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道路
제주도에는 5.16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로가 있다. 5.16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연결하는 가장 빠른 도로로서,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한라산 동쪽 허리 800여 고지를 넘어서 서귀포로 이어지는 약 45km의 도로이다. 5.16도로는 현재까지도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가장 빠른 도로의 지위를 지키고 있고, 5.16도로를 주행해본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서 5.16도로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5.16도로는 그 명칭으로 인해 좌파정권 하에서는 정치적 공격을 받기도 했고 도로 명칭을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 도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주장이다. 일부에서는 5.16도로가 '5.16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거나 '국토재건단을 동원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데, 5.16도로의 탄생이나 명칭에 '5.16 기념'이나 국토재건단은 관련이 없다.
5.16도로의 명칭은 공모를 통해 뽑힌 명칭으로서 5.16도로의 명칭은 제주도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애초의 명칭은 '제주시 서귀포 횡단도로'로 불려졌고, 나중에 만들어진 제2횡단도로와 구별하기 위해서 '제1횡단도로'로 불려지기도 했다. 참고로 국토재건단이 투입되었던 도로는 제2횡단도로였다.
5.16혁명이 일어나면서 제주도에는 김영관 해군준장이 12대 지사로 임명되었다. 김 지사가 제주에 왔을 때 제주는 돌 바람 여자의 삼다의 섬이 아니라 바람 홍수 가뭄의 삼다의 섬이었고, 거지 도둑 대문이 없는 삼무의 섬이 아니라 길과 물과 먹을 것이 없는 삼무의 섬이었다. 무인(武人)도지사는 4.3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주의 '재건'을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5.16은 제주에서도 길의 혁명, 물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제주도 혁명의 시발점이 된다.
김 지사는 박정희 의장이 초도순시했을 때 의도적으로 박정희 의장을 며칠 동안 제주에 머물게 하는 '작전'을 실행하여 박정희 의장을 제주도의 든든한 후원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무인 지도자와 무인 도지사가 이처럼 제주도에 애정을 가졌던 이유는 4.3의 위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제주도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두 사람이 제주에 반해 제주의 미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된 사실은 제주도로서는 축복이었다.
두명의 무인 지도자가 공통으로 제주에서 우선적으로 인식했던 것은 '길'의 필요성이었다. 당시 제주에는 포장 도로가 전무한 상태였고, 도로라고 할만한 것은 타원형의 제주도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일주도로가 전부였다. 제주에서 서귀포로 가는 길은 타원형의 외곽도로를 따라 빙 둘러서 가야하는 형편이었다. 제주와 서귀포 사이에는 한라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주시에서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로 가는 중턱에는 1930년대에 만들었던 길이 있었는데 5.16도로는 이 길을 기초로 계획되었다. 계획 당시 조사에 의하면 견월악까지는 겨우 차량이 진입할 수 있었고, 성판악까지는 소로길의 형태만 남아있었다. 성판악부터 서귀포 방면으로는 수풀이 우거져 도로의 형태도 남아있지 않은 형편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5.16도로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로는 재정이나 장비가 열악한 시대였고 한라산은 거대한 절벽이었다. 그리고 제주도 내에 포장도로는 전무한 상태였기에 횡단도로보다는 일주도로 포장이 급선무라는 주장도 있었다. 더욱이 당시에 국도의 포장 지원에는 1일 통행 차량대수가 800여대가 넘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는데 당시 제주의 사정은 차량 보유대수를 전부 합쳐도 300대가 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5.16도로가 먼저 건설되었던 이유는 일주도로 포장은 가난한 시대의 재정 탓으로 완전 포장까지에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었고, 당시 제주시와 서귀포의 왕래에는 제주도의 일주도로를 따라 둘러가야 했기에 차량으로도 5~6시간이 걸려야 했지만 횡단도로의 건설로 1시간 전후로 단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횡단도로 건설은 투자 대비 효용이 컸고, 제주도의 지리적 여건상 제주시와 서귀포 간의 직통도로가 여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5.16도로가 제주도의 막힌 숨통을 틔어주고 대동맥 역할을 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고, 극심한 반대 속에서도 김영관 지사의 추진력과 박정희 의장의 후원은 5.16도로의 산파역을 했다.
