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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룡(潛龍)이 하늘에 너무 빨리 오르면

화이트보스 2009. 5. 15. 14:11

강천석 칼럼] 잠룡(潛龍)이 하늘에 너무 빨리 오르면

 2009.05.15 09:16

강천석·주필(主筆)

"이명박·박근혜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상대 입장 살펴야
'가엾은 신데렐라'와 '힘센 신데렐라'는 딴 이야기"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사이가 문제다. 여권은 집권 15개월 동안 이명박-박근혜 또는 그 추종 세력 간의 반목과 불화 뉴스를 끊임없이 생산했다. 이제 '이-박 뉴스'는 이 정권의 대표 상품으로 올라선 느낌이다. 실제 '한나라표 정치 상품' 가운데 가장 경쟁력 있는 게 바로 이 상품이다. 한번 터졌다 하면 단박에 국민의 눈과 귀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이번 폭발의 최대 피해자는 원내대표 경선을 벌이고 있는 이웃 민주당이다. '김무성 카드'를 '원칙에 어긋난다'는 한마디로 자르고, 이어 찾아드는 설득 사절을 함흥차사 내쫓듯 되돌려 세운 박 전 대표의 완벽한 연기에 다들 넋을 빼앗기는 바람에 민주당은 흥행을 망쳐 버렸다. 한나라당의 골칫거리가 국민의 구경거리가 돼가는 셈이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 사이에 경제정책·대북정책·교육정책·노동정책·동맹정책·비정규직 대책 등과 같은 국가 대사(大事)에 이견(異見)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결국 대립은 '사원(私怨)의 정치'에다 '사리(私利)의 정략'이 얹혀진 탓이다. 경선 과정에서 양쪽 모두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쌓을 만큼 쌓았다. 이걸 대선 승리와 함께 털어냈어야 했다. 그러기는커녕 새 정부 구성과 총선 공천 과정에 묵은 적개심을 투입해 상대를 배제함으로써 원한 위에 이해(利害) 대립까지 덧씌운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절벽 앞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포용하라'는 도덕적 주문(呪文)이 먹힐 리 없다.

사태는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풀어야 한다. 문제는 두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엉킨 실타래를 한번 더 헝클고 만다는 것이다. 심각한 소통 장애가 있다는 이야기다. 먼저 상대한테 귀를 열어줘 상대에게 설득당할 각오를 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를 설득할 수도 없다. 내 귀를 열어줘야만 상대의 마음도 함께 열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고 의사를 찾는 오페라 가수들을 검사하면 대부분 후두(喉頭)가 아니라 중이(中耳)에서 문제가 발견된다고 한다.

사람은 자기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는 입으로도 낼 수가 없다. 알프레드 토마티스(Alfred Tomatis)라는 프랑스의 의사는 '입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귀로 노래한다'는 이 원리에 입각해 목소리 이상을 호소하던 수많은 가수들의 귀를 치료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오페라 무대에 세울 수 있었다. 입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귀로 설득한다는 말과도 통하는 이야기다.

귀를 닫으면 상대의 입장에 서서 바꿔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문도 닫히고 만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현재의 박 전 대표 처지라면 이런 대접을 받을 때 어떤 느낌이겠는가를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박 전 대표 역시 자신이 대통령일 때 2인자가 지금 박 전 대표처럼 나오면 무슨 기분이겠는가를 떠올려 봤어야 한다. 그랬더라면 일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오히려 부작용을 키우고 끝나 버렸던 것은 두 사람이 '입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입은 논리를 따르고 귀는 감성을 지배한다고 한다. 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서로 상대방에게 귀를 빌려줬더라면 가슴에 담아뒀던 한(恨)과 불신도 많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집권당 사무부총장이 청와대를 향해 대포를 쏘아대는 요즘 같아선 두 진영은 이제 친이(親李) 친박(親朴)이란 문패를 반박(反朴) 반이(反李)로 바꿔달아야 할 판이다. '반박'은 무늬만 '반박'일 뿐 울타리 너머 박 전 대표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며 엉거주춤하고 있고 오히려 반이(反李)의 기세가 등등한 게 여의도 분위기라고 한다.

박 전 대표의 일거수(一擧手)에 국회가 좌지우지되고 그의 일투족(一投足)에 선거의 승패가 갈린다. 착하고 가엾은 신데렐라가 계모의 갖은 구박을 이겨내고 이렇게 어엿하게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신데렐라를 향한 민중의 동정심은 여기서 끝난다. '힘센 신데렐라'가 등장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현직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지 1년3개월밖에 안 된 상황에서 대통령에 맞서는 제2인자가 출현한 것은 우리 정치사상 처음이다. 박 전 대표는 너무 빨리 너무 강해져 버린 것이 아닐까. 아무리 허약해 보여도 대통령은 힘이 세다. 그것이 대통령제다. 1997년 김대중 당선이란 드라마를 만든 게 반드시 DJP 연합의 효과만은 아니었다.

힘 빠진 김영삼 대통령과 힘센 이회창 여당 후보 간의 알력과 불화가 기적을 거들었다. 선거날에 다가갈수록 YS 주변엔 이회창 집권보다는 김대중 집권이 더 견딜 만할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가 드리워졌다. 이렇게 해서 결국 DJP 연합이 띄운 무지개가 현실이 돼 땅으로 내려온 것이다.

'항룡유회(亢龍有悔·높이 오른 용엔 뉘우침이 따른다)'라는 말이 있다. 하물며 아직 물속에 잠겨 있어야 할 잠룡(潛龍)이 너무 빨리 하늘에 오르는 데도 잠잠하기만 한 바다라면 그 바다가 이상한 바다다.
강천석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