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스크랩] 이 시대에 이순신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이 그리운 까닭은.

화이트보스 2009. 1. 26. 16:54

이 시대에 이순신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이 그리운 까닭은.

 

 

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바닷가 가을빛은 짙어만 가는데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떴네. 나라위한 근심으로 뒤척이는 밤 싸늘한 새벽달이 활과 칼을 비추네. (충무공의 詩 중에서)


임진란 전후, 끝없는 소모적 당쟁으로 인하여 조정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자연히 국가대사는 힘 있는 당파의 정치적 해법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었으며 충(忠)과 진실은 땅에 묻히고 군인이든 관리든 어느 당파 권력자의 사랑방에 줄을 대느냐에 따라 가문의 사활과 출세의 향방이 가려지던 암흑의 시대였다. 심지어는 국경 수비를 담당한 장수조차 임지를 비워두고 권력자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눈도장이나 찍고 충성 맹세로 자리를 보장받던 시기였다. 그 어지러운 시국에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독야청청 하던  보잘 것 없는 변방의 장수 이순신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독했으리라.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노라면 나라와 백성들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고독한 장수의 가슴 저미는 쪽빛 독백이 고스란히 묻어나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조정은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군신(君臣) 모두가 한목소리가 되어 변방의 장수하나를 사정없이 공격하였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이리떼처럼... 그토록 고된 시련을 겪으면서도 얄궂은 운명에 순응하는 순교자와 같은 장군의 거룩한 면면은 영원토록 존경 받아야 되는 이유이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양난 전투에서 네 아들이 전사했고, 두 번째 백의종군하여 임지로 향하는 도중에 어머니마저 잃었다. 셋째 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왜군에 맞서다 전사했다는 비보를 전해 들으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다더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딜 갔느냐 ...(중략) "


400여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당시 이순신장군의 심정을 생각하노라니 그것이 마치 현실인양 필자의 가슴은 미어지고 애석하기 그지없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이었지만 정치색에 물들지 않고 묵묵히 한길을 걸었던 이순신장군! 그로 인하여 죽음처럼 엄습해오는 고독을 나라와 백성을 위한 올곧은 우국충정으로 승화시켰던 성웅 이순신장군! 만약 그분이 권력자의 눈길이나 탐하고 여기저기 당쟁의 패거리들과 어울려 소모적 논쟁에 휘말렸더라면 우리는 지금 400여년 넘는 일본의 통치 속에 벌써 흡수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로지 군인의 본분을 다한 그분의 나라사랑이 거북선을 만들고 오합지졸의 수군을 최정예 부대로 만들었으며 23전 전승이라는 전대미문의 대기록과 함께 오늘날의 우리를 있게 한 것이다.


그분은 끝없는 중상모략, 시기질투, 권모술수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한 번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구차한 탄원 그리고 궁색한 변명과 얕은꾀를 도모하지 않았다.


조정의 군신(君臣)들은 이순신장군을 몇 번이고 내치고 짓밟으며 극복하기 힘든 고통과 수모를 안겨주었지만 현명한 백성들은 이순신장군을 어버이처럼 따랐으며 후세의 사가들은 그분을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숱한 당쟁의 피바람 속에서도 중심(中心)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신념을 지켜낸 이순신장군의 거룩한 희생은 이 땅의 정치인들과 정치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되새겨 볼만한 가슴 뭉클한 교과서이다.



"나는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국가와 혁명과 나 中에서 발췌> 혼탁한 세상 ! 영욕을 들이마시고도 자신은 부패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혁명의 맑은 혼을 유지했던 혁명가 박정희 !


바다는 3%의 소금으로 인하여 부패되지 않는다고 한다. 1917년 11월 14일, 대한민국 최고의 지도자 박정희는 식민지 백성으로 첫 울음을 터트린다. 태어나면서부터 그에겐 조국이 없었고 그의 일생은 조국의 운명과 같이 늘 암울하기만 하였다. 일제 식민지와 불완전한 해방 그리고 육이오 동란을 거치면서 박정희 개인의 인생사도 파란만장한 굴곡과 애환을 겪어야 했다. 필자는 박정희를 혁명가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먼 훗날 역사는 그분을 전직 대통령이기에 앞서 진정한 혁명가로 기록할 것이다.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던 군문에서 쫓겨나고, 의지하던 형님께서도 돌아가셨다. 어디 그뿐이랴 사랑하는 여인이 매몰차게 이별을 고하고, 노모마저 세상을 하직하셨다. 이 모든 것들은 박정희란 개인에게 연 이어 닥친일들이다. "하늘은 한 인간에게 어찌 이리도 가혹한 시련을 내리셨을까 ?" 양 날개모두 꺾이우고 울적한 마음에 술잔을 기울이던 박정희는 관할 헌병대장에게 뺨까지 얻어 맞는 잔인한 수모까지 당해야만 했다. 당시 용산 삼각지를 흔들리며 배회하던 박정희가 바라본 하늘빛은 무슨 색깔이었을까 ...



필자는 왜  박정희대통령이 이순신장군에 대한 연민의 끈을 놓지 못하고 그토록 집착했는지 조금은 알수 있을것 같다. 두 분께선 몇 백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때론 부모자식처럼 때론 형제처럼 많은 대화를 나누셨을게다. 필자는 두분께서 숱하게 나누셨을 대화 내용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것 같다.



외롭고 고독했던 혁명가 박정희!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세상의 비난을 홀로 다 받는 것 같은 처절한 고독 속에서도 담대하고 초연했던 한 혁명가의 슬픈 자화상을 본다. 그분은 최후의 순간까지 삭풍 이는 겨울 들판에 홀로서서 눈비를 맞으셨던 것이다. 안팍에서 끊임없이 흔들어 대며 그분의 신념을 시험했지만 굳건하게 지켜내셨다.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고 끊임없는 역사와의 대화를 통해 올곧은 애국애족을 실천하셨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이 한마디 속에 함축된 굳은 맹세와 신념은 지긋지긋한 5000년 가난을 종속시켰고 끊임없는 공산화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4.19 이후 혼란스러운 위기 상황에서 그분의 결단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온전하게 지켜지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그분께서 행하신 지고지순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반석위에 올려 후세의 귀감으로 삼으리라.



당리당략과 시기질투에 눈이 멀 은 소수의 사람들은 우매한 군중들을 선동하여 박정희대통령의 흠집을 못내 안달하지만 70%가 넘는 현명한 국민들은 박정희대통령을 어버이같이 따르며 한없이 우러르고 있다. 정부는 기념관 하나 짓자는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마저 거슬리며 농락하고 있지만 4800만 국민들 한명 한명의 가슴속에 지어진 위대한 박정희기념관은 영원히 허물지 못할 것이다.

 

 

 

 

 

 

 

 

 

 

 

 

 

 

 

 

 

 

출처 : 박정희 바로 알리기 국민모임
글쓴이 : 운영관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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