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피의 보복이 부른 政治 실종, 전란을

화이트보스 2009. 5. 18. 19:38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피의 보복이 부른 政治 실종, 전란을 부르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② 정치보복과 자체 분열

| 제102호 | 20090221 입력
정치는 상대방이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폐모론에 반대하는 자신들을 조정에서 대거 내쫓은 대북에 대해 서인은 대거 살육으로 보복했다. 폐모는 명분일 뿐 본질은 정적 제거여서 폐모에 반대한 소북까지 모조리 죽였다. 정치가 사라진 빈자리는 혼란이 차지하는 법이어서 이괄의 난이 발생하고 그 여파로 청(淸:후금)까지 남침을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 덴리(天理)대학이 소장 중인 오리(梧里) 이원익의 영정. 남인이었으나 서인에 의해 영의정에 발탁된 이원익은 기자헌 등 37명이 하룻밤 사이에 처형당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집권 서인은 대대적인 정치보복에 나섰다. 대북 영수 정인홍을 사형시키고 이이첨과 네 아들 이대엽·이익엽 등도 사형시켰다. 이이첨의 처형 반교문(頒敎文)은 온갖 비난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한구석의 “계씨(季氏)보다 사치스럽고 부유한데도 사람들은 도리어 베 이불을 덮는 검소한 자라고 칭송했고, 이리처럼 백성을 침해하고 탈취했는데도 사람들은 거꾸로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공손한 자라고 일컬었다”는 구절은 다른 일면을 보여 준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이이첨이 부모의 삼년상을 치를 때 “3년 동안 묽은 죽만 마시다가 삼년상이 끝난 후에야 염장(鹽醬:소금과 간장)이 들어간 음식을 먹었다. 매일 물을 10여 사발씩 들이켜 온몸이 부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전하고 있다. 쿠데타 측에서 작성한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은 백관이 둘러보는 가운데 정형(正刑:사형)한 16명의 이름을 적고 있는데 명분은 폐모였지만 자의적인 기준이었다.

이이첨부터가 그랬다. 『묵재일기(묵齋日記)』는 폐모론이 일자 반정 주역 이귀(李貴)가 유순익(柳舜翼)을 이이첨에게 보내 중지를 요청했는데, “그 후 이이첨이 폐모론을 현저하게 주장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처형당할 때 이이첨은 이귀에게 “전에 유순익을 통해 대감의 말을 듣고 폐모론을 극력 정지시켰으니 대비께서 지금까지 보존하신 것이 다 나의 힘”이라면서 “왜 죽이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귀는 “당초에 이 논의가 누구에게서 나왔느냐”고 싸늘하게 답했다.

『계해정사록』은 정형당한 16명 외에 복주(伏誅:사형)당한 64명의 명단도 싣고 있다. 폐모를 빙자한 정적 숙청인데 그중에는 쿠데타 당일 역모를 고변했던 이이반도 들어 있었다. 한 당파가 정권을 잡아 다른 당파의 씨를 말리는 살육정치의 시작이었다.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처럼 쿠데타에 대해 싸늘한 민심 수습 차원에서 등용된 남인은 이런 대살육이 자행될지 몰랐다. 조경(趙絅)의 『용주집(龍洲集)』은 충청감사에 임명된 이덕형이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에 대해 “대비를 돕고자 했던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해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변호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거처하던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안의 영은사(왼쪽 사진). 공주 석송정은 인조가 피난 길에 잠시 쉬던 곳으로 전해진다(오른쪽 사진). 사진가 권태균
김천석(金天錫)의 『명륜록(明倫錄)』에 따르면 인조가 “유희분 등을 죽이지 않으면 의거를 한 보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고 전해져 쿠데타의 목적이 정적 살육이었음을 말해 준다. 폐모는 명분일 뿐 북인의 씨를 말려 재기를 막으려는 정치적 살해였다. 그러니 광범위한 정치보복이 자행되었고 광해군 주변의 여성도 숱하게 죽였다. 광해군이 총애했다는 김 상궁과 그 어미의 재가한 남편 유몽옥(劉夢玉), 광해군의 후궁 숙의(淑儀) 윤영신(尹永新)을 사형시켰고 소원(昭媛) 정씨는 목매어 자살했다. 여옥(女玉)·난향(蘭香)·도란(道蘭)·추영(秋英)·생이(生伊)·난이(蘭伊)·숙진(淑眞) 등의 궁녀도 모두 사형시켰는데 인목대비 김씨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사형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었다. 목숨은 겨우 건졌으나 유배지에 가시울타리를 치는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당하거나 삭탈관작(削奪官爵) 등의 형벌을 받은 인물들은 셀 수조차 없다.