5.16도로는 탄생 배경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닮았다. 반대 속에서 탄생되었지만 그 열매의 진가는 오랜 세월 자손 대대로 누리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중앙정부의 압도적 지원 때문에 다른 지방의 질투와 견제 속에서 지금의 제주시청 앞에서 '제주 서귀포 횡단도로'의 기공식이 열렸다. 그 때가 1962년 3월 24일이었다.
5.16도로는 기공된 지 1년 7개월여 만인 1963년 10월 11일 개통식을 가졌다. 도로 포장은 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문제는 역시 재정이었다. 중간에 계획이 바뀌어 도로 포장폭이 넓어지면서 도로가 완전 포장되기까지에는 1966년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개통식은 역사적인 인파가 모인 가운데 흥분 속에서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개통식은 제주시와 서귀포 두 군데에서 개최됐다. 김영관 도지사는 제주시 행사 중간에 서귀포로 달려가 행사를 치렀으며, 행사가 끝난 다음에는 5.16도로의 중간에서 제주시와 서귀포 양쪽 주민들이 만나 얼싸안고 노래를 부르며 막걸리 잔치판이 벌어졌다. 서귀포에서는 5.16도로 개통을 기념하여 극장에서는 무료입장을 시켰고 술집에서는 가격 할인이 벌어지는 등 이날 하루 제주도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5.16도로를 따라서 제주시청, 세무서, 법원이 세워졌었고, 제주대학, 산업정보대학, 제주여중고, 중앙여고, 서귀포산업고, 그리고 여러 초등학교들이 5.16도로의 젖줄을 물고 도열해 있고, 제주의료원, 산천단, 성판악 휴게소, 숲터널길, 왕벚나무 자생지, 한란 자생지, 돈내코,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주의 문화와 역사가 숨어있는 곳이 5.16도로이다.
5.16도로는 성판악을 기점으로 제주시 방면으로는 중앙로로 이어져 탑동 해안가까지 달려 나가며 제주시를 이등분하고, 서귀포 방면으로는 급한 경사로 이뤄져 구불구불거리며 서귀포 시내로 뛰어든다. 5.16도로는 제주도를 좌우로 이등분하는 선이며, 산북과 산남을 이어주는 대동맥이 되었다. 막혔던 핏줄이 5.16도로로 혈액이 순환되면서 제주에는 수천 년 묵은 제주의 낡은 껍질을 벗겨내려는 혁명의 기운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지도자들의 순간의 판단이 국민의 평생을 좌우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만약 그 때에 5.16도로 건설이라는 결단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그 후의 환경단체들의 발호를 보아하건데 우리는 지금 5.16도로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한라산의 밀림을 뚫고 길을 내는 것, 그만큼 5.16도로는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 발상이었고 과업이었다.
그 과감한 발상에 걸맞게 5.16도로는 지금 오가는 차량과 관광객들의 차량으로 붐빈다. 그리고 5.16도로는 한라산의 허리를 지나가는 만큼 경사와 굴곡이 심하고 안개가 심하거나 눈이 많이 내리면 도로는 차단되기도 한다. 그만큼 5.16도로는 천의 얼굴을 가졌고 관광객들은 계절에 따라 변하는 한라산의 사시사철을 구경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고, 5.16도로의 숨은 비경을 제대로 본 사람들은 5.16도로의 포로가 되고 만다.
5.16도로는 제주도 혁명의 출발점이었고, 그 혁명적인 발상에 걸맞게 5.16도로는 지금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5.16도로라는 이름만큼 이 도로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5.16도로에는 그 구불구불한 길바닥에, 그 길가의 풀 한 포기에조차 선대들이 흘렸던 땀과 눈물이 배어있다. 5.16도로는 불가능에 도전하던 우리의 긍지이고 그 명칭조차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비바람(200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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