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피로맺은 우방 한미동맹

<4>워커장군 작전명 1호“Stand or Die!”

화이트보스 2009. 1. 26. 21:10

<4>워커장군 작전명 1호“Stand or Die!”

1950년 7월13일 미 제8군사령부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대구로 이동 설치됐다. 또한 이날은 이승만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한다는 서신을 보낸 날이다. 바로 그날 월턴 워커 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과 유엔기가 전달됐다.

7월13일 현재 증원된 병력은 미 제24·25사단 일부(선발)인 약 1만8000명이며 파병이 예정된 미 제1기병사단이 오기까지 아직도 1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전황이 매우 불리했다. 이 고비를 넘기기 위해 유엔군은 소백산맥까지 철수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즉 ①유엔군 및 한국군은 주력을 대전과 소백산맥을 축으로 축차 철수해 새 방어선을 구축한다 ②미 제24사단이 계속 대전을 방어한다 ③한국군은 차령산맥에서 소백산맥으로 이전해 제2군단을 전개시킨다 ④미 제25사단(일부)으로 소백산맥의 종심을 강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워커 장군은 이런 작전계획을 골자로 한 유엔지상군사령관으로의 첫 작전명령(제1호)을 발령했다. 작전명령은 ‘Stand or Die!’. 불퇴전의 결의를 장병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저지하느냐 죽느냐!’ 이는 당시 상황의 절박함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의 운명을 함축하는 결사의 구호였다.

워커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시 조지 패튼의 제3군 예하 20군단장으로 ‘워커 불도그’(Walker Bulldog)라는 별명을 가진 용감하고 적극적인 전술가였다. 그는 유럽에서도 공격작전의 권위자로 명성이 높았고 한국전쟁에서도 이러한 위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워커 장군은 1950년 7월13일 미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 낙동강 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평양탈환과 한만(韓滿) 국경선 진출을 지휘한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50년 12월23일 교통사고로 순직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트럭과 충돌,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때가 향년 61세였다.

미 육군은 워커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 최신형 전차인 M-41 경전차에 ‘워커 불도그’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가 싸운 한국에서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언덕에 미군의 휴양시설과 국립호텔을 건축, ‘워커힐’로 명명해 오늘날까지 그의 업적을 잊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