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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어민들 '요트 신바람' 났네남해

화이트보스 2009. 4. 20. 12:01

남해 어민들 '요트 신바람' 났네

입력 : 2009.04.20 03:24 / 수정 : 2009.04.20 07:39

"언제까지 물고기만 잡아묵고 살수 있습니꺼"
요트학교 과감히 유치 주부들도 배우느라 '진땀'

"어어, 바란스 잡아라, 바란스. 저래 기우뚱거려서 어디 한 발짝이나 가겠나?"

"바란스가 뭐꼬, 교양 없이…. 밸런스(Balance·균형) 아잉교."

매주 토요일 오전 경남 남해군 상동면 물건(勿巾)항 앞바다는 초로(初老)의 어민 20여명이 길이 2.5m, 폭 1m, 깃대 높이 3m의 훈련용 요트를 몰고 바람을 가르는 '요트 학교'가 된다. 외항선을 타다 은퇴한 60대 선장, 고기잡이로 2남1녀를 키운 50대 어부 등 바닷바람과 햇볕에 얼굴이 그을린 동네 사람들이 무료로 요트를 배운다.

이들은 물건리 주민들로 구성된 '수피아 요트클럽' 회원들이다. '수피아'는 '숲'에서 나온 말이다. 물건리 주민들이 푸른 바다 못지않게 자랑스러워 하는 '자산'이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백사장에 자리잡은 1.5㎞ 길이의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천연기념물 제150호)이다.

물건리는 인구 560명의 어촌이다. 2003년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국내 100대 아름다운 항구'에 들었을 만큼 풍광이 빼어나다. 주민 열명 중 다섯명이 50대 이상인 '어르신 마을'이기도 하다. 이곳 어부들이 미래 요트 관련 산업에 종사할 생각으로 요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28일부터다.

남해군은 물건항 남쪽 어민회관 2층에 '남해군 요트학교' 간판을 달고 예산 1억3000만원을 투입해 1인승 연습용 요트 11척과 4인승 연습용 요트 1척을 마련하는 한편 요트 교육업체인 더위네이브(대표 오종열)에 주민 교육을 위탁했다. 군청 인턴 1명을 투입해 행정업무도 돕게 했다.

남해군은 오는 6월까지 남해군 주민들에게 기초 과정을 무료로 교육시킬 계획이다. 수업료도 받지 않고 요트와 구명조끼 등 개인장비도 공짜로 빌려준다.

경남 남해군 상동면 물건리‘수피아 마을’이민득 이장(맨 왼쪽)과 이성렬 어촌계장(왼쪽에서 세 번째) 등 마을 주민들이 요트를 배우고 있다. 한적한 어촌마을을 요트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남해군이 마련한 교육 과정이다./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남해군이 주민들에게 요트 교육을 시작한 것은 물건항을 한국의 대표적인 요트 휴양지로 만들겠다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남해군청 송유환(43) 홍보팀장은 "주민들이 요트를 익혀 요트임대업이나 요트 강사로 나설 수 있게 하자는 취지"라며 "요트를 군청에서 무료로 가르쳐준다는 사실을 알고 전국에서 하루 20여통씩 문의전화가 걸려온다"고 했다.

요트학교 강사 이세미(27)씨는 "주민 대부분이 '자동차보다 배를 먼저 탔다'고 말할 만큼 바다에 익숙해 일반인보다 진도가 두 배는 빨리 나간다"고 했다. 일반인들은 요트가 뒤집어졌을 때 다시 세우지 못해 애를 먹는데, 물건리 주민들은 배우지 않고도 척척 알아서 배를 일으켜 세운다는 것이다.

요트를 배우는 주민들은 마냥 흥겨워 보였지만 이곳에 요트학교가 자리잡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물건리 이장 이민득(62)씨는 "주민들이 반대를 많이 했다"고 했다.

"바다에 요트 떠 있으면 고깃배 드나드는 데 걸그적거리니까요. '배 하나 띄워서 고기 잡으면 지금도 하루에 10만원은 버는데 그딴 게 왜 필요하냐'고도 하고요."

마을 어촌계장을 맡고 있는 이성렬(52)씨는 "지금은 마을에 고깃배가 60척이 넘지만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어 10년 후에는 고깃배 몰고 나갈 사람이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이런 마당에 언제까지 물고기만 잡아 묵고 살 수 있습니꺼. 내가 그래 말하니, 반대하던 사람들도 다 고개를 끄덕거리데요."

영국 왕립요트학교에서 요트 지도자 자격을 딴 더위네이브 오종열(48) 대표도 주민들을 설득했다. 오 대표는 "국내에 영국 같은 요트학교를 세우기 위해 남해안을 샅샅이 돌아다녔는데, 물건항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고 했다. 100m 길이의 방파제 두개가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내항, 요트 코스에 딱 맞는 작은 섬 서너개가 흩어진 외항이 요트학교를 세우기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주민 박모(67)씨는 "우리가 고기잡이를 못할 나이가 되면 물건항이 배 한척 없는 '폐항'이 될까봐 마음에 걸렸다"며 "요트학교가 활성화돼서 우리 마을이 요트 관광지가 되면 주민들이 부대시설 운영에 참여해서 먹고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했다.

막상 요트학교가 개교하자 주민들은 언제 반대했나 싶을 정도로 수업에 빠져들었다. 외항선 선장을 지낸 이익수(69)씨는 "큰 배를 몰 때는 내가 비록 선장이라도 내 마음대로 방향을 1도도 못 바꿔봤다"며 "요트는 내 마음대로 하늘의 갈매기를 따라가도 되고, 물속 복어들 따라가도 되니까 정말 좋다"고 했다. 조인숙(여·55)씨는 "직접 배워보니 요트는 호화·사치 스포츠가 아니라 60㎏ 나가는 400만원짜리 배를 다루는 전신운동"이라며 "연습용말고 진짜 요트는 시속 70㎞까지 나온다는데, 빨리 타보고 싶다"고 했다.

비교적 젊은 어민들은 요트학교에서 '미래'를 보고 있었다. 이들은 요트학교가 개교하기 전인 지난 2월부터 강습을 자청하며 적극적으로 배웠다. 어선 한척을 갖고 있는 이철형(47)씨는 "미리미리 배워두면 지금 낚싯배 띄우는 것처럼 나중에 요트 대여나 동승 관광 등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고 했다. 김창목(49)씨도 "처음에는 못 보던 배가 눈에 보이니까 '뭔지 좀 알아보자'는 정도였는데, 배워보니 재미있어서 '지도자 과정'까지 밟을 계획"이라며 "멸치잡이 때만 빼고는 요트 일을 할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어민과 농민, 주민들이 요트에 미쳤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수피아 요트마을에 가보니... /김용우 기자
어민과 농민, 주민들이 요트에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