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피로맺은 우방 한미동맹

〈2〉절체절명의 위기, 한강 방어선

화이트보스 2009. 1. 26. 21:15

〈2〉절체절명의 위기, 한강 방어선

1950년 6월25일! 이날은 민족사상 최대의 시련이 시작된 날이고,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한 지 2년 만에 국가존망의 기로에 선 날이다.

바로 이날 새벽 4시, 북한군은 치밀한 침공 계획에 따라 전차 1개 여단 및 1개 연대, 보병 10개 사단의 우세한 전투력으로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기습남침을 감행해 물밀듯이 내려왔다.

당시 우리 국군은 절대적으로 열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6월28일 오전 2시 북한군 선두가 미아리에 진입하면서 서울 북방 창동 방어선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2시30분쯤 우리 군은 한강교를 폭파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때부터 한강선 방어작전이 전개됐다.

6월29일 당시 미 극동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한강방어선을 시찰했는데, 이 시찰을 통해 맥아더 장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히 인식함과 동시에 한국방어의 결의를 확고히 다지게 됐다.

맥아더 장군이 한강을 시찰하기 위해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수원비행장에 내린 6월29일, 당시는 미 공군이 한반도 상공에서 제공권을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때였다. 김포·여의도 비행장을 점령한 북한 공군기가 자주 수원비행장을 습격했을 뿐만 아니라 날씨마저 몹시 사나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은 비행장에 내리는 위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실제로 북한 야크(Yak)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불과 100여m 거리에서 두 발의 폭탄이 터지는 등 마중 나온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수행원을 대동하고 고지에 올라선 맥아더 장군은 한강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서울 남산과 그 주변 일대를 한참 동안 망원경으로 보고나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산병호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 개인호 안에 한 병사가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이 던진 질문에 대한 병사의 자신감과 사명감에 넘친 답변은 맥아더 장군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로 하여금 미국 지원군을 한국전장에 투입할 결심을 하게했다는 일화가 있다.


■맥아더 장군과 한국군 병사의 대화

맥아더 장군: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壕) 속에 있을 것인가?
한국군 병사:예! 각하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한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저의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여기 있을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그 명령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군 병사:예!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오! 장하다! 자네말고 딴 병사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한국군 병사:예! 그렇습니다. 각하!
맥아더 장군:참으로 훌륭하구나! 여기 와서 자네 같은 군인을 만날 줄은 몰랐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한국군 병사:예!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 있게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맥아더 장군:음! 그리고 또 없나?
한국군 병사:예! 없습니다.
맥아더 장군:알았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군.
이때 맥아더 장군은 병사의 손을 꼭 쥐고 나서 통역을 맡은 김종갑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령! 이 씩씩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 주시오, 내가 도쿄(東京)로 돌아가는 즉시 미국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훌륭히 싸우라고.”

- 정일권 장군 회고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