 견디기 어렵다. 이불을 두텁게 덮어달라”며 괴로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 꿈은 선대의 제삿날을 한 달쯤 앞두고 주기적으로 계속됐다.
오랜 세월이 지난후에야 선대의 현몽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선대의 이장을 작정하고도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인 5년전 비로소 그 숙원 과제를 모두 해결했다.
이후 모친의 꿈에 애걸하던 선대들이 비단옷을 입고 매우 편안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제시한 선대의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 저간의 사정이 많았다.
그 것은 마치 얽힌 실타래 처럼 복잡하다. 결국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자는 냉가슴을 앓으면서 미치지 못한 풍수지리학의 이론과 실제를 다잡아 익히고 깨우치려는 노력이 20년동안 계속됐던 것이다.
지금 노년기를 맞고 있는 필자와 같은 세대들 치고 풍수지리에 관한 애환을 한번쯤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필자 역시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스스로 치부하면서 6대 조부모 산소부터 선고의 산소에 이르기까지 이장을 했던 것이다.
부끄럽게도 필자 일가의 사례를 소재로 삼아 이렇게 쓰게 된 것은 가장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친의 동의를 받지 않고 집안 이야기를 세상에 노출시킨 것이 매우 경망스럽고 염려스럽지만 종친의 이해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야기는 39쌍의 쌍둥이가 태어난 예의 쌍둥이마을에서 시작된다.
쌍둥이마을은 전남 여수시 소라면 현천리 중촌동에 소재하며 이미 남도일보 풍수기행의 ‘여수 현천리 쌍둥이마을’(2005년 10월 10일자)편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이 마을은 양택풍수로 말하면 일지스님의 결지 기록대로 부자와 쌍둥이가 많이 나올 연화부수형의 명혈대지라고 알려졌다.
마을이 들어선지 200년을 전후해서 이미 한 터의 세곳에서 만석군이 연이어 나왔고 39쌍둥이는 기록이 깨어지지 않은채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도면참고>
가무내(현천의 변형된 마을이름)하면 부자마을로 널리 알려져 나그네들이 사랑방 손님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그 중에는 사주, 관상의 대가라고 자칭하는 인사들과 풍수지리의 명사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찾아들어 명당길지를 찾아준다는 구실로 한 겨울을 지나며 사랑방을 지켜왔다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 많은 명사들중 특히 필자의 종갓집과 인연이 닿은 지사는 당대에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등에서 명지사로 불린 ‘오산’선생이었다고 들었다.
오산 선생은 필자의 선고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왜냐 하면 부잣집 형제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선고는 남부럽지 않게 호의호식하면서 살아오던중 매장한지 10년이 넘게 된 조모의 산소를 파묘해보니 육탈이 전혀 안된것을 직접 확인하고 난뒤 전혀 문외한이던 풍수지리에 관심을 갖게 됐고 ‘분명 지상의 땅은 모두 같은게 아니라 길지와 흉지가 따로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 종가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위선사(선대의 산소를 길지에 장사지내는 일)에 전혀 뜻이 없는 것을 간파하고 장손도 아닌 자손의 입장인데도 위선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요한 일이 필자의 선고와 오산선생의 주관으로 진행되고 매듭지어 졌다는 점이다.
오산 선생은 명지관의 명성에 걸맞게 옛 선사가 남긴 결록에 수록됐거나 그 지방에서 명혈로 소문난 곳에 점혈했던 것이다.
광양땅 일우에 모셔진 증조부 모산소가 홍선출해형, 조모산소 역시 광양 진상땅 각산아래 갈우음수형, 조부산이 있는 구례의 파상반룡형, 산도에서 적시된 A지점의 회룡은산형 등 제대로만 전혈처를 찾아 선조의 체백을 안장했다면 선영의 안혼영백과 더불어 그 후손은 발음에 의해 벌써 큰 인물이 줄지어 나왔어야 풍수지리학의 본질인 동기감응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로 종가의 쇠락과 뜻하지 않은 인재(人災), 그리고 입현천(入玄川)의 종가가 9대에 와서 그 대가 그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 구례로 옮긴 필자의 집안도 원인 모르게 점점 쇠락의 기운이 도래하는 등 여러 정황으로 볼때 심각하게 위선사를 검토해야할 시점을 맞고 있었다.
이런 처지에 놓이고 모든 종친의 걱정이 더해지자 필자의 모친이 예의 ‘꿈 이야기’를 뒤늦게 털어 놓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필자는 모친의 꿈이야기를 듣고 필히 이장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필자가 “어머니 왜 빨리 꿈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제야 하십니까”라고 원망섞인 문제 제기를 했지만 “오산 선생과 어른(필자의 선고)이 어련히 알아서…”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후 15년 넘는 세월은 필자에게 있어 각고와 고행의 가시밭길이라 할 만큼 너무나 혹독한 짐을 진채 오직 용진혈적의 풍수지리학 본질 접근에 일로 매진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절대절명의 명제를 앞두고 겨우 교구통맥의 실마리를 터득하고 용진혈적의 중요함과 그 실제 응용 기법을 더듬어서 명혈대지는 아니더라도 수맥살기를 면할 수 있는 자리를 정해 선조 이장의 중대한 역사를 시행했던 것이다.
그 결과 선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려는 의지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안도감을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필자가 터득한 소중한 교훈은 풍수지리학의 바른 구현은 형기론과 이기론중 한 쪽에만 의존하거나 집착하면 절대 안되고 두가지 변인 모두를 업그레이드 시켜 조화적으로 구사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용진혈적에 접근되지 않으면 아무리 수혈처럼 보여도 취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요인이지만 선대에 관한 현몽도 잘 헤아려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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