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왜 일어났는가?
벌써 전에 철저하게 구명되었어야 할 문제인데, 그러나 지금도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일본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높은 학계 수준에도 명답이 없는 모양이다.
왜란을 다룬 <조선역朝鮮役> 상·중·하 3권의 대저를 낸 일인 사가日人史家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峯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조선도 큐슈나 시코쿠같이 생각하였으니 전혀 정세에 어두웠다"는 것이다.
왜란의 원인은, 우리를 소홀히 본 히데요시의 노망으로 돌리는 견해는 최근의 일본 매스콤에서도 동조자를 볼 수 있다.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교섭에 명확하게 외정外征이나 대외 교섭이란 의식이 없었고, 국내의 적대 세력을 처리한 것과 같이 조선 전토를 점령하고 북반사도北半四道와 서울을 조선 국왕에게 주고 조선왕을 선봉장으로 북경에 쳐들어갈 구상이었다." 한다(<문예춘추> 1973년 8월호 '이자야 벤다산' "중국인과 일본인", "미스테리의 조선 출병" 조).
히데요시가 그 때에 노망한 것은 확실하다. 이를테면 정세를 탐지하러 간 우리의 통신사를 국왕의 대리로서 귀복歸服의 뜻을 표하러 온 것으로 인식한 점 등이 그것이다.
왜란에 앞서서 대대적인 출사 준비가 진행되었고 그것은 일본 류큐에 내왕하는 중국 상인 또는 일본에 거류 중인 중국인에게 탐지되었으며 그들은 곧 본국에 상세하게 급보하였다. 제보자의 한 사람인 남큐슈南九州 사쓰마주에 와 있던 허의후許儀後는 의업醫業으로 수장守將의 신임을 얻어 정세에 밝았는데, 그에 따르면 원정의 동기는 명나라 해적들로부터 아주 쉽게 명나라를 정복할 수 있다는 등 부정확한 정보를 듣고 명나라의 방어력을 경시한 탓이었다고 한다.
여하간 히데요시가 우선 조선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노망일지는 몰라도 분명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 우리측의 견해를 종합 요약한 것으로 보여지는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를 보면
"히데요시는 사방을 평정하여 국내를 통일하고 백만 정병을 휘하에 두고 기고만장하였을 뿐 아니라 내환을 염려하여 제후의 병력을 원정遠征에서 소모시켜 버리려고 중국 침략을 생각하였다. 그런데 해로로 강남을 치는 것은 전날의 왜구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단념하고 먼저 가까운 조선을 근거로 삼고 육로 진격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의 일을 목도한 우리 식자의 인식이었는데, 아마 가장 진상에 가까운 논평이라고 생각된다.
히데요시 자신은 자기 의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보낸 국서에서
"인생은 백 년도 채 못 되는데 언제까지나 이 섬나라에 거처하랴. 먼 길을 무릅쓰고 명나라에 쳐들어가 4백여 주에 일본 풍속과 정화政化를 베풀겠다. 내가 대명大明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조정助征하면 더욱 인맹隣盟이 두터워질 것이다"(요지)
라고 그 심중을 토로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전쟁의 선언이었다. 그럼에도 '一超直入大明國' 운운은 조공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 겐소玄蘇 등 중간 용사자用事者의 감언에 넘어갔다는 것은 놀랍다. 토쿠토미도 지적한 대로 "조선 정부에 인물이 있다면 이 답서를 일견하면 즉각 위기가 목첩에 다가오고 있음을 각오"해야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극렬하고 노골적인 외교 문서를 받고도 여전히 경계하는 바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인 동시에 바로 그 점에 왜란을 일어나게 한 우리측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방비 없는 우리는 마치 자석과 같이 그들의 야욕을 끌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선조 20년(1587) 히데요시는 사절을 우리에게 보내어 통신을 요청하였다. 국서에는 전에 없었던 교만한 문구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바닷길이 어둡다[海路迷昧]'를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것은 이미 10여 년 전 일이고 대마도인은 매년 왕래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 나라의 사정을 말하지 않아 우리는 히데요시의 국내 통일을 이 때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정세에 어두웠던 점은 메이지 유신 때와 흡사했다.
히데요시는 재차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겐소 등 고위 사절을 보냈다. 방비가 없는데다 마침 큰 흉년이 들어 우리는 통신 요구를 일축할 수도 없는 처지라, 통신사를 보내기에 앞서 우리의 피로민被虜民 및 왜구를 안내한 반민叛民 등의 송환을 요구하였는데 일본은 곧 이를 수락하였다. 이에 통신사 파견 여부로 중신 회의가 열렸고 일본의 국내 사정을 살피고 오는 것도 실계실계가 아니라는 논의가 다수의 찬성을 얻어 선조 23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은 현해탄을 건넜다.
다음 해 봄 그들이 환국하여 정.부사가 정반대되는 내용의 보고를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서인 황윤길은 왜군이 곧 침구할 것이라 하고 동인 김성일은 그럴 리 없다고 하였는데, 마침 동인이 정권을 잡고 있던 때라 동인측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모처럼 착수했던 방어 공사도 중단되고 말았다.
김성일은 유능한 영재英材였다. 그의 형안炯眼이 사태를 간파 못 했을 리는 없으며 그러므로 그의 망국적亡國的 책임은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의 본의는 민심의 소란을 막는 데 있었다는 등 <징비록懲毖錄>을 위시한 동인계 사서는 그를 변호하고 있는데, 이러한 옹호는, 그러한 보고가 나온 것은 동인측 전체의 책임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것은 안방준安邦俊이 이미 논단한 것처럼 '偏黨之故也' 곧 당쟁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난전亂前에 역역力役의 번흥, 공부貢賦의 가급苛急, 형옥刑獄의 번원煩寃 등으로 민심은 나라를 이반하고 있었으며 일대 개혁이 단행되지 않으면 외침이라 아니라도 나라는 불원 토붕의 화를 당할 것이라는 위기 의식이 구안지사具眼之士에 의하여 되풀이 표명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였다.
우유부단한 선조에게는 개력을 단행할 만한 용기도 견식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신하에게 권세가 옮겨질까 봐 이파 저파를 교대로 권좌에 앉혀 당쟁의 풍조만 조장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처음 율곡을 중용하여 서인들이 요직에 앉더니 그의 몰락 후 동인이 득세하였다가 소위 정여립 역모 사건을 전환점으로 하여 동인은 서인 정철 등의 무서운 추궁을 받게 된다. 정철 등이 날조된 옥사를 핑계삼아 혹독한 수법으로 수십 명의 동인 명관을 죽이고 수백 명을 사지로 몰아 동인의 서인에 대한 원한은 골수에 사무쳐서 보복의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렇던 정철도 건저建儲 문제로 선조의 불신을 사서 몰려 나고 이어 간당일소奸黨一掃를 장담하던 동인 홍여순洪汝諄이 대사헌에 앉게 되어 바야흐로 서인에 대한 대공세가 개막되려는 그 시각에 국운이라 할까 통신사가 귀국하였던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서인을 철저하게 규탄해야 할 이 시기에 서인 주장에 동조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서도 있을 수 없다고 동인은 생각했을 것이다. 김성일은 그러한 동인들의 뜻에 따라 당파적 견지에서 그러한 보고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동서분당이 형세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데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권력이 컸던 선조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아니, 그것은 선조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문제의 본질은 세습군주제도世襲君主制度 그 자체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김용덕 1984 <임진왜란은 왜 일어났나> <<한국사수록>>, 을유문화사, 269-272쪽.
출처 : 고리아이 역사공부방 : Clio of Corean
글쓴이 : 고리아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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