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 룡정, 백두산 방문기 / 말 달리던 선구자
이영제의 2002.8.11-22일 여행기- 중국내 소수부족으로 형성되어 자치주(연변)을 형성하고 있는 우리 민족이 거기에 살고 있었다.
올해로 연변자치주 50주년을 맞이하고 있어, 9월 3일 연길시는 대대적인 축하행사에 총력을 쏟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국내에서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또 다른 나라에서 그것도 한글과 우리말을 그대로 전수해오며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은 민족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호감 그 자체였다.
조선족의 역사는 멀리는 중국 후금(后金)때에 박씨 성을 가진 조선족이 살고 있었으며 본격적으로는 2백년전 살길을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중국 동북에 자리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정착은 생각보다 싶지 않았다.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짖을만 하면 청나라는 그것을 정부에 귀속시키고 다시 조선족을 노비로 삼는가 하면 머리를 청나라 사람과 같이 깍그라고 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성씨 개명을 강조해 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시 쫓아내고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격으며 살아왔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한일합방>을 통해서 서울에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무력으로 조선 땅을 점거했다.
국유지와 개인토지 등을 마구 빼앗은 일본인들의 만행을 피해 살길을 찾아 나선 조선 사람들이 또한번 압록강을 넘었다.
또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애국지사들도 일본의 가혹한 토벌과 탄압에서 견디기 위해 근거지를 동북방과 연해주 지방으로 이동했다. 피눈물나는 민족 대 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서로다른 체제에서 살아왔고 조선족은 엄현히 현실적으로 중국 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또한 한국에 들어와 노동판을 떠도는 조선족들도 적지 않고 대부분 막노동의 현장에서 일하고 한국인처럼 대우 받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다양한 설움이 있는것 또한 현실이다.
중국 자체에서도 한족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소수 부족의 위치에서 살고있다. 예를 들면 한족의 학교에는 조선족은 입학할 수 없거나 어려움이 있다든가 종족적 차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조선족은 자연히 어느곳이 조국인지 그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것이다.
개성에 따라 차이는 있는지만 어떻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중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중국, 한국 모두에게 반감이 있는 편이 많다고 볼 수 있고 또한 편리한 대로 생각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조선족을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조선족은 분명 우리 민족이요 또한 그것을 지키고 살아온 동족이라는 것이다.
중국 1990년 제4차 전국인구조사중 30개 성, 자치구, 직할시와 현역 군인가운데서의 조선족 인구수
지역 |
인구 수 |
지역 |
인구 수 |
료녕 |
230,378 |
호북 |
1,874 |
길림 |
1,181,964 |
호남 |
329 |
흑룡강 |
452,398 |
광동 |
524 |
내몽골 |
22,641 |
광서 |
199 |
북경 |
7,689 |
해남 |
70 |
천진 |
1,788 |
사천 |
611 |
하북 |
6,250 |
귀주 |
217 |
산서 |
1,085 |
운남 |
230 |
상해 |
734 |
서장 |
11 |
강소 |
916 |
섬서 |
1,056 |
절강 |
237 |
감숙 |
560 |
안휘 |
619 |
청해 |
306 |
복건 |
113 |
녕하 |
321 |
강서 |
153 |
신강 |
1,037 |
산동 |
2,830 |
현역군인 |
2,358 |
하남 |
1,099 |
조선족총인구수 |
1,920,597 |
2002. 8. 13(화)
룡정 비암산 일송정에서 바라본 룡정 해란강줄기와 용정시
일송정에서 바라본 비암촌, 평강벌[그림1,2] 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평강공주와 온달이 살았던 곳이다.
이곳은 만주 벌판이라고 불리는 독립운동의 땅이었다.
이곳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독립의 꿈을 불태우며 이곳에서 그 날을 준비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일송정의 소나무를 바라보며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저 푸른 소나무를 보며 힘을 얻었다.
일본인들은 저 소나무가 무엇인데 조선 사람들은 저 소나무만 보면 힘을 얻는지 모른다고 하여 소나무를 배어 버리고 그 뿌리도 없애고 다시는 소나무를 심고, 자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소금물을 뿌렸다고 한다.