광해군을 복위하려는 기도도 있었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유약(柳약) 부자 등이 그들이다. 유몽인은 광해군 13년(1621) 파직된 후 금강산 등지에서 은거생활을 하다 광해군이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거병하려 했다. 조익(趙翼)의 『포저집(浦渚集)』에는 “유몽인은 형신(刑訊:고문)을 많이 받지 않고도 모의한 사실을 일일이 자복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시를 공술하면서 폐주(廢主:광해군)를 위해 복수하려 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고 적고 있다. 반정공신 이귀는 인조 2년(1624) 11월, “유몽인이 백이(伯夷)에 관한 설을 주창하자 학식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화답했다”고 말했다. 『사기(史記)』 백이 열전은 은(殷) 주왕(紂王)을 치러 가는 희발(姬發:주 무왕)에게 백이가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것이 어찌 인이겠습니까(以臣弑君 可謂仁乎)”라고 간했다고 나온다. 유몽인의 백이설은 인조와 쿠데타 주역들이 역신(逆臣)이란 의미였다.

게다가 피의 살육을 자행한 서인은 자체 분열되어 전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괄(李适)은 쿠데타 당일 이이반의 고변 소식을 듣고 집결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의병대장 김류(金류)에게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연평일기』는 이괄이 쿠데타 당일 뒤늦게 나타난 김류의 목을 베려 했다고까지 전하는데 막상 모화관(慕華館)에서 열린 쿠데타 성공 기념 잔치에서 김류의 자리는 이괄보다 상석이었다. 이괄은 “김류는 무슨 공이 있어서 우리의 상석에 앉는가”라고 소리쳤다.

이괄은 논공행상에서도 소외되어 김류·이귀·김자점·심기원·신경진·이서·최명길 등은 정사(靖社) 1등공신에 올랐으나 이괄은 2등공신으로 떨어졌고 쿠데타에 가담했던 아들과 손자도 훈적(勳籍)에서 누락되었다. 당초 이귀가 이괄의 자리로 천거했던 병조판서도 김류가 차지했다. 쿠데타 두 달 후인 인조 1년(1623) 5월에는 후금(後金)의 동태가 심상찮다는 이유로 장만(張晩)을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삼아 관서지방으로 보내면서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삼아 영변(寧邊)으로 내보내 장만의 지휘를 받게 했다. 영변으로 떠나던 날 1등공신 신경진이 “영공(令公)이 돌아오면 내가 가겠다”고 위로했으나 이괄이 성을 내며 “나를 쫓아내는 길이면서 속이지 마시오”라고 말했다고 『연려실기술』은 적고 있다.

조정은 지방으로 쫓겨간 이괄을 다시 자극했다. 인조 때 김시양(金時讓)이 지은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은 “원훈(元勳:1등공신) 등이 특출 난 공을 세웠으나, 인심이 불복할까 우려해 사방에 감시하고 밀고하는 문을 크게 열어놓은 것이 ‘이괄 난’의 발단”이란 시각을 보인다. 쿠데타에 대한 지지가 높지 않아 감시와 밀고를 장려하자 문회(文晦)·이우(李祐) 등이 기자헌(奇自獻)과 이괄·이전(李전) 부자, 한명련(韓明璉) 등이 모반(謀反)한다고 고변했다. 기자헌은 광해군 때 북인의 영수로서 영의정이었으나 폐모에 극력 반대해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던 인물이다. 조정에서 기자헌을 체포하고 이괄과 함께 있는 아들 이전도 체포하겠다며 금부도사를 이괄의 진영에 보내자 이괄은 폭발했다.

이괄은 쿠데타 9개월 만인 인조 2년(1624) 정월 17일 선조의 10남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提)를 임금으로 추대한 뒤 군사를 일으켰다. 능양군(인조)이 아니라도 선조의 핏줄은 많았다. 이괄의 군사가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인조는 급기야 서울을 버리고 도주했는데 그 직전 옥에 갇힌 기자헌에게 사약을 내리고 이시언(李時言)·유공량(柳公亮) 등 나머지 36명은 목을 베어 죽였다. 인조 2년(1624) 1월 25일의 일인데, 이귀는 국문하여 사실을 가린 후 죽이자고 주장했으나 김류가 “변란이 서울에서 일어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면서 모두 죽이자고 주창해 인조가 따랐던 것이다.

폐모를 반대하다 귀양 간 기자헌마저 죽였으니 폐모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 영의정 이원익은 다음 날 이 소식을 듣고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참여치 못했으니, 이제 나는 늙어 폐물이 되었구나”라고 혀를 찼다고 전한다. 서인이 구색 맞추기용으로 끌어들인 남인의 현실이었다. 서울까지 점령하고 흥안군을 국왕으로 추대했던 이괄은 장만이 이끄는 관군과 길마재[鞍峴]에서 맞붙었다가 패배했다. 이괄은 2월 15일 이천에서 부하 장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살아남은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후금으로 도주하는데, 『청사고(淸史稿)』 조선 열전은 그가 “향도(嚮導:길잡이)가 되겠다고 자청해 병단(兵端)으로 이끌었다”고 적고 있다. 쿠데타 후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해 청의 분노를 산 것으로도 부족해 쿠데타 세력의 내분으로 청의 길잡이를 만들어 주었으니 이래저래 인조반정은 청의 침략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