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덕을 베풀면 자연히 명당길지 얻어 쓴다”

화이트보스 2009. 1. 21. 14:45

[풍수기행]“덕을 베풀면 자연히 명당길지 얻어 쓴다”

[풍수기행] <51> 현몽과 적덕에 의한 명혈득지(1) 어사 박문수의 사례


 






풍수지리의 명당 이야기 중 재미있는 소재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길지명당을 얻어쓴 행운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좋은 일을 많이한 ‘적덕군자’나 바르게 살아 온 ‘선덕군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간간히 흥미를 더해주는 명당 얘기 중의 또다른 소재는 꿈속에서 계시를 받아 뜻 밖에 명당을 얻어 썼다는 ‘현몽에 의한 득지’에 관한 내용이다.

이는 선행을 이끌어내기 위한 사회의 계몽적 측면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명당과 적선지가’의 관계성은 단순히 선행과 효행을 포장하려는 유인체제의 강화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의미는 단순성을 뛰어넘고 있다.

남에게 봉사하고 좋은 일을 찾아서 행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순수할 뿐 아니라 탐욕스런 사심으로부터 자유스럽기 때문에, 사물을 보는 시각과 선악을 바르게 구분하고 판단하는 슬기로움이 있어, 옳은 말을 옳게 받아들이고, 그른 말은 그르게 판별하는 건실한 생각이 체질화된다고 한다. 명당에 대한 부질없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직 발복에 초점을 맞춰 혹세무민하는 속사(俗師)의 말에 전혀 현혹되지 않고, 정통풍수에 밝은 지사다운 지사를 만나게 돼 결국 숭조사상과 효심에 의해 선영을 명당길지에 쓰게 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하겠다.

그래서 이번회의 주제를 ‘현몽과 적덕에 의한 명혈득지’로 정하고, 그 첫번째 주인공을 근세사의 한 면을 장식할 만큼 한 분야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던 ‘어사 박문수’로 내세웠다.

박문수는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경종 3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암행어사, 도승지, 호조판서, 병조판서, 어영대장, 영의정 등 두루 관직에 역임했다.

박문수는 고령박씨의 후예이며, 조선 명조때의 재상으로 자는 성보, 호는 기은이다. 그는 지금의 평택에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랐다.1723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사관이 되었고, 병조정랑에 올랐으나 노론의 집권으로 물러났다가 1727년에 사서로 다시 등용됐다. 이 과정에서 남다른 업적을 쌓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아 암행어사로서의 행적이 후세까지 전해지고 있다.

박문수 이전과 그 이후에도 임금이 지방관리들의 행동과 백성들의 생활을 알아 보기 위해 몰래 보낸 암행어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런데 유독 암행어사의 상징이 박문수처럼 각인된 것은, 박문수가 몇 차례 암행어사 활동을 통해 돋보인 치적을 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장원급제 했던 과거시험에서 부터 매우 인상적인 설화를 남겼다. 그와 더불어 본인이 묻힐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정하는 일도 쉽게 잊혀질 수 없는 사례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물론 박문수에 대한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게 꾸며지거나 침소봉대 돼 내려오는 픽션의 성격이 아니라 문헌설화(기문총화, 계서야담, 청구야담, 선언편, 동야휘집, 대동가문, 실사총담)로 전해지는 넌픽션이다.

박문수에 관한 문헌설화는 ‘박문수의 중매담’, ‘박문수와 물 긷는 여종’ , ‘박문수의 등과(登科)’ 등 세가지로 나누어 진다. 이 중 과거에 응시해 등과했다는 설화는 문헌과 구전으로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청구야담에 의해 ‘글을 전혀 못하는 박문수가 남의 글을 훔쳐 급제했다’ 는 것으로 전해진 문헌설화는 ‘간부에게 살해당한 혼령이 원수를 갚기 위해 초립동으로 환신해서, 박문수에게 과거시제의 글귀를 가르쳐 주었다’는 구전설화와 비교된다.

이번 풍수기행의 소재는 바로 어사 박문수의 등과에 얽힌 이야기를 구전설화에 근거해서 쓰는 동시에, 박문수가 노년에 이르러 자기자신의 신후지지를 점혈하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들 역시 구전설화에 따라 쓰기로 했다. 곰곰히 따져보면 과거등과와 관련된 청구야담의 문헌설화는 구전설화보다 설득력이 덜하다. ‘남의 글을…’ 운운하는 대목은 너무 논리성을 상실하고 있다. 왜냐하면 과거시제에 답이 같게 되면 두 사람이 동시에 낙방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구전설화에 더 무게를 두고 이에 관한 사례를 소개한다.

