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지연전의 실패, 大田 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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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로써 철수로를 확보하라!” 사단장 딘(Dean). 이것은 미 제24사단장 딘 장군이 마지막으로 타전한 명령이다. 최후의 일각까지 진두지휘의 모범을 보여준 지휘관의 마지막 명령.
대전의 군사적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금강·소백산맥 축선을 얼마만큼 유지할 수 있는가의 관건이 되는 요충 중의 요충이었다. 그런만큼 대전 확보의 시한을 7월20일까지로 해 이 시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탱해야만 했다. 이는 포항에 상륙한 미 제1기병사단이 증원될 때까지의 날짜를 고려한 시한이었다.
딘 소장은 일본으로부터 급거 파견된 1개 사단으로 북한군 최정예 3개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 치열한 접전이 지속되면서 미군은 수적 열세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특히 북한군이 삼면 포위의 총공세로 나옴에 따라 시가전이 벌어지게 됐다. 심지어 딘 사단장 자신이 3.5인치 로켓포를 직접 메고 적 전차를 향해 사격하는 등 사력을 다해 싸웠다. 신속히 철수하라는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딘 소장과 부하들은 대전을 사수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포항에서 달려오고 있는 미 제1기병사단의 구원만을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촉박했고, 결국 딘 소장은 시가전에 종지부를 찍고 최종부대인 제34연대의 철수를 명령했다. 때를 놓치면 영동으로의 철수로마저 차단당할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차로써 철수로를 확보하라!”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대전이 함락되고 미 제24사단이 붕괴됨에 따라 사단장 딘 소장도 철수하지 못하고 실종됐다. 그 후 딘 소장은 8월25일 실종 36일 만에 전북 진안에서 적에게 붙잡혀 3년여의 포로생활 끝에 1953년 9월4일 쌍방 포로교환시 다시 돌아왔다.
딘 소장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12월부터 종전시까지 미 제44사단장으로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약 1년간 전투 중 제44사단에서 포로가 된 사람이 42명에 불과해 딘 소장은 이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겼다. 특히 그는 군인으로서 포로가 되는 것은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진 장군이 한국전쟁에서 적의 포로가 됐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는 또 자신이 북한군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기 때문에 스미스대대를 아무런 준비없이 출동시켜 죽미령 패퇴의 불명예를 자초했노라고 두고두고 자책했다. 부하의 잘못을 책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먼저 반성할 줄 아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딘 소장은 사실 한국과는 인연이 많은 군인이다. 미 군정기 후반의 군정장관으로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원조를 갈망하는 국군 수뇌부의 고충을 누구보다 이해해준 장성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