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회고록서 당시 중(中) 지도부 신랄한 인물평(評)
시위 진압 공(功) 인정받아 후계자로 성장한 장쩌민
사실은 중앙에 도움 간청
"리펑(李鵬)은 천안문(天安門·톈안먼) 광장에서 시위대에 겁을 먹고 달아난 겁쟁이다. 장쩌민(江澤民)은 시위대에 압도당했고, 후야오방(胡耀邦)은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이었다."
1989년 6월 중국의 톈안먼 시위사태 때 시위대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축출된 자오쯔양(趙紫陽·1919~2005) 전 공산당 총서기가 사후의 회고록에서 밝힌 중국 권력자들에 대한 인물평이 흥미를 끌고 있다. 14일 홍콩에서 발매되기 시작한 그의 회고록 '국가의 죄수(Prisoner of the State)'는 하루 만에 매진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자신을 축출한 권력자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에 대해 "민주주의가 안정을 저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위 대책을 말할 때 항상 강경책을 선호했고 독재를 강조했다"며 덩의 독재자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리펑 당시 총리에 대한 비화도 소개했다. 자오쯔양은 "시위는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1989년 4월 26일 학생시위를 '반(反)공산당적, 반사회주의적'이라고 매도하는 사설을 실으면서 격화됐다"면서 "이 사설은 리펑이 바로 전날 당 지도부 모임에서 덩샤오핑이 한 발언을 인민일보에 흘려서 실린 것"이라고 말했다. 덩샤오핑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리펑에게 불쾌감을 표시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하자, 리펑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거듭 다짐했다고 한다.
자오쯔양은 또 "리펑이 1989년 5월 19일 나와 함께 학생들이 단식농성을 벌이던 톈안먼 광장으로 향했으나 그는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겁에 질려 달아났다. 나는 이런 (비겁한) 태도에 몹시 불쾌했었다"고 적었다. 리펑은 톈안먼 사태 당시 덩샤오핑을 부추겨 자오쯔양을 축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오쯔양은 당시 상하이(上海) 서기였던 장쩌민 전 국가주석에 대해서는 "5월 10일 상하이의 시위대에 압도당해 베이징으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으나 '중앙의 개입 없이 상하이시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자 실망하고 돌아갔다"고 소개했다. 이 내용은 장쩌민이 톈안먼 사태 당시 상하이의 시위 동조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차단해 덩샤오핑 등 원로들의 인정을 받았고, 그 때문에 자오쯔양의 후임으로 발탁됐다는 기존 소문과는 차이가 있다.
자오쯔양은 톈안먼 사태 직전에 사망한 자신의 전임 총서기 후야오방(1915.11~1989.4)에 대해서는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이었다. 홍콩 언론과 인터뷰 때 덩샤오핑을 화나게 하는 바람에 실각했다"고 적었다.
톈안먼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은 이후 자신의 후임인 장쩌민 등에게 "여생을 고독하고 낙담스러운 환경에서 마치기를 원치 않는다. 가택 연금을 풀어 달라"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