박문수가 과거 보러가는 도중에 과천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다가와 “어디로 가는 길이냐” 고 묻자 “과거보러 한양을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백발노인이 말하기를, “이런 정신나간 사람봤나 과거시험은 이미 이틀 전에 끝났어”라고 말하자, 꿈속에서도 소스라치게 놀란 박문수가 되 물었다. “그럼 시제(詩題)가 무엇이었나요” 라고.

노인이 답하기를 “시제는 ‘낙조(落照)’라고 하는데, 금년 장원에 뽑힌 글은 다음과 같은데 끝 구절은 잊었다”고 하면서 7언절구로된 총 56자 중 끝구절 7자만 제외한 나머지 시를 읊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3일 앞둔 과거시험 날짜에 맞춰 과장에 들어서 긴장된 마음을 가누고 시제를 확인하니 사흘전 꿈속에서 그 백발노인이 현몽해 준 대로 ‘낙조(落照)’가 아닌가.

박문수는 노인이 꿈속에서 읊어준 7구절의 글을 쓰고 마지막 7구가 떠오르지 않아 애를 태우다가 문득 끝구절의 7자를 만들어 시제에 따른 시작(詩作)을 완성해 제출했다.

이 글로 시관(試官)들 사이에서 “사람이 쓴 글이 아니라 귀신의 글이다. 끝구만 인작이다”는 등의 시비가 있었으나 결국 장원급제해 관직에 올랐다. 이후 시기를 맞아 처음 호서(湖西)어사에 제수돼 석양께 천안에 당도했다. 그 때 어느 무덤 앞에서 슬피우는 소복 여인이 있어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슬피우는 이유를 물었다. 그 여인은 “간밤 꿈에 선친의 말이 노랭이 진사의 애비를 묻었으니 원통하다고 해서 실제와 보니 이렇게 되어 있어 하도 기가 막혀 울고 있다”고 말했다.

박 어사는 범인을 찾아 김일수의 시체를 거두어 원 자리에다 후장해 주었다.

이 일화에 얽힌 사연이 비약해 과거 전에 시제와 시구를 일러준 것에 연결이 되기도 한다. 즉, 박문수의 사람됨을 알아차린 김일수의 선명이 미리 현몽을 해서 과거급제케 하면 필연적으로 그 가문에 닥치게 될 한을 풀어주고도 남음이 있어 그 해결사를 박문수로 정해 천안 땅에 오게 했을 것이라는 구전설화에 바탕을 뒀다는 것이다.

그 후 박 어사는 날로 승차하며 병조판서까지 지냈다. 소론의 영수로서 시론(時論)을 바로 잡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잘해 별호가 ‘직간공(直諫公)’이다. 노경에 국풍과 같이 목천(木川)땅 흑성산하에 신후지지를 정해서 봉분을 지으려는 참에 그날 밤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박 대감 저는 김일수 올시다. 30년 전 은혜에 보답하고자 왔다. 대감이 쓰시려는 신후지지는 200년 후 나라에서 긴히 쓸 자리다. 대감의 만년유택은 저쪽 산 너머 은석산 아래의 ‘장군대좌형’의 대지명당이다” 라는 말을 마치고 홀연히 사라졌다.

박 어사는 현몽을 좇아서 은석산 아래 아우내 장터 위쪽에 자기 신후지지를 정하고 훗날 정명을 다해 타계한 뒤 그의 유택이 지금의 병천 위쪽 은석산 아래로 쓰여졌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문외한이 봐도 명당으로 보이는 목천의 그 자리는 ‘독립기념관’의 터가 됐다. 산도의 아우내 장터는 유관순 열사가 3·1독립운동을 일으킨 역사적인 땅으로 유명한데 그 병천시장은 ‘장군대좌형’의 병졸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고령 박씨들이 설치한 장터이다.

올곧게 살면서 선공후사의 본을 보이며 한 생애를 맑게 살아 온 박 문수어사였기에 이런 설화를 남겨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현몽에 의해 명혈대지의 영구지지에서 영면을 하고 있다고 믿어본다. 다음은 적덕의 공으로 꿈에 얻어 쓴 명당 이야기를 소개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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