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북한군 바로알기

99>북한의 핵무기 개발 경과

화이트보스 2009. 4. 18. 18:47

99>북한의 핵무기 개발 경과
‘검증의정서 거부… 핵 폐기 의사 안보여’

현재 북한에는 약 3000명에 이르는 전문인력이 핵개발 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부터 구소련의 핵 연구소에 핵물리학자를 파견해 연구하게 하는 한편, 일부 대학에 핵물리학과를 설치해 핵 연구에 집중한 결과다. 북한은 60년대 중반 구소련에서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했고, 70년대에는 연구용 원자로의 출력 확장 기술을 자체 개발했다.

90년대 들어서는 핵연료 확보에서 재처리에 이르는 일련의 핵연료 주기를 완성하는 데 주력했다.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북·미 제네바 합의’(94년 10월 21일)를 통해 대북 경수로 제공과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경수로 완성 시까지 매년 50만 톤의 중유 제공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흑연감속로 원자로 건설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락했으며, 그 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의 협상으로 경수로 공급 협정에 합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IAEA의 핵사찰 수용을 발표하고도 미신고 시설에 대해 사찰과 시료 채취 등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면 핵실험금지조약(CTBT) 가입도 거부하고 유엔 연례 핵군축회의에도 불참했다.이어 9·11 테러 이후 북·미 간의 입장 차이와 미국의 압박 등을 이유로 핵문제 해결에 부정적 자세를 보였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의 방북 시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 의혹이 제기되자 북한은 핵 동결 해제와 핵시설 가동을 선언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강행했다. 이에 미국이 북핵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할 것을 예고하자, 북한은 “재처리가 완료돼 추출된 플루토늄을 ‘핵 억제력 강화’ 용도로 전환할 것”임을 선언했다. 여기서 핵 억제력 강화는 핵무기 개발을 의미한다.

그 결과 2005년 2월 10일 북한이 외무성 성명을 통해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북핵 문제는 국제사회의 주요 관심사로 다시 등장한다. 2005년 9월에는 북핵 폐기와 이행 원칙을 담은 6개 항의 공동성명(9·19 성명)이 채택돼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달러화의 위조지폐 문제와 관련한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문제로 6자 회담이 표류하던 중 북한은 2006년 7월 5일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발사한 데 이어 2006년 10월 9일 핵실험을 단행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이 전원 합의로 채택되자 이를 의식한 북한은 2007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2·13 합의와 핵 불능화를 위한 10·3 합의에 동의했다.

그리고 2007년 말까지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를 완료하기로 합의하고 핵 기술 이전 금지를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북한이 영변 냉각탑을 폭파하는 등 핵 불능화에 대한 의지를 다시 보이자 미국도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등 대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2008년 12월 11일 6자 회담 관련국들은 핵 불능화 2단계 완료를 위해 북핵 문제 해결의 최대 쟁점인 ‘시료 채취(샘플링)’를 보장하는 ‘검증의정서’ 채택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이를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됐다. 버락 오바마 새 행정부와 협상을 재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북한이 시료 채취를 명문화하자는 ‘검증의정서’ 채택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핵을 폐기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