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다시 나를 부르더라도 기꺼이 달려 갈 것이다" |
written by. 이현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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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박동빈씨, 아직도 마음은 현역 그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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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은 6·25 당시의 한국전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쟁이었습니다. 6·25때는 전방과 후방이 명확히 구분되는 전선이 분명한 전쟁이었죠. 그러나 월남전은 언제 어디서 적의 총구가 나를 향해 불을 뿜을지 모르는 전후방이 따로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자유를 위해 피흘려 싸운 우리 32만 월남 참전용사에게 '용병'이니 '양민학살'이니 하는 말로 매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목이 타 들어가는 갈증과 독충이 우글거리는 정글에서 전투에 임하여 생사를 넘나들 때 과연 그들은 뭘 하고있었습니까?" 지난 70년 1월부터 71년 7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백마부대 참전용사로 참전했던 베트남 참전 예비역 육군소령 박동빈(사진, 57세. 서울)씨는 조용조용 말을 해나가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베트남 참전에 대한 공과가 폄하되며 다르게 조명되고있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자 갑자기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며 우리사회 일부 계층에서 주장하는 발언들에 대해 강도높게 질타했다. 그는 "종전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베트남과 수교를 맺음으로서 과거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지난 전쟁의 아픔을 서로가 치유해가고자 동반자적 발전을 모색하고 있는 차제에, 베트남은 어찌됐던 그들에게 있어서 가해자였던 우리를 먼저 감싸안으려고 하는데 오히려 우리사회 일부에서는 월남참전을 폄하하고 부추기며 참전용사들을 깎아내리고있다"며 "국립묘지에 잠들어있는 5천여 전우들에게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면서 목이 잠기기도 했다. 4월 28일 오전 기자와 마주 앉은 박 참전용사는 예편 후 예비군 중대장으로 오래도록 근무해서인지 아직도 군인다운 기백과 패기가 여전한 예비역 군인임이 느껴졌다. 그는 월남전에서는 육군하사로 백마부대 28연대 전투지원중대 4. 2" 박격포 반장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 후에는 육군소위로 임관, 8사단 21연대 중대장을 역임하고 소령으로 예편, 지난 2001년 퇴직할 때까지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중구 황학동 예비군 동 대장으로 근무했다. 월남전에서 겪은 전투상황을 중심으로 예비군 및 장병 정신교육에도 앞장서 왔다고 동석한 베트남 참전전우회 이현태 총무국장이 넌지시 알려 주었다. 다음은 박동빈 참전용사와 나눈 인터뷰 내용 - 언제 어떻게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는지요? 67년 8월 15일 입대해서 육군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분대장 임무를 수행하다가 70년 1월 차출되어 백마부대 28연대 전투지원중대 4.2인치 박격포 포반장으로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참전이유는 개인적 차원보다 이미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의 파월이란 대명제 아래 자유우방을 지원하고 국익을 위한다는 차원이었지요. 6·25전쟁 때 자유우방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고요. 하지만 지금도 동작동 국립묘지를 비롯해 전사한 5천여명 전우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아립니다. 다시는 6·25나 월남전과 같은 제2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만에 하나 다시 또 그와 같은 전쟁이 발발한다면 저는 다시 전선으로 뛰쳐나갈 각오가 돼 있습니다. - 처음 베트남에 도착해서 당시 베트남과 우리나라를 비교한다면? 당시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는 1인당 GNP 80불 정도로 기억됩니다. 망망 대해를 거쳐서 타국인 그 나라에 가보니 우리나라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보다 50 ∼ 60년 뒤떨어진 정도였습니다. 나라 역시 월남과 월맹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서로의 다른 사상과 이념을 주장하면서 게릴라전을 통한 전투가 이어지고 소규모 작전에서부터 대규모의 작전까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전투경험을 좀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전투지원중대 소속이었기에 주로 화력지원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2대대 5중대 남인하 소위가 이끄는 매복작전을 효율적으로 지원해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공헌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미 그 전 매복작전에서 아군 1개소대가 나가 통신병 1명만 살아남고 전원 전사한 적이 있어 그 매복의 성공은 아군에게 큰 사기를 올려주었습니다. 