그 때 소나무는 없어졌지만 우리 한국민족의 가슴속에 변하지 않는 기상으로 살아있다.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北間島)의 명동촌에서 윤석용, 김용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명동소학교,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5년 2월 16일 일본의 알 수 없는 고문에 의해 그의 나이 28세 세상을 떠났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씌어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룡정기원 우물과 윤동주의 생가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윤동주
2002. 8. 17(토)
도문에서 두만강을 넘어 북한으로 가는 다리, 다리의 빨간색 까지가 중국이며 파란색 부터가 북한 땅
이 다리를 넘어 조선족은 북한에 싶게 건너갈 수 있다.
내가 만난 조선족 중에는 많은 분이 북한을 다녀왔으며 한 여자분은 북한사람이 쌀이 없어 고생할 때 쌀을 나누어 주려고 무거운 쌀 자루를 머리에 이고 뛰어다녔는데 지금은 그 때의 일로 허리에 통증이 있다고 말했다.
연길시의 西시장과 연길기독교회
중국 연길과 용정은 자동차로 30여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향후 하나의 연길로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모든 중심이 연길을 통하고 있다 규모면에서도 상대적으로 용정은 작기 때문에다.
예전에는 용정도 큰 구모의 도시였으나 연길이 공항과 연결됨으로 점차적으로 연길쪽으로 무게가 옮겨졌다.
중국의 길 거리는 아직은 덜 정리가 된 느낌이었었다.
특히나 중국내의 질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길 거리에는 자동차와 마차 등도 눈에 띄었으며 삼륜차 시골에서는 경운기 엔진같은 것을 장착하여 자체적으로 만든 트럭 같은것도 다녔다.
매연과 오염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았으며 향후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미치는 환경오염원으로 충분히 염려될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당부간은 이런 염려는 뒤로한체 경제발전에 촉각을 세울 것이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이미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한 수 위에 있는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는 곳마다 돈을 내야 하며 상업주의가 이미 깊숙히 들어가 있었다.
백두산
개요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백두산은 환태평양 화산대의 일부분으로 화산 폭발 때 생긴 흰색 부석으로 인해 한꼭대기가 사시장철 희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장백산(챵바이샨)이라 한다. 백두산 연평균기온은 -8도로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일에 달한다. 따라서 6월초까지 눈이 덮여 있는 백두산 등정은 한여름 장마철 보다는 6월 말- 7월 초, 8월말 - 9월초가 가장 적당한 시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명칭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白),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白山)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범위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측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 (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690m의 백운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자원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나머지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에는 물고기는 없고, 식물성 플랑크톤이 5종, 작은 동물과 곤충류가 4종, 그리고 이끼가 생장한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창바이 폭포에서 얼다오바이허를 흘러 쑹화 강[松花江]을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다. 천지의 물이 지하수화해 용천수로 떨어져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1년 내내 흐른다. 중국의 창바이 폭포-얼다오바이허 계곡에는 수온 37~82℃의 온천이 13개 있고, 북한에서도 천지 남서부에서 수온 73℃의 온천이 발견되었다
백두산에는 호랑이·곰·이리·늑대·멧돼지·사슴·노루 등 50여 종의 산짐승, 꿩·부엉이·딱따구리 등 137종의 새, 산천어·열목어 등의 냉수성 어류가 살며, 나비 등의 곤충도 많다..
백두산의 최대자원은 적송·잎갈나무·가문비나무·자작나무 등의 삼림으로서, 이들 목재는 철도와 압록강 및 두만강의 뗏목에 의해서 길주·만포·무산의 제재소로 운반된다. 기타 자원으로는 건축용의 골재와 단열재로 이용 가능한 부석, 천연수로 이용되는 천지의 물, 약초와 산나물 등을 들 수 있다.
2002년 8월 19일(월) 오후 2:00 현재 백두산 전경 / 사진 이영제
연길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여 백두산 입구에 도달한 시간은 12시였다.
택시를 대절하여 백두산까지 가는데 도로는 비교적 잘 포장되어 있었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늘어나면서 도로 포장도 서둘러 마무리 한 것 같았다.
가는 도중의 산들은 뾰족한 산들보다는 완만한 지경을 이룬 능선으로 계속되었다.
이런 길을 계속하여 백두산 입구에 도달하면 양쪽에 쭉쭉 뻗어 있는 나무숲을 30여분간 지나가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백두산(장백산)을 알리는 문 앞에 도달한다.
이 길을 따라 10여분 정도 더 올라가면 두 갈래의 길로 갈라진다.
하나는 가던 방향에서 백두산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향하면 천지로 가는 길이고 직진으로 가면 백두산 천지물의 흘러내리는 폭포가 있는 곳으로 간다.
먼저 폭포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산의 양쪽은 화산암으로 둘러싸여 우거진 숲보다는 흘러내는 토사가 길게 뻗쳐있으며 그 사이에 우뚝 우뚝 솥은 산봉우리들을 옆으로 하고 저 멀리 가운데 절벽으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가 그 소리와 함께 눈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높은 산에 그것도 정상을 가까이에 두고 흐르는 폭포는 하늘아래에 닫아있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것이었다.
이 물은 백두산 천지에서 솟아나는 물이 넘쳐흐르는 폭포이며 주의에는 아직도 식지 않은 온천수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솥아 나고 있었다.
물의 온도는 30-40도 정도 느껴졌으며 손을 대면 5초 이상 담그고 있기가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다.
흐르는 물의 웅덩이에 계란과 옥수수를 익혀 파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어느 정도 익혀진 것을 가져와 이곳에 담가 놓아 좀더 익히는 것이고 처음부터 익히는 것은 무리라고 한다.
히한한 것은 필자가 디지털 카메라(RDC-7)로 찍은 사진(bd02)에 흐르는 물의 색깔이 붉은 색으로 찍혀 나왔다.
잘은 모르지만 물의 유황 성분이 카메라와 빛으로 들어올 때 변한 것 같다.
이런 신비스런 일들을 경험하고 폭포를 좀더 가까이 에서 보고자 구름다리를 건너 20여 미터 정도의 철 층계를 만들어 놓은 곳을 숨을 내쉬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다.
가까이 에서 보는 폭포의 모습은 그 웅장함과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의 소리로 이어졌다.
폭포 뒤로 보이는 길로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사고가 있은 후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가지 못했다.
폭포를 뒤로하고 길을 내려와 백두산 천지가 있는 곳을 향했다
천지까지 올라가는 길은 하늘과 맞닫아 있었으며 구름 속을 향하고 빠져나가고
비행기를 탄 것처럼 귀가 멍하고 이렇게 굽이굽이 30분을 달려서 천지 아래에 도착했다.
백두산에 오르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바로 천지를 보는 것이다.
27차례 올랐지만 단 2번만 보았다는 사람, 중국의 정치인 누구는 두 번 왔는데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미담으로 천지를 안보여 주는 것은 '다음에 한번 더 오시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천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어느 누가 없겠는가?
일년에 천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안되며 늘 구름으로 가려져 있어 천지의 12봉이 제대로 보이는 날은 더욱 드물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이 보여주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말까지 생겼다.
그런 마음을 안고 천지가 보이기를 기대하며 구름과 구름 속을 통과하면서 조이던 가슴이 이제 현실 앞에 서게 되었다.
차에서 내려 10미터 정도를 모래 흙 같은 언덕을 올라가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 위에서 소리쳤다.
구름이 몰려온다!
그 소리를 들고 천지를 보려고 이곳에 왔는데 구름 때문에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기어올라가다시피 하며 단숨에 그 언덕을 올랐다.
숨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있을 때 드디어 천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어찌 이루 이 광경을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사람이 어찌 이와 같은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할 수 있을까!
그것은 신비 그 자체였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작품 중에 작품이었다.
한 쪽에서는 구름이 몰려오고 또 지나가고 숨은 가누지도 못한 체 차분히 그 광경을 음미해볼 시간도 없이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고 그 아름다운 광경을 향해 작은 카메라로 이리 찍고 저리 찍어대기 시작했다.
능선에 오른 곳에서 그리 멀리 가보지도 못하고 30여 미터 정도의 산 능선에서 저쪽 북한군 처소가 작게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천지까지 내려가 어떤 목적인지 모르지만 배를 띄우고 있었다.
이 능선을 따라 돌라 가면 바로 북한(우리) 땅이라는 사실에 감격은 더 깊이 다가왔다.
하루 빨리 중국을 돌아돌아 오르지 않고 우리 땅으로 백두산을 오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같은 생각이리라.
금번 여행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중국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심, 황, 그리고 RM1 여려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너무나도 뜻 깊은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통해 아직까지도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 것을, 언제인가 밝히 말할 수 있는 때가 속히 오리라 믿으며 ...
2002.8.28 / 이영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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