매복작전을 나가기 위해서는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했습니다. 한번 나가면 3,4일씩 걸리기에 각종 장비점검에서, 비상식량, 가매복 지점에서 진매복 지역까지의 험난한 지형숙지, 여러 가지 화기준비와 정글과의 싸움 등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번은 당시 일반하사로 참전하여 상사로 진급, 현지에서 전역 후 취업까지 한 오병무 상사로부터 대규모 적의 부대가 스까이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첩보를 입수해 이를 분석해서 남인하 소위외 15명이 매복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우리 포반 팀은 8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조명탄과 고폭탄 600여 발을 적진으로 쏟아 부었습니다. 대 성공이었습니다.- 전투간 에피소드라 하면 이상합니다만 대 간첩 작전을 하다보면 엉뚱한 방향에서 작전이 시행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유사한 사례는 없었는지요? 한번은 베트콩이 매복한 아군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한 모 병장이 이들을 아 지역으로 유인하면서 전 대원에게 알려 근접전투를 하기 위해 소대장의 명령을 기다리던 중 작전을 해보지 않은 모 대원이 실수로 오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군은 이것을 소대장의 완수신호로 알고 크레모아 등 화기를 총 동원해서 작전을 펼쳤습니다. 성공이었습니다. 단 한 명의 아군 피해도 없었습니다. 우연치고는 기막히게 맞아떨어진 작전이었다고나 할까요.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월남은 워낙 밀림이 찹찹하기에 작전도중 갑작스레 피아가 맞닥뜨리게 되면 어떤 경우에는 서로가 모른 척(?) 그냥 지나쳐 가는 사례도 있었고요.- 최근 이라크 파병 자이툰 부대도 대민 지원, 민사작전에 큰 비중을 두고있습니다. 대민 지원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죠. 대민 지원은 상급부대 지침에 의거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초대 주월 사령관이신 채명신 장군님의 "100명의 적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주민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이 그것입니다. 전투를 하면서도 주민보호에 중점을 두라는 것입니다. 실지 작전에서 어린아이가 있으면 아이부터 보호하고, 베트콩이라고 정보분석이 되었어도 불확실한 경우에는 이를 피함으로서 주민의 반감이나 위압감이 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농사기술에서 도로확장, 다리건설 등 모든 분야에 한국군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베트남전을 경험하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우리는 북한의 김일성과 직접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월남은 한 가정에서 두 형제가 있으면 한명은 월남군이고 또 한명은 월맹군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 가족끼리 총을 들이대야하는 적대관계이기도 했지요. 그러다 보니 과연 우리가 누구를 지키기 위해 이 전쟁을 하고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전선이 없는 전쟁이다 보니 지휘관의 고충 또한 컸던 전쟁인 것 같습니다. 그런점에서 임무를 완수한 한국군의 한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 참전용사로서 자부심을 가진다면?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우리참전용사가 앞장섰다는데 대해 긍지를 갖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서 양민학살이니 용병운운 하고있습니다. 물론 전투를 하다보면 불가피하게 희생자가 나올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단언하건대 그들의 주장과 같은 양민학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는 얘기이며, 참전용사를 두 번 죽이는 격입니다. 우리가 피흘릴 때 그들은 뭘 했습니까? 베트남 주민보다도 우리국민이 더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이것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닙니까? 고엽제로 병상에 신음하는 전우가 가족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잇따라 자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참전용사를 홀대하는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있습니까?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얘기지요. 박씨는 마지막 인터뷰를 마쳐가면서 참전용사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관련한 얘기가 나오자 지난 2002년 전국 보훈병원을 돌며 참전전우들의 모습을 동영상에 전부 담았다고 한다.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함이었단다. 그러면서 그의 눈망울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병상에서 신음하는 동료전우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Kon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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